#93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고된 고문을 버티지 못하든, 사형대에 오르든 결과는 똑같았다. 이번 면회가 끝나면 다신 클라우스를 만나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그 또한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했으리라. 하지만 클라우스는 마냥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마법으로 인한 자살입니다. 자세한 경위는 따로 조사해야 알겠지만, 오래 전부터 걸어 둔 마법으로 추정되며….”
누구든 죽기 직전엔 일말의 두려움이라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끝까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환한 미소를 보고 과연 어느 누가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건 죽음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마지막에 내게 보여 준 미소엔 자유를 되찾은 기쁨이 가득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웃지 못했다. 영영 풀리지 않은 난제에 갇혀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그분은 누구인지, 아이리스에게 말한 신탁은 무엇인지, 계약에 얽매인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수많은 비밀을 담은 상자는 더 이상 손이 닿지 않는 심해로 빠졌다. 아래로, 더욱 아래로. 누구도 열어 보지 못하도록….
그러니 길고 긴 체스에서 승리한 자는 내가 아니라- 클라우스였다. 그의 죽음은 잔잔한 호수 한가운데 뛰어든 돌처럼 무수한 파장을 낳았다.
“그분은… 저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전 저택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클라우스? 묘하게 수상한 사내였지. 난 진즉 눈치채고 가까이하지 않았네.”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클라우스를 모르는 척했다. 연회라면 빠짐없이 참석하던 백작도, 평생을 바쳐 클라우스를 모신 시종도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와 얽히는 순간 강도 높은 조사를 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공범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그 중 클라우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증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종종 신전으로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분이었습니다. 헌신적이고, 헛된 꾸밈이 없으셨죠.”
“따로 신관님께 사적인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습니까?”
“항상 조용히 기도실로 들어갔을 뿐, 제가 들은 바는 없습니다. …레톤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신의 가호를 받는 사제도 괜히 불똥이 튈까 봐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사건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조사대에게 추궁을 받았다. 그러던 와중 클라우스가 사이누르를 잡기 위해 고용한 밀렵꾼들이 대거로 붙잡혔다. 그들은 미리 말을 맞춘 것처럼 돈을 받은 대로 일했다는 증언만 반복했다.
그러나 오랜 시도 끝에 그나마 유용한 단서를 건졌다.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으면 즉시 어떤 말을 하라고 알려 줬습니다. 그럼 신호를 듣고 도우러 가겠다고….”
“그 문장이 혹시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였나요?”
“아, 아니. 그걸 어떻게….”
클라우스는 한 배를 탄 이들에게 똑같은 마법을 걸어 두었다. 하지만 문장을 읊는 순간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지 말하지 않았다. 결국 비브린트 숲의 호수 아래 가라앉은 사내도 그 마법으로 죽은 것이었다. 목에 꽂은 칼은 눈속임일 뿐.
이후 조사대가 저택을 샅샅이 뒤져 봤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폴론이 있었던 다락방은 이미 클라우스에 의해 깨끗하게 청소된 후였다. 어쩌면 클라우스는 이미 모든 일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치밀한 계획의 마침표는 자살이었다.
끝내 조사대는 부족한 증거를 어떻게든 이어 붙여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분’은 레톤 신이고, 클라우스가 들었다던 신탁은 환청이라는 거야?”
“조사대의 입장은 그래요. 죽은 아내가 살아있다고 믿는 편지 내용에서 완전히 미치광이로 낙인찍힌 모양이에요. 다른 증거가 없는 한, 그게 최선의 추측이었겠죠.”
“웃기고 있네. 단체로 미친 거 아냐? 단순히 광신도였다는 걸로 끝낼 게 아니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공범을 찾는 과정에서 사건이 너무 많이 퍼져 버렸어요. 얼른 결과를 내라고 압박을 받는 탓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나 봐요.”
클라우스는 국법을 어기고 마물을 사익으로 쓴 죄와 가족의 시신을 유기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더하여 삼족을 멸하리란 황명이 내려왔지만, 이미 클라우스 가문은 완전히 몰락한 후였다. 그 저택엔 아무도 없다. 오직 보라색 꽃이 만들어 낸 심오한 바다만이 물결칠 뿐이다.
모든 진실을 전해 들은 아이리스는 목에 두른 가죽끈을 만지작거렸다.
“어때요?”
“마력이 사라졌어. 이젠 그냥 목줄이야.”
“…다행이네요.”
클라우스가 사라지면서 혹여 아이리스에게도 영향이 미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이리스는 아무 문제없이 계약에서 벗어났다. 단지 거짓된 계약 조건에 속아 지금껏 전전긍긍했다는 사실이 상당히 분한 듯 보였다.
“하, 아주 제대로 놀아났네. 마법도 못 쓰는 새끼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아마도 ‘그분’의 생각이겠죠. 헤카테를 만드는 방법까지 알려 줬으니까요.”
“개자식. …그래서 그 망할 문장이 뭐였는데?”
귓가에 남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이를 언급한 자들이 전부 주검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몇 번을 말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아이리스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거였어?”
“…아는 문장이에요?”
“유명한 신탁의 한 구절이잖아. 웬일로 교수님한테 안 물어봤냐?”
“예? 아, 그게… 워낙 바쁘셔서 못 여쭤봤어요.”
학교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아스레인은 근래 조사대 일에 협력하느라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직 향 때문에 후유증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날이 걱정만 늘어갔다.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아이리스가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내, 내가 말해 주면 되잖아. 뭘 그런 표정을 짓냐.”
“어떤 신탁이었는데요?”
“에브게니아 1세…. 그러니까 선대 에브게니아가 아직 공작이던 시절 얘기야. 시오의 마지막 황제가 벌여 놓은 정복 전쟁에 마물의 반란까지 합쳐져 그야말로 개판이었지. 바로 그때, 신탁이 내려왔어.”
이내 아이리스는 노래하듯 유려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 맺힌 서리가 하늘을 뒤덮어 눈앞에 어둠이 드리운다. 오직 구름을 뚫고 뻗은 손만이 태양에 닿을 수 있을지니. 그대. 설령 그림자가 집어삼킬 듯 쫓아와도 두려워하지 말라.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줄곧 원작에 나온 신탁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이쪽도 내용이 만만찮게 미심쩍다. 대신관은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가지 않도록 반드시 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해야 한다. 그 탓에 신탁은 늘 비유로 둘러싸여 있어 곧바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뭐… 너도 알겠지만, 신탁은 이해하기 나름인지라 정확한 해석은 없어. 하지만 선대 에브게니아는 그 신탁을 전술로 이용했어.”
“전술이요?”
“당시 에브게니아 공작은 큰 전쟁을 앞두고 있었거든. 병력이 한참 딸려서 질 위기였는데, 마침 신탁이 내려온 거야. 그래서 신탁대로 ‘불’을 이용해서 시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지. 이후 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탁이 되어 노래나 시로도 많이 인용됐어.”
“전혀 몰랐어요….”
“아, 그래? 마법사들 사이에서 신탁을 기도문으로 쓰는 건 흔한 일이거든. 클라우스도 그 문장만 떼서 기도문으로 쓴 걸 수도 있어.”
정말 그것뿐일까? 다른 기도문이나 시구도 아니고, 일부러 그 신탁을 사용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어째서 클라우스와 관련된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풀리진 않고 쌓여 가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흉터가 남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아무튼 이제 그 목줄은 벗어도 돼요.”
“어어, 그러겠지. 근데 그냥 하고 있으려고.”
“왜요? 불편하지 않아요?”
“불편해. 그래서 하고 있는 거야.”
아이리스는 제 목을 조르듯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잊으면 안 되니까.”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는지, 아이리스는 힘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회색 눈동자에는 일순 마석을 받을 때처럼 짙은 죄책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묻기에 급급한 클라우스와 달리, 아이리스는 목줄을 끝까지 차고 있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복잡한 감정을 곱씹고 있을 아이리스를 위해 조심스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로 반겼다.
“아, 교수님! 일은 다 끝나신 거예요?”
“그래. …조금 피곤하군.”
아스레인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볼 때마다 얼굴이 반쪽이 되는 것 같다. 또다시 일을 하려고 책상으로 향하는 아스레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는 게 어때요?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됐네. 난 자네가 더 걱정이야. 도통 쉬지를 않으니….”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잖아요. 교수님이 푹 쉬시면 저도 마음 놓고 쉴게요.”
피곤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얼마 만에 보는 웃음인가. 고생에 대한 보상은 그걸로 충분했다. 따사로운 눈빛이 잠을 깨우는 봄 햇살처럼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러다 문득 아스레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음? 자네도 있었나?”
소파에 앉아 있는 손님을 이제야 발견했는지, 아스레인은 떨떠름한 눈초리로 아이리스를 흘겨봤다. 정중히 인사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이리스는 달갑지 않은 반응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있었…. 하, 아까부터 태오랑 단둘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들어오기 아주 오래전부터요.”
“마법학과로 전과하고 나서 꽤나 한가해진 모양이군. 그쪽은 과제를 안 주나 보지?”
“제가 워낙 능력이 좋아서 이미 다 했습니다. 교수님.”
“그 대단한 능력, 마물학과에서 발휘하지 그랬나.”
“그렇게 눈치를 주시는데 어떻게 계속 있겠습니까?”
“자네가 그리 의지박약한 학생인 줄 몰랐는데.”
“…….”
어떻게 저러지? 나도 아이리스처럼 교수님이랑 친근하게 투닥거리고 싶은데, 쉽게 되질 않았다. 입술을 비죽이며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자 아이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 아스레인은 아이리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아이리스는 사뭇 당황스러워했다.
“자, 잠깐. 말로 하시죠…?”
아스레인은 묵묵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리스가 연신 내게 도움의 눈짓을 보냈지만, 아스레인이 허튼 행동을 할 리 없으니 얌전히 기다렸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아이리스의 목줄에 닿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세심하게 살펴보던 아스레인이 말했다.
“이제 괜찮네.”
“예?”
“남아 있는 마력은 없으니 더 이상 목숨을 위협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아, …감사합니다.”
아이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왠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리스를 한참 동안 조용히 내려다보던 아스레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계약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하네.”
“하하, 교수님 같은 분께서 이해하신다니. 겉치레라도 위로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영광이네요.”
“겉치레라…. 이 세상에 계약에 얽매여 있지 않은 존재는 없네.”
낮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그에 반해 아이리스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 혼잣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인 것 같다. 내가 과민한 건가.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틀린 적이 없어 걱정되었다.
아스레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돌렸다.
“적당히 쉬다가 가게. 태오를 귀찮게 하지는 말고.”
“그리 말씀 안 하셔도 곧 가려고 했습니다.”
퉁명스러운 아이리스를 뒤로 하고, 아스레인은 내게 다가왔다.
“그럼 오늘은 네 말대로 일찍 들어가마.”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은 아스레인은 조용히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동안 제자리에 머물렀다. 갑자기 말수를 잃은 내가 이상했는지, 아이리스가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왜 그래?”
“아뇨. 그냥… 걱정돼서요.”
이 세상에 계약에 얽매여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 말을 하는 아스레인은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목줄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그에게 목줄을 채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