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87/305)

#87

그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커튼 밖으로 나가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아스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섯 명의 경비병이 아스레인보다 앞서 들어와 지하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용히 움직이도록.”

“예!”

명령을 받은 두 경비병은 클라우스 자작을 포박했고, 나머지는 묵묵히 흩어져 단서를 수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철창으로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늘 전선을 누비는 병사에게도 마물이 득실거리는 지하실은 기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잠든 마물 사이에서 걸어 나오자 자작을 묶던 경비병까지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제야 손뿐만 아니라 옷에도 피가 묻은 걸 깨달았다. 뒤늦게 다친 손을 등 뒤로 가리며 아스레인에게 다가갔다.

철창 너머 마물들을 살펴보는 금안은 무서우리만치 차분했다. 마치 이 광경을 이미 예견한 사람 같았다. 얌전히 때를 기다리다가 그의 시선이 내게 닿자마자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낯빛이 안 좋으신데 왜 직접 오셨어요?”

경비병만 보내도 충분할 텐데, 아픈 몸을 끌고 온 아스레인을 보니 반가움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 나갔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클라우스를 흘겨보았다.

“지금 내 몸 상태를 신경 쓸 때가 아니잖나.”

“…그건….”

“일단 나가서 얘기하지.”

아스레인은 경비병들을 향해 능숙하게 일을 지시하고 걸음을 돌렸다. 어두운 계단을 따라 올라오니 지하실 입구인 관 양옆을 경비병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하 휴게 공간에 저택 안의 모든 하인이 모여 있었다. 더러는 겁에 질린 채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어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저들은….”

“조사가 끝나면 풀려날 걸세. …그전까지는 저택을 나갈 수 없을 테지만.”

쪽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온 아스레인은 말없이 벤치에 앉았다. 연구실에서처럼 그 옆에 다소곳이 서 있자 아스레인이 눈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게.”

“아, 넵.”

적당히 떨어져 앉으며 다친 손을 자연스레 숨겼다. 조용히 재킷 안쪽 주머니를 뒤적이던 아스레인은 이내 작은 병을 꺼내었다. 엄지로 뚜껑을 열자 약초 특유의 씁쓸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저걸 왜…. 멀뚱히 쳐다보니 아스레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손.”

“…아.”

보셨구나. 아까부터 계속 눈에 안 보이게 가리고 있었는데, 괜한 짓이었다. 얌전히 다친 손을 내밀자 아스레인은 상처 부위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사이의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연회는 어떻게 됐어요?”

“아이리스에게 뒷수습을 부탁했네. 아마 지금쯤이면 세잔 경도 상황을 전해 들었겠지.”

“많이… 놀랐겠네요. 다친 마물들은 전부 보호소로 가는 거겠죠?”

“일단 인근 보호소와 조사대에 전령을 보냈으니 곧 지원이 올 걸세.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여러 보호소로 나눠서 수용될 테니 걱정하지 말게.”

항상 아스레인의 확실한 일 처리는 신뢰하고 있다. 단지 자신의 상태에 대해 괜찮다고 말하는 그를 믿지 못할 뿐이다. 설명하는 와중에도 아스레인은 착실하게 내 상처에 연고를 덧발랐다. 그 후 깨끗한 손수건을 손에 둘러 세게 묶으니 한결 움직이기 편해졌다.

“감사합니다.”

깔끔해진 상처 부위를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하실은… 전부 말씀드린 대로예요. 마물들은 당분간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기에 다른 방법을 썼어요.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태오.”

“아, 절대 교수님을 속이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설명을 하려면 시간이 걸려서….”

어떻게 말해야 마물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아스레인이 납득할까. 마물 도감에 대해서까지 전부 설명해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초조하게 입술을 뜯자 아스레인이 넌지시 물었다.

“괜찮나?”

“아, 몇몇 마물들은 보셨다시피 상태가 안 좋아요.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보호소에서 지원이 오면 곧바로….”

“아니.”

아스레인은 말허리를 단호하게 자르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네 말일세.”

말문이 턱 막혔다. 괜찮으냐고 물었나. 솔직히 말해서 전혀 괜찮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무사히 잡았지만, 그 목표에 다다르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소모했다.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마물의 목소리는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고, 히페리온과 누르를 소환하느라 마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 솔직히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지금은 코어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건, 아스레인이었다.

“…실은 혼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어떻게 아픈 사람을 두고 갈 수 있겠어요. 아니, 교수님이라 더 걱정됐어요. 제가 저택을 돌아다니는 동안 당신이 어떻게 될까 봐….”

아아, 감정이 북받쳐 자꾸만 목소리가 잠긴다. 할 말이 아직 많은데…. 단어들끼리 서로 먼저 앞서 나가겠다며 다투는 탓에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한다. 계속 입술을 움찔거리기만 하다가 겨우 완성된 문장을 내뱉었다.

“저, 열심히 했어요. 교수님.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물었다.

“상태가 어떠신 거예요?”

오직 아스레인을 담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초조한 마음을 모르는 걸까. 아스레인은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왠지 그를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는 게 너무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눈꺼풀 아래로 드리운 긴 속눈썹도, 태양을 담은 금안도, 내게 내리쬐는 다정한 눈빛도 전부 그리웠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충분히 쉬면 나아질 걸세.”

“정말이죠? …무리하시는 거 아니죠?”

“그래. 내가 왜 자네를 속이겠나.”

무뚝뚝한 입가에 엷은 미소가 서렸다. 그제야 팽팽하게 잡은 긴장의 끈을 놓았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니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잃는 줄 알았다. 내게 태오란 이름만 남기고 떠난 부모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멀리 가 버릴까 봐 연신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불안했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계속 후회했네.”

“…네?”

“자네를 혼자 보내지 말 걸 그랬어.”

따스한 온기가 뺨에 닿아 얼굴을 가린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러자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을 마주했다. 늘 자신에 차 있던 아스레인이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에 복잡한 감정이 끼어 있었다.

유난히 풀 죽은 눈빛이 안쓰럽다가도, 이상하게 좋아서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에 기대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보고 싶었어요.”

처음엔 아스레인을 위해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를 위해…. 누구보다 그를 좋아하면서, 우습게도 그를 변명거리로 삼아 버렸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기 급급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깊게 묻어 버린 감정이나 보잘 것 없는 고민조차도 이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내 모든 걸 바꿔 놓은 아스레인이 곁에 없으면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그에게 충실하는 것. 좋아해서 안 돼도 허락받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테니-

“…자네가 내 곁에 있어 다행이네.”

이 다정한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오로지 단 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원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지금 전령을 받은 지원이 도착했나 보다. 

갑자기 현실로 튕겨 나오니 왠지 모를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지, 지원이 왔나 봐요.”

크흠. 괜히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재킷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감촉을 느끼곤 냉큼 내용물을 꺼냈다. 히아신스 부인을 향한 편지와 배합식이 적힌 쪽지를 겹쳐 아스레인에게 건넸다.

“맞다. 이걸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이게 뭐지?”

“중요한 증거들이에요. 교수님께서 먼저 읽어 보신 후에 조사대에 넘겨 주세요.”

증거를 받아든 아스레인은 가장 위에 있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황금 사과?”

“마물을 광폭하게 만드는 향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나 봐요.”

잠시나마 부드러웠던 아스레인의 표정이 금세 차가워졌다. 혹시 아이리스에게 부작용에 대해 듣지 못했을까 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도 많이 놀라셨죠? 설마 클라우스 자작이 부작용을 숨겼을 줄은….”

“부작용이라니?”

“아이리스가 말해 줬어요. 마력이 너무 강한 사람이면 비슷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요. 자작은 약초가 인체에 완전히 무해하다고 속였지만요.”

처음 듣는 소리인지 아스레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이해를 돕고자 쪽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둥그렇게 말린 약초 그림 아래에 연구 내용이 길게 적혀 있었다. 아까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을 빠르게 훑어가다가 도움이 될만한 문장을 발견했다.

“아, 여기 쓰여 있네요. 마력이 강한 인간 또한 ‘황금 사과’에 취하면 메스꺼운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대로 계속 읽어 가려다가 다음 내용을 눈으로 먼저 훑어보곤 숨만 짧게 들이쉬었다. 쪽지에 쓰인 내용은 내가 예상한 부작용과는 사뭇 달랐다.

단, 반나절 이상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 하며 그보다 적은 시간은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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