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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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멀미약으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는 데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단기간에 머릿속에 욱여넣은 저택 구조를 잊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하까지 총 4층에 달하는 저택을 효율적으로 돌아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깨끗한 하늘을 도화지 삼아 전개도를 그려 가던 그때, 아스레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속은 좀 괜찮나.”

“아, 네! 약을 먹은 덕분에 끄떡없어요.”

씩씩하게 대답했으나 아스레인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제 곧 클라우스 자작을 만나게 될 테니 걱정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걱정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혹시 몰라서 사라세니아 약물도 챙겨 왔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렸다. …이게 아닌가? 왠지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 뒤늦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갑자기 맥이 풀려서 그러네.”

나직한 웃음소리가 정적을 몰아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 아스레인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웃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다가도, 한편으론 그날 뒤뜰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만 겹쳐 보여 입 안이 씁쓸했다.

마침내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섰다. 창밖으로 보라색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데히드 꽃 특유의 향기가 마차 안을 진동했다. 그리 평범하지만은 않은 정원이었다. 활짝 웃던 내 얼굴은 어느새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초조한 기색을 눈치챈 아스레인이 말했다.

“태오. 이제부터 자네가 할 일을 알고 있겠지.”

“…예.”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네. 그러니 어느 순간이 와도 자네의 감을 믿고 따라가게.”

처음 현장 답사를 갔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아스레인은 어느 순간이 와도 내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라고 강조했다. 설령….

“눈앞에서 동료가 다쳐도, 말이죠?”

“그래.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물러서지 말게.”

“알겠습니다. 교수님.”

마음을 바로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연회장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할 것 없는 연회 모습이었다.

아스레인은 인파로 향하지 않고 차분하게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쪽 벽을 전부 채운 온실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택의 중심을 잡은 온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석조 기둥을 타고 올라간 꽃나무는 1층에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뻗어 있었다.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들이 뒤섞인 풍경은 잘 정돈된 정원보다는 숲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잠자코 온실 내부를 살펴보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군.”

“왜 그러세요? 혹시 키우면 안 되는 품종이라도 찾으셨나요?”

“아니, 이 안에 있는 식물은 지극히 평범해. 다만….”

유리 벽 너머로 천장을 올려다본 아스레인이 작게 읊조렸다.

“온실 안이 마력으로 가득 차있는데, 마력 공급 장치가 보이지 않는군.”

그의 말에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았으나 정말로 장치가 없었다. 똑같이 마력으로 유지되는 안겔루스 대학 내 온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체 이 많은 마력을 어디서 끌어오는 건가.

고민에 잠긴 그때, 등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스레인 교수님 아닙니까!”

아스레인이 돌아보자 나이가 지긋한 귀족은 반갑게 인사했다. 그 오지랖 넓은 인사말 때문에 아스레인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여러 귀족에게 둘러싸인 탓에 빠져나올 틈도 없어 보였다. 결국 인파를 따돌리길 포기한 아스레인은 조용히 내게 눈짓했다.

어쩔 수 없이 아스레인에게서 저만치 멀어져 온실 안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비록 아이리스가 말한 새들은 없었지만, 다른 의심을 지우고 보면 꽤나 아름다운 온실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도 온실은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던 영애 둘이 나란히 온실 벽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저기 저 꽃, 봤어요?”

“봤죠. 역시 애처가는 다르다니까요.”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석조 기둥 옆에 핀 히아신스가 보였다.

“아내의 이름과 같은 꽃을 온실에 심어 두고 항상 그걸 보면서 그리워한다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워요.”

히아신스 클라우스 자작 부인이 세상을 떠난 건, 아이리스가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으나 자작은 몸이 아픈 아내를 보호하며 끈끈한 금실을 자랑했단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잠시, 2년 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수년이 지나도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지 않는 자작을 보며 세간은 이렇게 말했다.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나 봐요.”

“그것도 그렇지만, 아이와 아내를 한날한시에 잃었으니 충격이 더욱 컸겠죠.”

부채로 입을 가린 영애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아이라뇨?”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대요. 하필이면 그걸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알았으니 더욱 힘들었겠죠.”

“그걸 어떻게….”

“우리 가문에 클라우스 자작 저에서 일하다 온 하인이 있거든요.”

병으로 죽은 여인과 그 안에 잠든 쌍둥이. 그리고 아내를 잊지 못하는 자작. 자작을 향한 의심을 전부 감안하더라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다른 정보가 없을까 하고 홀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는데, 처음 들어왔을 땐 미처 자각하지 못한 것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냄새지…?”

홀 안에서 향을 피운 것처럼 희미하게 냄새가 났다. 심지어 맡으면 맡을수록 점점 속이 역해져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가렸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어떤 손님들도 냄새를 지적하지 않았다. 단체로 코가 마비된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끝내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홀 밖으로 나왔다. 음식을 나르기 바쁜 하인들은 복도를 거니는 내게 커다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멜리 백작가에서 일할 때 받은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

“이쪽은 냄새가 덜하네….”

ㄱ자 구조로 꺾인 복도로 걸어가 조끼 안쪽에 숨겨 놓은 꽃을 꺼내었다. 조용히 주변을 살핀 후, 살며시 히페리온의 씨앗을 불렀다. 들꽃은 이내 시들고, 자그마한 빛과 함께 나뭇잎 나비 네 마리가 나타났다.

[하암, 또 실험이야?]

“아니야.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어.”

[드디어 실전이구나!]

[저번엔 너무 심심했다고.]

[맞아. 그냥 확 도망쳐 버릴까 싶었어.]

내 부탁을 재밌는 게임으로 여기는 나비들은 힘차게 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하면 돼?]

“이 저택은 총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러니 너희들이 한 층씩 맡아서 조사해 주면 돼. 수상한 것을 발견하면 바로 내게 말해 줘.”

[수상한 것이라….]

[그 기준이 뭔데?]

“쉽게 들어갈 수 없도록 숨겨진 공간 같은 거 말이야.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하거나, 인간이 아닌 것의 냄새가 나는 곳도 좋아.”

[그 정도야 쉽지~]

[내가 1등 할 거야.]

[흥, 웃기시네. 가장 먼저 찾는 건 나야!]

“부탁할게.”

나비들은 서로 앞다투어 뿔뿔이 흩어졌다. 설령 그들이 인간을 마주친다 하더라도 외형 덕분에 밖에서 흘러들어온 나뭇잎쯤으로 보일 것이다.

나비들이 사라진 후, 소환에 쓰인 꽃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시든 꽃잎이 보라색 물결로 가득한 정원에 흩뿌려졌다. 퍽 자연스러운 증거 인멸이었다.

겨울 바람에 춤추는 데히드 꽃은 아름다우면서도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하아….”

몇 년 전, 이 저택에서 하녀가 죽었다. 병사라고 덮어씌워진 그녀는 ‘봐서는 안 될 걸 봤기에’ 제거당했다. 명료하지만, 미심쩍은 죽음이었다.

몇 달간 하인으로 살아 봤기에 아주 잘 알고 있다. 무거운 입이 목숨보다 소중한 우리에게 호기심은 사치다. 그러니 매일 루틴이 정해져 있는 하인이 갑자기 비밀 공간을 찾아서 들어갔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하녀는 비밀을 일부러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우연찮게 진실을 목격한 거야.”

보랏빛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활발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태오. 태오!]

멀리 있는 나비 중 하나가 보내는 의식이었다.

[2층으로 와 봐. 뭔가 찾은 것 같아!]

“내가 지금 갈게.”

걸음을 돌리는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어?”

[나도 찾았어! 지금 3층으로 와봐.]

[태오. 1층으로~]

[일단 지하로 와.]

타이밍 한번 야속했다. 씨앗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말했다. 선택지가 무려 네 갈래로 나뉘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어느 층에 진짜 단서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확실했다.

“일단 지하부터 갈게.”

다른 층과 달리 지하에서는 하인이 생활한다. 심지어 부엌까지 있어 지하를 오가는 하인을 만나기라도 하면 의심을 살 것이다. 하지만 손님이 몰려 연회로 한창 바쁠 지금이라면 비교적 지하는 한산해졌을 테다. 나중에 휴식하러 온 하인들을 마주치기 전에 어서 지하부터 샅샅이 뒤져야 했다.

[태오. 이쪽으로 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비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전개도를 보고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지하는 상당히 깔끔하고 밝았다. 하인들의 취침 공간과 휴식 공간이 나뉘어 있어 비교적 복지 환경도 좋아 보였다.

전개도에서 본 대로 방을 하나씩 짚어 가며 가다가 나비에게 물었다.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야?”

[여기야. 여기.]

나비는 새하얗게 칠해진 문 앞에 멈춰 서서 빙글빙글 돌았다. 다른 방에 비해 유독 깨끗했지만, 이상하게 들어가는 게 꺼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리스는 전개도를 그릴 때, 보기 편하도록 방의 용도를 적어 주었다. 그런데 이 방은 전개도를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았다.

“…용도가 적혀 있지 않은 방이야.”

[그래? 이 안에서 열기가 느껴져.]

부엌과 다소 떨어진 방에서 열기가 느껴질 리 만무했다. 씨앗의 감을 믿고 용기 내어 문고리를 돌렸으나 굳게 잠겨 있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가로막혀 당황하던 찰나, 나비가 날개를 가볍게 팔랑이며 말했다.

[나한테 맡겨. 이 정도는 거뜬하니까.]

나비는 종이만큼 얇은 문틈으로 쑤욱 들어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지하로 내려올까 봐 지체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기세 좋게 단서를 찾겠다는 마음이 무색하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이건….”

길을 따라 놓인 보라색 꽃과 사방을 가득 채운 양초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장에서부터 흘러내린 얇은 천은 넓은 제단까지 닿았고, 그 제단 위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관이 놓여 있었다.

은은하게 흔들리는 불빛이 비추는 것은 다름 아닌 여인의 초상화였다. 그 아래 필기체로 적힌 글자를 보고 제자리에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치부까지 감싸 준, 사랑스러운 히아신스 클라우스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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