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82/305)

#82

수많은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긴장하기는커녕 싱긋 웃으며 시선을 즐겼다. 앞으로 발표할 연구에 한 치 오차도 없어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짧은 인사말이 이어지는 동안, 옆에서 수풀 속 참새가 지저귀듯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이 많은 분들을 모아 놓고 어떤 얘길 할지 모르겠군요.”

“실은 저도 내심 그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수염으로 가려진 입은 끊임없이 클라우스의 자격에 대해 떠들었다.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사이에 끼어들어 단숨에 소란을 잠재웠다.

“그래도 다들 봤잖습니까? 그 아스레인 백작님께서 여기 계신 걸 보면, 꽤 믿을 만한 연구일 겁니다.”

아스레인의 이름에 자격을 운운하던 그들마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클라우스가 아스레인을 초대한 이유였나. 연구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스레인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연구를 보여 줄까. 눈에 불을 켜고 단 하나의 적을 노려보았다. 때마침 클라우스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처음으로 제 오랜 시간을 쏟은 연구를 선보이겠습니다.”

클라우스가 가볍게 손짓하자 단상 아래서 기다리던 하인이 램프를 들고 위로 올라왔다. 램프 안에 들어있는 것은 양초가 아닌 동그랗게 말린 약초 뭉치였다. 램프가 흔들릴 때마다 숭숭 뚫린 구멍으로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그, 역겨운 향기의 원천이었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자작이 물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누구도 향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연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와 달리 나는 죽을 맛이었다. 하인이 램프를 관중을 향해 뻗으니 향이 훨씬 짙어져 속이 메스꺼웠다.

“여러분들께는 향기롭게 느껴지실 겁니다. 심지어 사핀드 백작님께선 이 향료가 무엇이냐고 슬며시 제게 귓속말까지 하셨습니다. 몰래 부인께 선물하려고 하셨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사람들은 불에 달려드는 나방이 되어 향으로 점차 다가갔다. 그와 달리 나는 불을 피하는 산짐승처럼 서서히 향에서 멀어졌다. 어느덧 인파와 동떨어져 홀로 구석으로 피했다. 나와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향이 아닙니다.”

일부러 뜸을 들이던 클라우스가 마침내 향의 정체를 밝혔다.

“오직 마물이 가진 마력에만 반응하는 약초죠.”

뭐? 당황한 나머지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놀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클라우스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태연하게 설명을 이었다.

“광포한 마물은 이 향을 마시면 서서히 이성을 잃고 이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마물은 약초에 취하는 줄도 모르고 점점 쇠약해질 겁니다. 강한 마물일수록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죠.”

서로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클라우스가 연구해 낸 약초는 마물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날뛰게 하는 효과를 가졌다. 그러니 약에 취한 마물은 코어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아 결국 스스로의 몸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이건 광포한 마물을 솎아 내는 방법이 아니다. 그저 마물에게 흥분제를 투여하는 꼴이었다.

“단, 사람에겐 무해합니다. 전 그걸 증명하기 위해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계속 향을 피워 뒀습니다. 실제로 여러분께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연회를 즐기시지 않았습니까.”

당당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여전히 눈치를 살폈고, 또 누군가는 동감하듯 힘껏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 연구가 잘못되었다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선이 두려워서든, 진심으로 공감해서든, 침묵은 장내 분위기를 클라우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었다.

“귀빈 여러분. 늘 마물에게 영토와 백성들을 위협받으며 얼마나 마음고생하셨습니까? 마물과 공생해야 하는 의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인간이 당하기만 해야 합니까. 위험한 마물로부터 우리를 지킬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클라우스는 한 발 앞으로 나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위험인자를 미리 제거할 수 있다면, 공생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뤄 낼 수 있을 겁니다.”

헛소리.

“제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저건 비난받아 마땅한 주장이다.

“이 연구에 흥미가 생기신다면 제게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만 돌아온 건 박수였다. 처음엔 거부감을 보이던 사람들마저 눈치를 보다가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에 동조하지 않는 건 나와 함께 온 이들뿐이었다.

클라우스의 연구는 더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목적부터 결과까지 전부 엉망이다.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마물에게 약을 써서 일부러 이성을 잃게 만든다. 그 후 강한 마물이 날뛰기 시작하면, 그걸 빌미로 제거하거나 시간을 끌어 쇠약해진 상태로 둔다.

결국 마물 토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연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명하신 선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향보다 클라우스의 속내가 더욱 역겨웠다.

시연회가 끝나고 클라우스는 수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이 연구 내용을 조금이라도 빨리 아스레인에게 알려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스레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연회장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누군가 앞으로 끼어들어왔다.

“어땠나.”

한껏 의기양양해진 클라우스 자작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다른 귀족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고 섰다.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미소로 응대했다.

“예?”

“연구에 대해 소감을 듣고 싶다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묻기에 가능한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작님의 말씀대로 인상적인 연구였습니다. …물론 아직 실효성은 모르겠지만요.”

“호오. 실효성이라 함은?”

“부작용이 우려됩니다. 다른 마물…. 아니, 자작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위험분자’가 아닌 마물까지 향에 휩쓸려 도리어 사람들을 해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클라우스는 멍청한 연구에 인생을 낭비했을지언정 바보는 아니었다. 웃음에 숨겨진 진심을 알아챈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물었다.

“지금 내 연구의 깊이를 무시하는 건가?”

“제가 감히 어찌 그럽니까. 혹시 모를 가능성을 제기하는 겁니다.”

“훗. 당연히 효과는 확인했네.”

“그랬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척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녕 궁금했던 건 확실한 효과 따위가 아니라, 그걸 증명하는 데 쓰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찌 확인하신 겁니까?”

“음?”

“효과 말입니다. 설마 마물에게 직접 실험하신 건 아닐 테고….”

뒷말을 흐리자 짙은 눈썹 한쪽이 비죽 올라갔다. 클라우스가 줄곧 고수해 온 여유로운 표정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감정 없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던 클라우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러곤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넌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 많아. 그 버릇이 명을 줄일지도 모르니 조심하게.”

명백한 협박이었다. 입을 꾹 다물자 내가 겁이라도 먹은 줄 아는지, 클라우스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건만 주위를 슬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스레인 교수님은 어딜 가신 건가.”

망할. 역시 그걸 물어보는구나. 속내를 쉬이 드러내지 않으려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대답했다.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흐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비우시다니 제법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군.”

이대로 클라우스가 아스레인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둬선 안 된다.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해서도, 나조차 아스레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도 안 된다. 그러니 일부러 불편한 화제를 꺼내서 클라우스 쪽에서 대화를 회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클라우스 부인께서도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열심히 눈으로 아스레인을 찾던 클라우스의 시선이 단숨에 내게 닿았다. 금방이라도 칼을 꺼내 목을 겨눌 듯 날카로운 살기가 피부에 닿았다. 하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클라우스의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안타깝다니?”

“최근에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년 전에 부인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예?”

클라우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도리어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때 다른 귀족이 다가와 자연스레 클라우스의 신경을 끌었다.

“아아, 클라우스 자작. 오랜만이네.”

“이렇게 와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백작님.”

다행히 위기는 넘겼지만,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클라우스 자작은 아내의 소식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죽지 않은 것인가.

소문과 클라우스의 반응이 엇갈리는 탓에 히아신스의 행방은 더욱 묘연해졌다.

“그보다 대체 어딜 가신 거야….”

그 와중에도 아스레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연회장 구석으로 빠져 귀걸이로 아스레인을 불러 보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마지막으로 본 안색이 영 좋지 못해 더는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전, 새로이 와인잔을 채우고 있는 세잔에게 다가갔다.

“세잔 경.”

세잔은 등을 돌리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교수님께서 사라지셨어요.”

“예? 그게 무슨….”

순식간에 휘둥그레진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침착한 투로 세잔에게 부탁했다.

“별일 아닐 거예요. 그래도 찾아보러 갈 테니, 혹시 자작이 연회장을 떠나려고 하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클라우스가 한눈을 판 사이 조용히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하인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 서서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처럼 얌전히 바닥과 창틀에 붙어있던 나비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번엔 뭔데?]

[또 수상한 점 찾기야?]

“아니, 이번엔 사람을 찾아 줘. 예전에 히페리온을 도와줄 때 같이 계셨던 분 알지?”

[당연히 알지!]

[그분이라면 금방 찾을 수 있어.]

[우리한테 맡겨!]

기운찬 나비들이 제 갈 길을 찾아 떠난 후,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으나 기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맞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또각, 또각. 뾰족한 굽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마주쳤다가 괜한 의심을 살까 봐 몸을 숨길 방을 물색했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피해…!]

어디선가 나타난 나비가 금속 장식이 박힌 문 앞에서 날갯짓했다. 곧바로 나비를 따라 들어가 문을 잠그고 귀를 바짝 붙였다. 또각, 또각. 단지 지나가는 길이었는지 발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완전히 소리가 안 들릴 즈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고마워.”

[뭐, 이 정도 가지고.]

뒤늦게 방안을 둘러보니 벽에 잇달려 걸린 풍경화가 눈에 들어왔다.

“갤러리구나.”

2층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한 갤러리엔 클라우스의 취향이 가득 담긴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꽃을 향한 애착을 보여 주듯 모든 그림엔 다양한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조용히 그림을 훑어보는데, 나비가 날아와 시선을 끌었다.

[이거 좀 봐봐.]

“응?”

[아까 2층에서 찾았다고 한 수상한 물건이야.]

나비는 널따란 창문 사이에 걸린 캔버스 위로 살포시 앉았다. 자작의 소장품 중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서 마력이 느껴져.]

“마력?”

[강한 의지를 담은 물건엔 종종 마력이 깃들기도 하거든. 인간의 염원을 산 우리 어르신처럼 말이야.]

양팔을 넓게 벌려야 겨우 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캔버스에 사람은 겨우 한 손만 한 크기였다. 드넓은 보라색 꽃밭에 그려진 사람은 둘. 그중 여인은 허리를 숙여 꽃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사내는 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워낙 세세하게 그려진 덕분에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클라우스 부부인가….”

추억을 캔버스에 녹이기라도 한 걸까. 그림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림 속 자작의 시선이 미묘하게 아내를 비껴 나가 있었다.

다시금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니 꽃밭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그 실루엣은 작긴 해도 정확히 사람의 형태를 띠었다.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들이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돼.”

키가 큰 꽃 사이를 뛰어다니는 두 아이는 무서울 정도로 서로를 닮아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색은 자작을 빼닮았고, 눈동자 색은 부인과 똑같았다. 배 속에서 눈을 감았다던 쌍둥이였다.

“쌍둥이는 분명 부인과 함께 죽었다고 들었는데….”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아이리스조차 아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저택 전개도에도 아이와 아내의 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아이들이 보란 듯이 그림 속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때마침 캔버스 구석에 쓰인 글자가 눈에 띄었다.

‘복낙원’

선악과를 향한 욕망을 참지 못해 최초의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원죄를 씻어줄 절대자가 나타나 끝내 인간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다. 꽤나 희망적인 어원을 가진 단어였다. 이 단어를 그림에 새겨 놓은 이유가 단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만약 클라우스에게 낙원이 아내와 아이라면, 그에게 낙원을 돌려줄 절대자가 있을 터.

“그걸 찾아야 돼. 그걸….”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 볼수록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왠지 찬란하게 피어난 보랏빛 꽃밭 아래 부패한 진실이 묻혀 있을 것 같았다. 마력을 품은 그림을 홀린 듯 바라보던 그때, 쾌활한 목소리가 이목을 끌었다.

[찾았어!]

“뭐?”

[따라와. 어서!]

문 쪽을 돌아보니 날개 한쪽이 발갛게 물든 나비가 공중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스레인을 찾은 것이다. 급한 마음에도 신중하게 문틈으로 바깥을 확인한 후에야 나비를 따라갔다.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부디, 부디 그에게 아무 문제가 없길.

하지만 신은 단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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