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88/305)

#88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건조한 공기에 입술이 버석버석 말랐고, 이상하리만치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울렸다. 겨우 성냥을 찾아 촛불을 켜니 밤하늘의 별처럼 곳곳에서 동그란 빛이 떠올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눈이었다. 열망이 담긴 수십 개의 눈동자가 어둑한 지하실을 밝혔다.

좁은 철창 사이로 뻗어 나온 손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혔다. 겹겹이 쌓인 애원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가 보니 철창에 갇힌 누르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옆엔 우악스럽게 뿌리가 뽑힌 히페리온이 도끼로 옆구리가 패여 쓰러져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황급히 그들을 구하려 맨손으로 철창을 긁고, 또 긁었다. 하지만 손톱이 전부 갈려 나가 철창에 핏자국이 묻어나도 그들은 멀어질 뿐이었다. 체념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니 보라색 꽃밭 사이로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미약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시체는, 무서울 정도로 사랑하는 이를 닮아 있었다.

“헉, …허억….”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새까맣게 점멸됐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포근한 이불과 햇빛을 머금은 책장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기숙사 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스템이 다가와 물었다.

- 괜찮습니까? 악몽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만.

“또 그 꿈이야.”

클라우스 저택에서 빠져나온 후로 며칠째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니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아, 이렇게까지 생생할 필요는 없잖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습관처럼 쪽지와 펜을 찾았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방금 전 꾸었던 악몽에 대해 세세하게 적어 내려갔다. 지하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철창은 몇 개나 있었는지. 또 선반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미숙한 솜씨로나마 그림도 그렸다.

옆에서 메모 내용을 지켜보던 시스템이 의아하게 말했다.

- 길몽도 아니고, 악몽을 메모하다니… 이상한 취미군요.

“기억을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어쩌면 수사에 필요한 증언이 될 수도 있고.”

-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증언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은 필요 없을 겁니다.

“그건 맞지만….”

펜촉이 한 곳에 덩그러니 머물렀다. 서서히 번져 가는 검은색 잉크가 다른 글씨까지 침범해갔다. 끝에서부터 조금씩 잉크에 삼켜져 가는 문장이 내 기억과 같았다. 억지로 떠올리지 말라는 의원의 조언에도 답답함을 참기 어려웠다.

지금껏 적어 놓은 쪽지를 한데 모아놓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편지를 찾고 지하실로 내려와서 참사를 목격했어. 누르를 소환해서 클라우스를 제압하고, 히페리온의 도움을 받아 아픈 마물들을 재웠지. 그리고….”

- 그분께서 병사를 이끌고 왔죠.

“맞아. 아스레인이 왔어. 병사들이 지하실을 조사하는 동안,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자고 하셨지. 그래서 아스레인을 따라 정원으로 나왔어. 그리고 난 조금 걷다가 긴장이 풀려서… 기절했어.”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심지어 내가 기절했다는 것마저도 아스레인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막 눈을 떴을 땐, 기절한 나를 옮겼을 아스레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거듭 회상할수록 찜찜한 기분은 점점 커져만 갔다.

정원으로 나온 후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잊어선 안 될 중요한 일이….

“시스템.”

고개를 휙 돌리자 시스템이 대답하듯 곁으로 다가와 섰다. 감정 없는 붉은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대뜸 물었다.

“나 정말 기절했었어?”

- 지금 질문이 상당히 멍청하다는 걸 인지하고 계십니까?

“시스템은 기억할 수도 있잖아.”

- 저는 태오 님과 같은 기억을 공유합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건 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그랬지….”

창가에 기대어 서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실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 내가 감당 못할 기억이면 어떡하나 싶어.”

- 그럼 그대로 잊으면 됩니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건 그래. …그런데 시스템. 왜 이렇게 찜찜한 걸까.”

-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억상실은 내 정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잖아? 그런데 이건 정신적 충격 때문이 아닌 것 같아.”

허락받지 못한 공간에 감히 발을 들여서 억지로 밖으로 쫓겨난 것 같다. 그러나 선뜻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마치 훈련을 받은 개처럼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이 깊게 박혀 있다. 아니, 생각보다 더 강한 세뇌가 두려움과 함께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 생각이 너무 많아지셨군요.

“그런가….”

- 당신에게 꼭 필요한 기억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생각날 겁니다.

시스템의 말이 맞다. 잊은 기억엔 잊은 이유가 있는 거겠지. 머리가 복잡하니 시원한 물이라도 끼얹으려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 외출하십니까?

“너무 오래 쉬었어. 얼른 씻고 오랜만에 출근해야지.”

느긋하게 이부자리를 정리하는데, 시스템이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 참고로 태오 님께서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누군가 노크를 했습니다.

“뭐? 난 못 들었는데.”

- 애석하게도 당신의 청각은 들었다고 하는군요.

“빨리 좀 말해 주지….”

입술을 비죽이자 시스템은 얄밉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누구지? 기숙사장인가.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데…. 크게 하품하며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앞에 서있는 손님을 보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좋은 아침이네.”

“아… 아….”

“내가 깨운 건가?”

“아스…. 아니, 교수….”

교수님이 왜 기숙사 방 앞에 계시는 거지?! 아니, 그보다 만인이 공평하게 망가지는 아침에 어째서 저 사람만은 멀쩡한 걸까. 코트와 베스트에 셔츠까지 말끔하게 갖춰 입은 아스레인을 보니, 헐렁한 잠옷 차림은 더더욱 초라해졌다.

문틀에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있자 낮은 웃음소리가 귓등을 간지럽혔다.

“많이도 헝클어졌군.”

아스레인은 까치집 진 머리카락을 보곤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분명 악의 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 덕분에 내 꼴이 얼마나 꾀죄죄할지 훤히 상상되었다. 머리를 정리해 주려 다가오는 손길을 고양이처럼 흐물흐물 피하고 가차 없이 문을 닫아 버렸다.

“뭐야. 뭔데….”

여전히 꿈속은 아니겠지. 아아니… 물론 악몽은 아니지만, 현실감이 너무 떨어지니 도리어 무서웠다. 혹여 아스레인이 문을 열까 봐 문고리를 꽉 붙잡고 시스템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손님이 교수님이라는 건 왜 말 안 했어?”

- 저도 거기까진 몰랐습니다만.

“…진짜 미치겠네.”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며 뒤늦게 거울을 확인했다.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에 퀭한 눈, 버석버석한 입술까지- 나흘 동안 밤새우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대학원생다운 얼굴이었다. 이걸 아스레인에게 보여서 문제지만.

급한 대로 매무새만 정리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접대용 미소를 지으니 아스레인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문전박대를 당하긴 처음이군.”

“죄송해요. 설마 교수님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어딜 그리 급히 가나.”

“씻고 나서 출근하려고 했죠.”

“일주일은 출근하지 말고 쉬라고 했을 텐데.”

못마땅한 표정을 보곤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는 교수님도 안 쉬시잖아요.”

날카로운 시선이 단숨에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아스레인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조용했다. 정작 쉬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스레인이다. 그러나 아스레인은 나를 대신해 황실 조사대에 불려가랴 조사를 협력하랴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지금에서야 여유가 나서 내 앞에 서 있는 거겠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네. 자네가 이렇게 매번 상태를 묻는데 어찌 몸을 혹사시키겠나.”

“제가 유난인 게 아니라 교수님께서 둔감하신 거예요. ‘황금 사과’의 부작용이니까 단순히 넘기면 안 돼요.”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무뚝뚝한 입가에 얼핏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러는 자네는 상태가 어떤가.”

“선생님 말씀으론 코어도 손에 생긴 상처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대요.”

“다행이군.”

“하지만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해요.”

기억에 대해 언급하니 날렵한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기절했다가 막 깨어났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봤었다. 설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아스레인은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조용히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그때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죠? 함께 정원으로 나가서 걷는 와중에 제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그래.”

“뭔가 중요한 일은 없었나요? 제가 잊었을까 봐 걱정돼서요.”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아스레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네.”

표정 관리에 능한 아스레인이었기에 괜히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스레인이 내게 중요한 일을 감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네. 온실 안 조제실로 오게.”

“금방 씻고 갈게요!”

씩씩한 대답에 아스레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샤워실로 튀어 들어갔다. 붕대를 감은 손에 물이 들어가지 않으려 힘겹게 씻고 나오니 그나마 사람다워졌다.

거지꼴이 다신 떠오르지 않도록 말끔하게 차려입고 시스템을 불렀다.

“나, 어때? 시스템?”

시스템은 떨떠름한 눈으로 나를 아래서 위로 훑어보았다.

- 제가 어느 정도로 솔직하길 바라십니까.

“완전 솔직하게.”

- 너저분한 환자에서 깨끗한 환자가 되었군요.

“…아스레인도 그렇게 생각할까?”

- 그분의 시력이 멀쩡하시다면요.

하여간 말을 해도 꼭…. 비아냥대는 시스템을 뒤로 하고 서둘러 온실로 향했다. 조제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책상을 정리하던 아스레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넓은 책상엔 말린 약초와 이름 모를 꽃이 담긴 유리병이 늘어서 있었다. 분명 클라우스 저택 지하실에서 본 물건이었다.

“그건….”

“마지막으로 검수를 부탁받아 가져왔네.”

“위험하진 않은가요?”

“흔히 쓰는 약초일세. …물론 다른 유리병에 들어 있던 것들은 아니었지만.”

실험 재료로 쓰인 마물의 일부분을 말하는 거겠지.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묵묵히 약재를 정리하던 아스레인이 뒤이어 말했다.

“조사가 끝난 사체와 그 일부는 한꺼번에 태우기로 했네. 사안이 중대한 만큼 폐하께서 친히 장소를 내어 주셨지. 영결식이란 이름하에 엄중한 경비를 받으며 조용히 이루어질 걸세.”

“그건 정말 잘됐네요. 저도 참여할 수 있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인원을 최대한 줄이라는 황명이 있었네.”

“…어쩔 수 없죠. 소식이라도 들어서 다행이에요.”

멀리서나마 기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마음이 쓰이는 일이 남아 있었다.

“혹시 사이누르의 마안도 함께 태우는 건가요?”

“음?”

“아, 그게… 마안만큼은 비브린트 숲으로 돌려보내고 싶어서요.”

“그 정돈 충분히 가능할 테니 따로 말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꼭 부탁드릴게요.”

누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안도한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누르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보다 마안에서 추출한 마석이 문제일세.”

“그게 왜요?”

“다른 마석보다 월등히 짙은 마력이 깃들어 있네. 그래서 이 마석으로 인해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았지. 아예 부숴 버리자는 말도 나왔고.”

자연 발생된 마석조차도 비싸게 거래되는 이곳에서 마물의 마력이 농축된 마석은 그야말로 진귀한 물건이다.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만큼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였다. 나 역시 분쟁이 발생하기 전에 부숴 버리는 쪽이 낫지 않나, 생각하던 그때였다.

“일단은 내가 받아 오긴 했지만, 선택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예? 저요?”

“자네와 연관이 깊은 물건 아닌가.”

아스레인은 재킷 안에서 마석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보름달처럼 둥그스름한 마석은 빛이 투과하지 못할 정도로 짙은 검정색을 띠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마석을 집어 들자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만약 부수고 싶거든 다시 내게 가져오게.”

“…그럴게요.”

누르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겠다. 마석을 소중하게 챙치고 온실을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유리 병 안에 담겨 둥그렇게 말린 약초 뭉텅이를 보니 무언가 떠올랐다.

“저… 교수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다시금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저 정말 그때 아무 일도 없었나요?”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교수님께 정원에서 중요한 말을 했던 것 같아서요.”

한참을 고민하던 아스레인이 나직하게 운을 뗐다.

“정말 듣고 싶나?”

“네!”

역시 뭔가 있었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이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별로 좋지 못한 소식인가? 초조해진 나머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애간장이 다 탈 때까지 뜸을 들이던 아스레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네.”

“…예?”

“그래서 난 자네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 대답했지.”

“예에?!”

이게 뭔 소리야. 제정신이냐? 유태오? 아예 고백을 하지 그랬어.

“더 듣고 싶나?”

“아뇨! 아니에요. 충분하네요. 제가… 그랬구나….”

감당 못할 기억이었다. 아스레인을 면전에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 내가 많이 힘들긴 했나보다. 물론 아스레인의 대답이 예상외이긴 하지만, 내 정신건강을 위해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 일은 좀… 잊어 주세요.”

하하, 하.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문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가 민망해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서 그런가. 아스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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