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84/305)

#84

끝이 부드럽게 말린 글씨. 종이에 묻어나는 꽃향기. 가문의 문장도 찍지 않은 편지 봉투. 종종 아내의 이름을 빌려 밀서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의심할 여지없는 연서였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말해 줘.”

어깨에 앉아 있던 나비가 곧장 날아가 문고리에 자리 잡았다.

어두운 방 안. 단 한 개의 촛불만 켜 놓고 그 아래 편지를 내려놓았다. 얼마나 많은 편지를 모아 둔 것인지, 얇은 종이가 무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두께로 쌓였다. 일렁거리는 불씨 아래서 조심스레 편지를 묶은 노끈을 풀었다.

그중 가장 색이 바랜 편지를 집어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여보. 하인들이 이상해. 자꾸 울면서 당신 곁에 흰 꽃을 두려고 하잖아. 당신은 보라색이 제일 잘 어울리는데. 그렇지? 나중에 당신이 깨어나면 보여 주려고 앞으로 편지를 써내려 가려고 해. 언젠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날이 올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게. 우리 곧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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