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이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 사람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상태는 어땠어?”
[모르겠어. 다가가기 무서워서….]
그는 나의 시작이었고, 나의 이상이 되었으며, 나의 전부를 기꺼이 내어줄 존재였다. 그런데 늘 빈틈없이 완벽하던 그가 처음으로 벼랑 끝에 몰린 표정을 지었다. 내 손길을 쳐 낸 직후 그의 눈빛은 성난 바다를 떠내려가는 뗏목처럼 위태로웠다.
곧바로 그를 따라갔어야 했는데….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이 어째서 지금 떠오르는 걸까. 나비를 쫓아가는 내내 불길한 생각을 지우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1층. 그것도 저택 안이 아닌 정원으로 향하는 쪽문 앞이었다.
“계세요…?”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또 어디론가 가 버린 건가. 당황하던 순간,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코너를 돌아가니 저택 외벽 그림자에 달라붙은 인영이 보였다.
“교수님!”
다시 만난 아스레인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무너지기 직전인 뒷모습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다급히 그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고 안색부터 확인했다. 창백한 얼굴은 이미 식은땀 범벅이었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당장 저택 안으로 옮겨 안정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나 혼자 부축하기는 무리였기에 바로 나비에게 부탁했다.
“이쪽으로 아이리스를 불러와 줘.”
[어?! 누, 누구?]
“연회장 안에 있어. 보라색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인간이야. 빨리!”
나비는 재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도 아스레인은 자꾸만 어디론가 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비척거리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안쓰러운 모습을 보다 못해 앞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교수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그러나 아스레인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깜빡이는 눈꺼풀에 초점 잃은 동공, 불규칙적인 호흡까지 쇼크 증상과 유사했다.
순간 패닉 상태에 빠졌다. 새하얗게 변한 머리로는 마땅한 대처법도 약도 떠오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숨을 가다듬었다.
“침착해야 돼….”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스레인까지 위험해진다. 온몸으로 그를 밀어 벽에 기대어 놓고 힘겹게 바닥에 앉혔다. 숨을 쉬기 힘들어 보여 단정하게 맨 타이를 풀고 그의 목을 여민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사이에도 이쪽으로 사람이 오진 않을까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쪽문이 벌컥 열렸다. 본능적으로 아스레인을 감싸며 옆을 돌아보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정말,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의아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아이리스는 나를 보자마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이리스! 여기예요.”
“이, 이게 뭐야?”
“교수님 상태가 이상해요. 일단 손님방에 눕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 어어. 어. 내가 이쪽 팔 들게.”
아이리스와 함께 아스레인을 부축한 덕분에 무사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계단을 올라 손님방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없었다. 손님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스레인을 침대에 눕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사이 완전히 기운이 빠진 걸까. 아스레인은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누워만 있었다.
코 아래에 손을 대어 호흡을 확인하는데, 아이리스가 다가와 물었다.
“세잔 경한테 듣긴 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연회장에서 빠져나가시더니 이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디 기분 탓이길 바랐으나, 확인 사살을 하듯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아이리스와 동시에 숨을 멈추고 문을 돌아보았다. 누구지? 부디 클라우스 자작만은 아니길 빌었다.
쉿. 아이리스는 입술 위에 검지를 대며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그 또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짧게 숨을 들이쉰 아이리스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아이리스?”
“…누님.”
“빈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노크해봤어.”
바짝 얼어붙은 아이리스의 어깨가 일순 축 처졌다. 다행히 아는 사람인가 보다.
“네가 왜 손님방에 있어?”
“그게….”
아이리스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내게 눈짓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탁상을 움직여 교묘하게 아스레인의 얼굴을 가렸다. 그 후 침대 뒤로 몸을 숨기자 아이리스가 옆으로 물러서며 하인에게 방 안을 보여 주었다.
“손님께서 많이 취하신 것 같아서 방으로 옮겼어요.”
“어휴, 그래? 시원한 물 좀 가져다줄까?”
“괜찮아요. 누님. 이 정돈 혼자 할 수 있어요.”
하인은 별 의심 없이 눈으로만 방 안을 훑어보고 말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아스레인이란 것도, 내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아이리스는 자연스럽게 하인의 시야를 가리며 말했다.
“혹시 자작님께서 절 찾으시면 적당히 얼버무려 주세요.”
“응. 알겠어. 내가 또 한 거짓말하잖니.”
“고마워요. 누님.”
“우리 사이에 그 정도쯤이야.”
무사히 하인을 보낸 후, 아이리스는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문에 딱 달라붙어 있다가 침대로 돌아왔다.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문을 흘겨보니 아이리스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걱정 마. 일하던 시절에 친했던 누님이니까.”
“하아…. 다행이네요.”
“그래서 교수님 상태는?”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지만, 아까보다 호흡은 많이 안정됐어요.”
아이리스는 손등으로 아스레인의 체온을 확인하고 자못 놀랐다. 덩달아 당황해하는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제 생각인데…, 약초에 취하신 것 같아요.”
“약초?”
“연회장 안에 계속 피워 둔 향 말이에요. 물론 그 약초는 마물의 마력에만 반응한다고 했지만….”
그게 계속 의문이었다. 마물의 일부와 결합한 나는 그렇다 쳐도, 아스레인은 왜….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는 사이, 무어라 중얼거리던 아이리스가 난데없이 손뼉을 쳤다.
“아!”
“왜 그래요?”
“지나가다가 자작이 혼잣말하는 걸 들었었어. 단어를 띄엄띄엄 들어서 계속 뭔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부작용을 말한 것 같아. 마력이 특출하게 강한 사람에게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정말요?”
“어. 아마 교수님도 그 때문일 거야.”
사실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해독제는 존재하는 걸까. 아스레인이 영영 향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클라우스 자작만이 해독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라면?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클라우스와 거래를, 아니. 그를 구할 수 있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태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기운은 없어도 반쯤 뜬 눈은 또렷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곧장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스레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절 알아보시겠어요?”
아스레인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 짧은 눈짓에 온몸에 힘이 주르륵 빠졌다. 다신 아스레인이 못 깨어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이 순전히 기우라 다행이었다. 초점을 되찾은 금안을 보며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하던 신에게 처음으로 감사를 느꼈다.
“방금 전 자네들이 한 대화를 들었네. …신세를 졌군.”
“상태는 어떠세요? 기분은요?”
“그리 좋은 편도 그리 나쁜 편도 아닐세.”
무리를 모르는 아스레인에게 솔직한 대답을 바란 내 잘못이었다.
방금 전은 아이리스의 기지로 의심을 피했다지만, 또 언제 다른 하인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동시에 셋이나 사라졌으니 클라우스 자작이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다.
“조금 힘드시겠지만, 지체하지 말고 바로 저택을 빠져나가죠. 근처 마을 여관에서 쉬는 게 훨씬 마음 편할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축하려 하자 아스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 괜찮네.”
“제가 안 괜찮아요! 의원에게 상태를 보여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단호하게 손을 뻗었으나, 그의 팔에 닿기도 전에 손목을 붙잡혔다. 손목에 느껴지는 아스레인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이렇게 열이 펄펄 끓는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스레인을 걱정하는 만큼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그에게 화가 나서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레인은 차분하게 말했다.
“태오. 수상한 점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
“네. 하지만 교수님이 우선이에요.”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아스레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한 말을 잊진 않았겠지.”
“…….”
“나라고 예외는 아니네.”
눈앞에서 동료가 다쳐도 내게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번에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그 말에 대답해 버렸다. 하지만 대상이 아스레인이라 생각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스레인을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어요.”
“그 약초가 널리 퍼져선 안 된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알아요. 하지만….”
“내가 짐이 되어 미안하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잔인하다. 내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일부러 이러는 거다. 지금 내가 조사하러 떠나지 않으면, 아스레인은 말 그대로 짐이 되어 버린 것이니….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다. 주먹을 세게 쥔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아스레인이 쐐기를 박았다.
“저택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걸세. 그러니 이번에 반드시 꼬리를 잡아야 하네.”
“…….”
“시간이 얼마 없으니 자네의 감을 믿고 따르게.”
아스레인의 말이 맞다. 전부 옳아서 나 따위가 반박할 말은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아스레인은 내 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그누스. 태오를 부탁하마.”
부름을 받은 아그누스는 그림자 속에서 낮게 하울링했다. 이 와중에도 그 자신이 아닌 나를 걱정하는 아스레인을 보니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리스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붙잡으니 아스레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상태가 나아지면 바로 따라가겠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절대 나오지 말고 푹 쉬세요.”
쿵.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문을 닫고 나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스레인의 상태가 걱정되긴 했으나 곁엔 아이리스가 있으니 괜찮다. 비록 방금 막 정신 차린 사람을, 열이 펄펄 끓는 데다가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나왔지만… 괜찮다.
내 의무는 그를 돌보는 게 아니라 이 저택에 숨겨진 비밀을 찾는 거다. 그것만이 저 사람을 돕는 일이다. 그러니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냉정하고 확실하게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가자. 아스레인 곁으로.
“아까 수상하다고 했던 곳이 어디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리자 근처에 날아다니던 나비가 대답했다.
[3층이야. 따라와.]
앞서 날아가던 나비는 이윽고 두 개의 걸쇠로 잠긴 문 앞에 멈춰 섰다. 심지어 마법으로 열 수 없도록 자그맣게 기도문이 쓰여 있는 걸 보곤 바로 알아챘다. 이곳이 저택 안에서 클라우스의 손길이 가장 많이 묻어난 장소- 서재였다.
“할 수 있겠어?”
[흥. 물을 걸 물어야지.]
삼엄한 문밖과 달리 서재 안은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안으로 날아 들어간 나비 덕분에 쉽게 서재로 들어갔다.
슬슬 해가 지는 탓에 방 안까지 어둑어둑했으나 의심을 받을까 촛불은 켜지 않았다. 수백 개의 책이 꽂힌 책장을 바라보며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차, 나비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게 뭐지?”
서재 구석에 지구본만 한 온실 모형이 놓여 있었다. 마치 클라우스 저택 안에 있는 온실을 그대로 구현한 듯 기둥과 꽃 하나까지 세세하게 표현된 모형이었다. 섣불리 건드리지는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내부 구조를 살폈다. 하지만 수상한 점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이게 이상해?”
[이 안에 공간이 있어. 다른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거든.]
“…뭐?”
공간이 있다니. 이걸 부술 수도 없고…. 반드시 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모형을 지키는 마법식이 없는 걸 꼼꼼히 확인한 후, 조심스레 온실 유리에 손끝을 대었다. 기대와 달리 평범한 유리 표면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모형을 툭툭 건드릴수록 온실 바닥과 유리 뚜껑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유리 뚜껑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뚜껑이 분리되었다. 도리어 경쾌한 달칵 소리에 놀라 뚜껑을 떨어트릴 뻔했다.
“…허.”
뚜껑을 바닥에 내려놓고 보니 모형은 더 이상 온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리가 사라진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심지어 숨겨진 장치를 건드릴까 봐 이것저것 눌러 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눈동자가 시릴 만큼 모형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하늘 위로 뻗은 석조 기둥. 그 기둥을 둘러싼 넝쿨. 마력으로 인해 계절을 거스른 형형색색의 꽃. 작은 새들이 쉴 수 있도록 조성된 관목. 그리고 히아신스…. 어?
“잠깐만….”
온실에 분명 히아신스가 있지 않았나. 그래서 영애들이 히아신스를 보며 죽은 클라우스 부인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이 온실 모형 어디에도 히아신스는 없었다. 히아신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웬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다.
설마. 식은땀이 배어난 손끝으로 들꽃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
들꽃이 심긴 바닥이 미닫이문처럼 밀려 나가며 그 안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자 수십 개의 종이가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히아신스 꽃잎을 빻아 뿌려 넣은 듯 진한 향기를 풍기는 종이엔 짤막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히아신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