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89/305)

#89

사이누르 일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마석은 마치 정제된 우주 같았다. 빛을 전부 빨아들이는 탓에 태양에 비춰 보아도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이 안에 그들의 염원과 소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석을 파괴하는 게 옳은 선택이겠지. 고통스럽게 떠난 그들을 더는 이승에 묶어 두고 싶지 않았다. 과연 누르는 어떻게 생각할까. 소중히 마석을 품은 채 누르가 머무는 온실로 향했다.

막 식사를 마쳤는지, 누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뭉뚝한 발을 핥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마주한 광경 때문에 충격을 받진 않았을지 걱정했건만, 건강한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잘 있었어?”

오래된 친구의 집에 들르듯 편안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누르는 평소처럼 반겨 주기는커녕 화들짝 놀래며 잔소리했다.

[너 벌써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나 생각보다 튼튼하다니까.”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자신 있게 어깨를 폈지만, 누르는 코웃음을 쳤다.

[에휴, 속일 걸 속여라.]

“그래? 나름 말끔하지 않아?”

[미안하지만, 난 네 속이 훤히 보이거든.]

“아…. 맞다.”

최대한 피폐해 보이지 않으려 힘껏 꾸며도 누르에겐 소용없는 짓이었다. 누르는 슬금슬금 주위를 맴돌며 마치 의사처럼 근엄하게 내 상태를 살펴보았다. 왠지 벌거벗은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변명을 곁들였다.

“아, 아직 회복하는 중이라 그래. 약도 꾸준히 먹고 있어.”

[당연히 그래야지. 손에 난 상처는?]

“많이 아물었어. 일부러 이쪽 손은 안 쓰고 있고.”

[흐음….]

붕대가 감긴 손까지 확인을 마친 누르가 이내 제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아픈 몸 이끌고 여긴 웬일이야?]

“너랑 긴히 상의할 게 있어서 왔어.”

[상의할 거?]

“우선 지하실에 있던 마안은 교수님께 부탁해서 따로 비브린트 숲으로 보내기로 했어. 내가 직접 옮겨서 가족들 곁에 안치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누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가족에 관한 일인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누르의 앞에 마주 앉아서 축 처진 귀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응. …고마워. 너한테도, 널 도와준 다른 사람들한테도.]

고마운 건 나인데, 이상하게도 인사를 받기만 한다. 두 팔을 뻗어 누르를 꽉 끌어안아 주곤 말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들었다.

“이건 웬만해선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네게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칠흑색 마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밀자 누르의 코가 씰룩거렸다. 끝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보아하니, 벌써 이게 무엇인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리운 냄새가 나네.]

“응. 마안의 힘이 깃든 마석이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몰라서 네 의견에 따르려고 왔어.”

[인간들은 뭐라 했는데?]

“애초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석도 아닐뿐더러, 상당한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분쟁을 일으킬까 봐 부수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 나도 그거에 동의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걸 쓰기가….”

[무서워?]

“아니, 죄스러워.”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기에 죄책감만 가득했다. 누르에게 마석을 보여 주는 이 순간에도 순수한 눈망울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르는 예상외의 답을 내놨다.

[난 써 줬으면 하는데.]

“어?”

[우리는 항상 이 눈으로 더 많은 걸 관철(觀徹)하고 싶어 했어. 그 호기심이 언젠가 독이 될 줄은 알았지만…. 본질이란 미지를 들여다보는 건 우리의 낙이자 떼어놓을 수 없는 숙명이거든.]

어느새 곁에 다가온 누르가 내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며 말했다.

[다행히 나는 너라는 존재를 만났지. 텅 비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많은 게 섞여 있는 본질을 보면 심심할 틈이 없어.]

“…누르야.”

[이 마석도 똑같아. 그들은 새로운 대상을 원하고 있어. …나한텐 똑똑히 느껴져.]

누르는 마석을 돌려주듯 머리로 내 손끝을 살며시 밀었다.

[그러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써 줘.]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일말의 원망도 증오도 묻어나지 않았다. 온전한 신뢰로 가득 찬 눈빛은 아주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저 분쟁을 막는 데 급급해져서 마석을 부수려고만 했던 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내가 열심히 생각해 볼게.”

[응. 우리 가족도 네 선택이라면 기쁘게 따를 거야.]

온실을 떠나 기숙사로 돌아와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누르는 마음껏 써 달라고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까 봐 섣불리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약한 마력으로 마법을 쓸 줄도 모르는 나로서는 누르가 말한 ‘마석의 염원’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야를 주변으로 넓혔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힘을 원하면서도, 늘 새로움을 탐닉하는 사이누르 족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사람이.

“…아.”

그때 문득 한 사람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한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또 한때는 적이었으며,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그라면…. 아니, 그만큼이나 이 마석에 잘 어울리는 존재는 없었다.

“어서 와요.”

뒤뜰 벤치에 앉아 있다가 저 멀리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머리 위로 팔을 붕붕 흔들자 시큰둥한 얼굴을 고수하던 그가 피식 웃었다. 회색 눈동자에도 얼핏 반가운 기색이 서렸지만, 막상 입에서 튀어나온 건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너 벌써 이렇게 싸돌아다녀도 돼?”

“저 사흘 내내 잤어요. 아이리스.”

“아무튼 갑자기 쓰러져도 난 모른다.”

아이리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옆에 앉았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어서요.”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니 말없이 눈을 끔뻑이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누가 보면 십 년은 떨어져 있는 줄 알겠네.”

“아하하. 그랬으면 진즉 달려가서 끌어안지 않았을까요?”

“뭐?”

“네?”

“…아니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리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돌렸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잡으려다가 발을 헛디뎠다. 우왁!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벤치를 짚으려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때 재빠른 손길이 다가와 내 팔뚝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 좀!”

아이리스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연신 짜증을 내면서도 다친 곳은 없나 둘러보는 눈길이 섬세했다. 왠지 연년생 친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꽤 살벌한 표정을 한 아이리스에게 혼나는 데도 슬쩍 웃음이 나왔다.

“…미안해요.”

“웃으면서 사과하는 건 무슨 수작이냐?”

뒤늦게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아이리스는 오히려 제 쪽으로 팔을 끌어당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상처에 감은 붕대가 살짝 풀어져 있었다. 아이리스는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붕대도 다 삐뚤어지고…. 어째 멀쩡한 게 하나도 없네.”

아이리스는 항상 말은 날카롭게 하면서도 행동은 부드럽기만 했다. 다시 둘러주려는 건지, 아이리스는 벌어진 이음새를 잡고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한껏 신중해진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슬쩍 본론을 꺼냈다.

“아이리스.”

“뭐, 인마.”

“마법… 다시 쓰고 싶지 않아요?”

붕대를 둘러 주는 손길이 우뚝 멈췄다. 말없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아이리스에게서 말 못할 고민이 묻어났다.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니, 이윽고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쓰고는 싶지. 나라고 손 놓고 있던 건 아니야. 어떻게든 다시 마법을 쓸 방법을 찾아봤어. 하지만 망가진 코어를 마석으로 대체하려고 하니까 전부 깨져 버리더라. 웬만한 마석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질 좋은 마석을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고. 설령 학교에서 지원해 준다고 해도 수업 때뿐이야. 나 같은 평민은 마석에 조금만 적응할만하면 바로 돌려줘야 하니까.”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드리우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그래서… 이제 마법은 완전히 포기했어요?”

“안 할 수가 없지. 그쪽이 마음 편해.”

자, 끝났다. 아이리스가 중얼거리며 손을 놓아주었다. 깔끔하게 매듭진 붕대를 보니 왠지 예전의 그가 떠올랐다. 유품인 마석을 돌려받기 위해 나를 찾아왔던 아이리스는 사나운 독기로 둘둘 둘러져 있었다.

“그냥 벌 받는 거야. 뭣도 모르고 자작을 따랐던 거, 그리고 너한테 했던 짓. 전부 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남을 위해 붕대를 감아 줄 줄 알고, 기쁜 일에 공감하기도 하며, 아직은 어색하지만 위로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고 있다. 서서히 성장하는 그가 남을 해치기 위해서가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해서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결국 이 얘기하려고 불렀냐? 나 궁상맞은 거 보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뭐?”

“아이리스. 아직 포기 못했잖아요.”

민감한 부분을 들추자 아이리스가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뭘 알아.”

“마법학과 학술대회를 다 같이 구경할 때, 우연히 아이리스의 표정을 봤거든요. 그저 마법이라면 모든 게 신기하던 저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어요. 머릿속으로 수식을 계산하느라 끊임없이 눈동자가 움직였고, 얼마나 집중했으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했죠.”

“무슨….”

“몇몇에겐 격려의 박수를 쳐 주고, 몇몇은 노력하지 않은 걸 탓하면서 계속 생각했죠?”

“…….”

“나라면 더 잘할 텐데.”

학술대회뿐만이 아니었다. 세잔이 마법을 쓸 때면 아이리스는 항상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체념한 이의 것이 아니었다. 마법을 신중하게 분석하는 태도는 살아있는 마물을 관찰하는 나와 닮아 있었다.

더 알고 싶고, 더 파헤치고 싶다는 탐구적 본능.

“아이리스. 포기한 사람은 질투 같은 거 안 해요.”

죽을 때까지도 아이리스는 마법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마물에 대한 호기심을 없애지 못하듯. 그러니 이 마석은 아이리스에게 가야 한다.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탐하는 사이누르의 마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마석을 꺼내어 보여 주자 아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사이누르의 마안으로 만들어진 마석이에요. 어떻게 처리할지 전적으로 제게 맡기겠다며 받았죠. 처음엔 부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마물의 마력이 농축된 마석이라니…. 어떤 목적으로든 이곳저곳에서 달려들 게 분명하니까요.”

지금도 이게 맞는 선택인지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라면. 적어도 내가 아는 그라면, 이 마석에 깃든 염원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 마석을 누구보다 가치 있게 써 줄 사람이 생각났어요.”

마석을 내밀며 시선을 마주치자 눈치 빠른 아이리스가 금세 사색이 되었다.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치는 그는 겁먹은 듯 보였다.

“난 못 받아. 아니, 안 받아.”

“아뇨. 아이리스. 당신이어야 해요.”

불안정하게 떨리는 눈으로 마석을 흘겨본 아이리스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쓸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라고?”

“아이리스는 자작이 무슨 꿍꿍이를 가진지 몰랐잖아요.”

“무지는 면죄부가 아니야! …어떤 방법으로든 나는 그 일에 가담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더욱 받아야겠네요.”

“뭐?”

사뭇 당황한 아이리스가 주춤한 사이, 단숨에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은 낭떠러지에 몰린 것 같겠죠. 죄의식이 끊임없이 아이리스를 바닥으로 끌어당길 거예요.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제 시작일 뿐이죠.”

마석을 쥐여 주며 부드럽게 손을 감싸자 아이리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이누르 사건을 접한 후부터 아이리스의 그림자엔 항상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물론 그가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결국 그 또한 피해자였다.

평생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운명. 그런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힘겹게 체스판의 끝에 다다른 폰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판도를 뒤집을 퀸이든, 킹을 지킬 나이트든…. 아이리스는 이제 겨우 끝에 도달한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부 아이리스의 선택에 달렸어요.”

길을 잘못 들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처음부터 정답을 찾아가는 이는 없으니까. 설령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다하더라도 그냥 돌아가면 그만이다. 평생을 가시밭길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아이리스에게 이쪽에 나아갈 길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뭐가 되고 싶어요? 아이리스.”

결국 어떤 길을 걸을지는 전적으로 아이리스의 선택이었다.

“줄곧 뭐가 되고 싶었나요?”

“…나는….”

조용히 마석을 들여다보는 회색 눈동자에 어두운 먹구름이 졌다. 하지만 그건 흉조가 아니었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 뒤, 깨끗한 바다와 맑은 하늘이 오리란 징조였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아이리스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써 봐요. 이 마석이라면 당신의 코어 역할을 기꺼이 해 줄 거예요.”

기나긴 고민 끝에 아이리스는 눈을 감고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처음엔 겉돌기만 하던 마력이 서서히 마석을 감싸고 돌았다. 이윽고 마석 주변에 따스한 보랏빛이 생기더니, 우웅- 진동하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마석이 익숙하지 않아 서툴지만, 확실하게 마력을 버티고 있었다. 짧게 숨을 들이쉰 아이리스가 기도문을 중얼거리자 들판 위로 산들바람이 불었다. 마치 요정들이 춤을 추듯 메마른 나뭇잎이 아이리스의 눈길을 따라 허공을 날아다녔다.

“아….”

몰아치는 감정을 참지 못한 아이리스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툭, 툭. 칠흑 같은 마석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빛마저 빨아들이는 마석은 투명한 눈물에 비쳐 작은 무지개를 띄웠다.

아이리스는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 않았다. 아니, 닦아 낼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마법을 두 눈으로 담기에 급급했다. 그의 옆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멋진 마법이에요.”

아이리스는 더욱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주인공. 또는 죽은 이를 위한 그릇이 아니라-

그저 ‘아이리스 딜런’이란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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