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86/305)

#86

마른 꽃잎 아래 클라우스가 미동도 없이 잠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히아신스의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눈에서 흐르는 피가 꽃잎을 물들였으나 창백한 반점을 억누를 순 없었다. 욕망으로 점철된 보라색은 점점 불길한 빛으로 변해 갈 뿐이었다.

일말의 동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는데, 누르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죽었어?]

“아니, 기절했어.”

죄를 저울로 달 수 있다면 그는 천벌 받아 마땅했으나, 심판을 내리는 이는 내가 아니었다. 배후에 있는 ‘그분’을 알아낼 때까지 클라우스는 편히 눈감지 못할 것이다. 남의 목숨을 빼앗은 그가 죗값을 치르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가도록 놔둘 순 없었다.

선반에서 마땅한 끈을 찾아 클라우스의 양손을 단단히 묶어 두고 손을 털었다.

“내게 맡겨 줘서 고마워.”

[…널 믿으니까.]

얌전한 누르의 머리를 툭툭 쓸어 주며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클라우스가 의식을 잃었는데도 마물들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길게 늘어선 철창으로 향하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내가 금방 풀어 줄게.”

철창에 달린 자물쇠를 가리켜도 선뜻 입을 여는 마물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시간 어둠에 짓눌린 탓에 그림자만 봐도 두려워하는 이들이었으니, 곧바로 빛으로 뛰어나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역시 장치부터 부숴야겠어.”

[장치라니?]

“이 안에 마력을 흡수하는 장치가 있거든.”

족쇄를 풀어 준다면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싶었다. 구석에서부터 온실과 연결된 장치를 찾던 그때, 누르가 뭉뚝한 코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오. 저기 위를 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천장 한구석을 채운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뭐지…?”

미세혈관같이 뻗어 나가는 실에 탐스러운 과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단지 장식에 불과한 줄 알았던 구슬은 철창에 갇힌 마물들의 마력을 응축시킨 마석이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고혈을 빨아먹었는지, 마석은 두 손을 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부탁해.”

짧은 한마디에 누르는 곧바로 테이블을 밟고 천장으로 도약했다.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니 실에 연결되어 있던 마석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가을의 은행나무가 잘 익은 열매를 떨구듯 바닥은 금세 마석으로 빽빽하게 찼다.

마력을 흡수하는 장치가 조금씩 사라지니 이내 마물들은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는 당장 도망치자고 외쳤고, 또 누군가는 아직 위험하다고 말렸다. 점차 웅성거리는 목소리는 흡사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누르가 열심히 장치를 부수는 사이, 먼발치에 서있던 시스템이 나를 불렀다.

- 태오 님.

“응?”

- 우선 손부터 지혈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탄식을 흘리며 유리 파편에 찢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깊게 베이지 않았으나, 힘을 주거나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벌어졌다. 얌전히 시스템이 서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낡은 붕대 뭉치가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붕대는 겨우 두 뭉치뿐이었다.

“이게 전부야…?”

- 당장 시야에 들어온 정보는 그렇습니다.

다친 마물의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의약품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연신 한숨만 흘러나왔다. 전혀 치료받지 못한 마물들의 상태가 철창 밖에서 보는 것보다 얼마나 더 심각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부상이 심한 아이들부터 둘러 주는 게 좋겠어.”

붕대를 챙겨들곤 철창 안 마물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여러 마물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개체는 ‘프라민’이었다. 악어처럼 네 발로 빠르게 기어 다니는 프라민은 안타깝게도 비늘이 전부 벗겨져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철창에 쓸려 염증에서 진물이 새어 나오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조심스레 철창으로 손을 뻗으니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프라민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잔뜩 겁먹은 프라민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꼬리를 전갈처럼 들어 올렸다.

[다가오지 마!]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가 지하실에 울리자 일순간 주변이 잠잠해졌다. 다른 마물들까지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마력 흡수 장치가 거의 사라진 덕분일까. 그들이 점차 마물다운 기세를 되찾아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진정해. 상처에 붕대만 둘러 줄게. 응?”

위험하지 않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 붕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당장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에겐 나도 클라우스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뭐라는 거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인간의 말이다!]

[하지만 이 자가 우리의 숙적을 쓰러뜨렸어.] [맞아. 이 인간은 달라.]

[괜한 수작일지도 모르니 조심해.] [그래. 속으면 안 돼…!]

불신은 메마른 숲을 태우는 불길처럼 번져 무서운 열기를 토해 냈다. 틈틈이 나와 클라우스가 다르단 주장도 섞여 있었으나 금세 묻혔다. 괜히 예민한 그들을 자극하는 것 같아 일단은 순순히 물러났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시스템이 나직이 속삭였다.

- 상황이 썩 좋지 않군요.

“…예상했던 일이야.”

인간에게 버림받은 동물도 손길을 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그러니 학대받은 마물들이 인간인 나를 경계하다 못해 공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일단 지하실 밖으로 나가 지원부터 요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 생각도 당연히 했지. 하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저 마물들이 날뛴다면….”

서서히 마력을 되찾은 마물들에게 철창을 뚫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만약 그들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간다면,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게 분명하다. 게다가 이성을 잃은 마물과 호위병이 저택 근처에서 대치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손을 쓸 수도 없이 극으로 치닫게 된다. 누르가 마력 장치를 전부 제거하기 전에 반드시 내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

시스템의 옆을 지나 데히드 꽃이 핀 작은 정원으로 다가갔다. 사이누르를 소환하느라 대부분의 꽃이 시들었지만, 그래도 방법은 이것뿐이다. 바깥으로 말린 꽃잎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히페리온을 불러야겠어.”

- 진심이십니까?

“그 방법밖에 없어. 저 마물들도 히페리온의 말이라면 들을 거야.”

온화한 히페리온이라면 분명 이성을 잃은 마물들을 진정시켜 줄 것이다. 살며시 눈을 감고 마력을 끌어모으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시스템이 손목을 붙잡았다.

- 남아 있는 꽃이 부족해서 마력 소모가 심할 겁니다.

“나도 알아. 시스템.”

- 게다가 부상도 있지 않습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걱정으로 물든 눈과 마주쳤다. 장난스럽던 평소와 달리 진지한 표정을 보니 괜스레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않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니 나를 향한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했을 시스템도 결국 이게 최선임을 깨달은 눈치였다. 차가운 손을 밀어내며 다시금 마력을 집중시켰다. 손끝에 무형의 실체가 느껴지는 순간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페리온.”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쿵, 쿵. 빠져나가는 마력을 채우려는 듯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살아있는 꽃만으로는 부족한 지, 이미 시들어 버린 꽃의 뿌리에 남은 생명력까지 전부 빨아들였다. 축축한 흙 위에 양손을 짚고 엎드리자 식은땀이 가랑비처럼 쏟아졌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무조건 기절한다. 주먹을 세게 쥐자 겨우 지혈된 상처가 점차 벌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멀어져 가는 의식을 겨우 붙잡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필요해요. 히페리온. …제발….”

간절한 속삭임이 닿은 것일까. 부름에 응답하듯 지하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온몸으로 돌풍을 버텨 내다가 눈앞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자마자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내 앞에 몸을 낮추고 앉은 신사는 오늘도 푸르른 녹음을 담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친구.]

“와 줘서 고마워요. 히페리온.”

[…어찌 이리도 춥고 쓸쓸한 곳에 있는 게야.]

“미안해요. 따스한 봄날에 부르고 싶었는데….”

히페리온은 말없이 축 처진 내 어깨를 감쌌다. 옷 위로 닿는 뿌리의 감촉이 더없이 든든하여 저절로 긴장이 풀렸다. 그 사이 히페리온은 지하실에 일어난 참상을 목격하곤 미간을 좁혔다.

[그대. …어째서 저들이 여기 있는 건가?]

“그들은 한 인간에게 배신당해 이곳에 묶여 있어요. …추악한 욕심에 희생당했죠.”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는 금세 생기를 잃고 비탄에 잠겼다. 히페리온과 눈이 마주친 마물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정신없이 술렁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고향을 떠올린 것인지, 나무 그늘 아래서 잠든 날을 추억하는 것인지- 몇몇 마물의 표정엔 형용할 수 없는 애환이 드리웠다.

역시 히페리온이다. 내 어깨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인간인 제 말은 듣지 않으니, 부디 히페리온이 저들을 진정시켜 주세요.”

[그대의 부탁이라면, 또 어린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야지.]

히페리온이 우아하게 손짓하자 그의 옷소매에서 수많은 나비가 튀어나왔다. 날개에 노란 꽃가루를 묻힌 나뭇잎 나비들은 철창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마물의 콧잔등에 앉기도, 상처를 쓰다듬기도 하던 나비들은 이내 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렀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잠들지 못하는 그들에게 달콤한 꿈을. 너른 신시아 잎으로 그들을 감싸고 반짝이는 칸투 꽃으로 길을 안내할 테니, 돌아가자. 빛나는 곳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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