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무사히 마석의 주인이 정해졌고, 또 다른 곳에서도 기쁜 소식이 들렸다.
“지하실에서 구조된 마물들은 전부 다른 보호소로 갔다는 말씀이시죠?”
“네. 도움이 필요한 마물이 워낙 많았기에 여러 보호소로 나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예전에 교수님과 연이 닿았던 보호소 테티스와 플로라가 도와준 덕분에 살았죠.”
온실에 자주 드나들며 친해진 연구원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비록 구조된 마물들이 넓은 제국에 뿔뿔이 흩어져 직접 상태를 보러 갈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다들 무사히 보호소로 들어갔다니 다행이었다.
그중 안겔루스 대학 내 온실로 들어온 마물은 단 한 개체뿐이었다.
“아직 예민하니 약을 바를 때 조심해야 돼요. 아직 저한테도 경계를 안 풀어서 잘 때만 조심스럽게 발라 주거든요.”
“네. 걱정 마세요.”
방사를 기다리는 마물이 모인 일반 온실과 달리 환자실은 비교적 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구조 직후부터 죽은 듯 잠만 자던 마물이 깨어났다고 하니 만나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구원에게 상처에 바를 약을 받은 후, 혼자서 분리된 구역으로 향했다. 잠시 무슨 말부터 꺼낼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고운 모래 위를 기어 다니던 마물이 인기척을 느끼고 꼬리 끝을 바짝 세웠다.
[누구야…!]
“안녕. 프라민.”
붕대를 감아 주려는 손길을 대차게 거절했던 마물, 프라민이 안겔루스에 들어왔다.
삭막한 황야에서 서식하는 프라민은 영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몸만큼 두툼한 꼬리를 지녔다. 화려한 비늘은 먹이를 유인하기 유용한 데 반해 포식자의 시야에도 쉽게 포착된다. 따라서 주로 바위틈이나 죽은 나무에 숨어 지낸다.
그래서인지 프라민의 구역은 황량한 모래 위에 메마른 나무토막과 바위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
안으로 들어가자 설익은 라임색 눈동자가 나를 경계하듯 훑어보았다. 얼핏 도마뱀을 닮은 것 같다가도 몸을 둘러싼 선명한 마력에 역시 마물이라는 걸 느꼈다.
지하실에선 마냥 웅크리고 있어 어린 개체인 줄 알았는데, 도감을 보니 성체까지 자라더라도 1m가 채 되지 않는단다. 아무래도 이 프라민은 성체가 되기까지 마지막 탈피를 남겨 둔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때 자작에게 붙잡혀 비늘이 억지로 벗겨진 모양이다.
“그래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네.”
철창에 쓸려 발갛게 부어 있던 상처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아물어 있었다. 비늘이 새로 돋아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 정도 속도면 금세 일반 온실로 나올 것이다.
“프라민? 약 바를 시간이야.”
아직 이해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자 마른 나뭇가지 뒤에 숨어 있던 프라민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미동도 없이 서 있으니 공격적으로 올라간 꼬리가 슬슬 내려갔다. 이윽고 프라민은 내게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정 거리를 두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
[바다 냄새에….]
“응?”
[풀 냄새까지 나네.]
오케아노스와 히페리온을 말하는 거겠지. 혹시나 해서 손목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 봤지만, 포근한 비누 냄새와 씁쓰름한 약초 냄새가 섞여 날 뿐이었다.
멋쩍게 손을 내리고 문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한동안 나를 중심으로 열심히 자전하던 프라민이 내 앞에 우뚝 멈췄다. 냄새로 인해 뭔가 떠오른 걸까. 휘둥그레 뜬 눈에서 날카로운 경계심이 스르르 사라졌다.
[어라, 너는 전에….]
“나를 기억하는 거야?”
환하게 웃으며 손등을 내밀자 반가운 시스템 알림이 들렸다. 어째 오케아노스의 일부가 섞인 후로 마물의 마음을 쉽게 얻는 기분이다. 동질감이 느껴져서 그런가. 아무렴 좋았다.
[네가, 아니.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어요?]
“그야 널 보러 왔으니까.”
[어? 뭐예요? 어째서….]
“내 목소리가 들려?”
[네! 왜지? 왜 들리는 거예요?]
“이제야 마음이 통해서 그런가 봐. 난 줄곧 네 목소리가 들렸었거든.”
[정말요? 내 목소리가 들려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프라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우와아! 헤벌어진 입에서 나온 아이 같은 감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진정하라며 손짓했지만, 이미 경계가 풀린 프라민은 내 주변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인간이랑 처음 말해 봐요!]
“그래? 그럼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좋아요!]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게 본모습이겠지. 내게 선선히 마음을 열어 주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잔뜩 날을 세웠던 프라민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보다 말 안 높여도 되는데….”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은인한텐 깍듯이 대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거든요.]
이윽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치를 살피기에 상체를 숙여 눈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프라민이 쭈뼛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응?”
[그땐 오해했어요. 이상한 인간인 줄 알았거든요.]
“괜찮아.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자 두꺼운 꼬리가 술렁술렁 움직였다. 그 주변에 피어오르는 작은 모래바람이 프라민의 기쁨을 한껏 드러냈다. 얼마간 조용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프라민이 대뜸 말했다.
[아저씨!]
“…아, 아저씨?”
[네. 아저씨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아저씨라니…. 물론 애들한테는 스물이건 서른이건 전부 아저씨로 보이겠지만, 다소 충격적인 호칭이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리자 악의 없는 눈빛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어, 어. 아니야. 왜 그래?”
[저 아저씨 어깨에 올라가도 돼요?]
“그럼~ 대신 약부터 바르기로 할까?”
품에서 연구원에게 받은 약병을 꺼내자 프라민이 냉큼 바위 뒤로 숨었다.
[우웩. 그거 꼭 발라야 돼요?]
“아파도 바르는 게 좋아. 지금은 비늘이 없어서 모래에 닿으면 따갑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요….]
흘끔거리는 시선에서 망설임이 드러났다. 예전 보육원에서 봉사할 때, 약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었더라. 약병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비밀 이야기하듯 속삭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프라민?”
[…뭘요?]
“약을 다 바르면 어깨가 아니라 내 머리에 올라가게 해 줄게. 어때?”
[헉, 머리요…?]
“응. 여기 엄청 높다?”
[와아-! 좋아요!]
혹시라도 내 마음이 바뀔까 봐 프라민은 냉큼 튀어나왔다. 내 무릎 위에 얌전히 자리 잡아 준 덕분에 목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약을 바를 수 있었다. 여린 피부가 움찔거리는 걸 보면 분명 아픈 건데, 프라민은 씩씩하게도 버텨 주었다.
[근데 프라민이 제 이름이에요?]
“아, 우리는 너희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뇨. 신기해서요. 우리는 스스로를 용의 후예라고 부르거든요.]
듣고 보니 비늘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옆모습이 은근히 드래곤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또 맨날 땅굴을 파는 마물이 있는데, 걔는 우리를 ‘황야의 여명’이라고 불렀어요.]
“황야의 여명?”
[해가 막 뜰 무렵이면, 비늘에 햇빛이 비쳐서 반짝반짝 빛났거든요. 그걸 보고 아침이 오는 걸 알았대요.]
“되게 멋있다~”
[정말요? 정말요?]
신이 난 프라민은 두꺼운 꼬리로 내 무릎을 팡팡 두드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운 나머지 꼬리에 약을 발라야 하는 것도 잊은 채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고향이랑 비교하면, 여긴 어때?”
[모래가 너무 부드럽긴 한데…. 음, 나쁘진 않아요.]
“네가 살던 곳은 더 거칠었어?”
[네! 바람이 불면 거친 모래가 막 날아다녀요. 예전엔 인간들도 몇몇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전 본 적 없어요. …아! 종종 땅이 흔들리기도 하는데, 그때 우린 커다란 돌 틈으로 숨어요.]
“지진이 자주 나는 거야?”
[으음~ 할아버지께선 땅이 흔들릴 때마다 그분이 노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분…이라니?”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프라민은 힘껏 앞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영역에서 어어어엄청 높은 산이 보이거든요. 할아버지께선 그 산에 위대하신 분이 계신다고 그랬어요. 언젠가 그분의 화가 폭발하면 산꼭대기에서 뜨거운 불이 쏟아지니 조심해야 한다고요.]
“화산이구나….”
[그래서 우린 매번 무더운 날이 오면, 비늘이랑 번데기를 가져가 그분이 계신 방향에 묻어 뒀어요. 가끔 선물이 마음에 드는 날에는 비를 내려 주시거든요.]
“그럼 그분의 화가 폭발하는 것도 본 적 있어?”
[아뇨! 저는 못 봤어요. 아버지랑 할아버지도 진짜 불이 터지는 건 본적 없대요. 할아버지께선 예전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길 해 주신 거래요.]
화산을 신격화한 설화는 인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설마 마물도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프라민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방대한 카르사 제국 안에 수도 없이 많은 산을 떠올리다가 문득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네가 살던 황야가 코카서스 산 근처야?”
[코카… 네? 그 산을 그렇게 부른대요?]
“아, 아냐. 미안.”
일전 오케아노스가 코카서스 산을 언급한 적 있어 혹시나 했건만,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었나 보다. 아니면, 단순히 인간의 문명을 접하지 않은 프라민이 산의 이름을 모를 가능성도 있다.
“그럼 혹시 그 산에 가 본 적은 있어?”
호기심에 묻자 프라민이 화들짝 놀라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산 근처에는 가면 안 돼요!]
“왜?”
[그 주변엔 밤이고 낮이고 맨날 모래 폭풍이 불거든요. 게다가 밤엔 엄청 추워지는데, 거기서 길을 잃었다간 다신 가족을 못 만난다고 들었어요. 오래 전에 우리 영역을 지나서 그 산으로 갔던 인간도 결국 폭풍의 먹이가 됐죠.]
“…무서운 곳이구나.”
인간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장소라면 비교적 찾기 쉬울 것이다. 나중에 자연으로 돌아갈 프라민을 위해서라도 고향을 찾아 줘야겠다.
배까지 꼼꼼하게 약을 발라 준 뒤에 뚜껑을 닫으니, 눈치 빠른 프라민이 먼저 물었다.
[약 다 발랐어요?]
“응. 올라올래?”
[네네네!!!]
프라민은 나무 타던 실력으로 내 어깨에 올라와 단숨에 머리를 정복했다. 아직 회복이 덜 됐다고 얕본 내 잘못이었다. 오랜만에 기운을 찾은 프라민과 실컷 놀아주다 보니 오히려 내가 먼저 녹초가 되어 버렸다.
결국 백기를 든 건 나였다. 맘씨 좋은 프라민이 놓아줬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놀았다간 모래 위에 대자로 뻗고 누울 뻔했다.
“…체력을 기르든가 해야겠어.”
옷에 묻은 모래를 털며 터덜터덜 온실을 빠져나왔다. 연구실로 돌아오니 아스레인이 평소처럼 과제를 평가하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가 책장 앞을 서성거렸다.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스레인이 깃펜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찾는 건가.”
“아, 죄송해요. 제국 지도가 나온 책을 찾고 있어요.”
아스레인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위쪽에 꽂힌 책을 빼 주었다. 표지를 넘기자 두 페이지에 걸쳐 그려진 카르사 제국이 모습을 드러났다.
“이보다 크고 자세한 걸 보려면 도서관으로 가야 하네.”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도 괜찮아요.”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봤지만, 아쉽게도 산과 바다를 제하곤 지형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그때 대륙을 감싸듯 양팔을 넓게 벌린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산맥이 바로 익히 들어왔던 코카서스 산의 뿌리였다. 지도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교수님. 혹시 여기 가 보셨어요?”
“거긴 금지된 땅이네.”
“금지된… 땅이요?”
“정찰병을 보내는 족족 돌아오지 못해서 유일한 미개척지라고도 불리지.”
금지된 땅. 유일한 미개척지. 프라민이 표현한 삭막한 황야와 결이 비슷했다.
“갑자기 이곳에 대해선 왜 묻나.”
“온실에서 치료받는 프라민 있잖아요. 그 아이의 고향이 황야라고 들어서요. 그리고….”
코카서스 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전에 오케아노스가 ‘그 마물’이 여기서 태어났다고 했거든요.”
만약 프라민 일족이 줄곧 숭배해 온 그 위대한 존재가 ‘그 마물’이라면. 만약 진이 말한 그 마물의 목격담이 코카서스 산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던 그 마물에 대한 논문을 대륙의 중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교수님은 그 마물에 대해 잘 아시나요?”
호기심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니,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곤란한 듯 시선을 피한 아스레인은 이내 꾹 다문 입술을 열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해 이야기해서 뭘 하겠나.”
“역시… 죽은 건가요?
오케아노스는 그 마물이 선황 유피테르의 손에 죽었다고 했지만, 쉬이 믿기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내 마물 연구의 최종장이 되었으면 하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아스레인은 희미하게 남은 희망에 쐐기를 박았다.
“자네도 시장에서 연극을 봤지 않은가.”
“…뿔이 잘렸었죠.”
“건국 신화엔 과장은 있어도 그 결과만큼은 사실이네.”
아스레인마저도 그 마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말 죽은 걸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남은 것은 변질된 신화와 빛바랜 기록, 구전되는 목격담. 그리고-
“잘린 뿔은 어디 있는 걸까요?”
“글쎄. …오직 거둔 자만이 알겠지.”
행방불명된 그 마물의 사체뿐이었다.
아스레인이 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한참 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로지 죽음만이 기다리는 금지된 땅이라지만, 그 마물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단 희망에 호기심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보물 지도를 찾은 탐험가처럼 전설 속 마물의 서식지를 보고 순수하게 가슴이 뛰었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목소리를 높여 문밖의 손님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학생이라면 진즉 누구라고 정체를 밝혔을 텐데, 묘한 침묵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아스레인도 말 없는 손님이 이상했는지 묵묵히 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른 읽던 책을 덮으며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문을 반쯤 열고 살펴보니 웬 장정이 서 있었다. 말끔한 옷차림에 겉에 로브를 걸치고 있는 남자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빠르게 인상착의를 훑어보다가 로브에 달린 문장을 보고 흠칫했다.
비행하는 독수리- 틀림없는 황실 소속이었다.
“교수님은 안에 계신데, 들어오시겠어요?”
상냥한 미소로 응대했으나 남자는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에게 용무가 있어서 왔다.”
“네?”
황실에서 어째서 나를…?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가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사이 남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훑어보았다.
“출생지 불분명에 연고자 없음, 이라.”
“…….”
“얼마 전까지 아멜리 백작님 아래서 일하던 태오. 맞나?”
난데없이 신상을 줄줄이 읊는 탓에 저절로 미소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겠구나. 조용히 연구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며 물었다.
“…무슨 용무시죠?”
한껏 경계하니 남자는 턱 끝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하 감옥에 수감된 클라우스가 널 만나길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