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78/305)

#78

뒤늦게 1층으로 내려왔지만, 아스레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일이 생긴 건가?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마침 아스레인과 대화하던 학장을 마주쳤다. 이제 와 시선을 피하긴 어려워서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한참 나를 바라보던 학장은 한 박자 늦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자네는 아스레인 교수의 제자 아닌가.”

“처음 뵙겠습니다. 학장님.”

“그래. 무슨 일로 이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겐가.”

“교수님을 찾고 있어요. 혹시 못 보셨어요?”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당사자이니 대략 아스레인이 어디로 갔는지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예상대로 학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스레인 교수라면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러 갔네. 급한 일인가?”

“아, 급한 일은 아닙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학술대회 때 인맥 넓은 아스레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구나. 당장 전해야 할 급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학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정원으로 나오니 때마침 종이 세 번 울렸다.

마법 학술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였다. 미리 예고된 대로 마법학과 입학 시험이 이루어지는 야외 시험장으로 향했다. 본관에서 꽤나 거리가 먼 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마법 학술대회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쪽으로 돌아가자 먼저 도착한 진과 아이리스가 반겨 주었다. 그사이 잠이 깬 아이리스와 달리 진은 때깔만 고운 해골이었다. 못 본 사이 식사고 잠이고 전부 걸렀는지,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했다. 그 상태로 정장만 빼어 입은 모습을 보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 괜찮은 거예요?”

“어어… 네. 뭐, 오늘만 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죠.”

하하, 하. 스타카토로 끊기는 웃음소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출품작은 어떻게 됐어요?”

“제 약품을 보는 사람은 많은데 아직까진 조용해요. 이번 졸업생들이 다 쟁쟁하거든요.”

“걱정 마요. 바인하르 교수님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분명 진의 실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왠지 초조해져서….”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이자 진은 한숨을 시원하게 내쉬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는지, 진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세잔 경이 몇 번째인지 알아요?”

“학년 별로 이어지니까 앞 순서 일 걸…요.”

순서를 모르는 나 대신 아이리스가 어설픈 존댓말로 응대했다.

그 후 머리가 새하얗게 질린 학장의 인사말로 마법 학술대회가 시작되었다. 아이리스의 설명대로 척 봐도 앳된 학생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이라면 모든 게 신기한 나와 진은 울타리에 바싹 기대어 구경했다. 앞선 순서들은 신입생이 대부분이었기에 비슷한 마법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시험장 반대편에 있는 천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에 둘, 주변을 둘러싼 인원까지 총 다섯의 호위가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발처럼 내려온 얇은 베일 너머로 어렴풋이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범상치 않은 사람은 분명했기에 손가락질 대신 슬그머니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 천막은 뭐예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는 곳이지.”

“예? 언제 오셨어요?!”

“어. 네가 오기 바로 직전에 친히 납셨어.”

어쩐지…. 시험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황금 자리에 왜 사람이 없나 했다. 신분을 드러내선 안 되는 안겔루스 대학에서도 ‘황태자’는 예외인 모양이다. 괴리감이 느껴지는 천막을 애써 쳐다보지 않는 관중들은 하나같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나라님이랑 마주쳤다가 어떤 꼴을 볼지 모르니까 조심하자고.”

아이리스의 말에 나 또한 시선을 거두었다. 설마 아스레인이 맞이한다던 중요한 손님이…. 다시금 천막을 흘겨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하지 못한 천막 안만 하염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 시험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이 말했다.

“어, 세잔 경이에요!”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정복을 갖춰 입은 세잔이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와 딱 벌어진 어깨는 마법학과보단 무술학과에 잘 어울리는 체형이었다. 게다가 그의 허리춤엔 마법학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을 본 관중들은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검이야?”

지루하게 학술 대회를 지켜보던 아이리스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세잔은 보란 듯이 양날 검을 차고 나왔다. 기도문이 적힌 책을 들고 나온 여느 학생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세잔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탓인지, 시험장 중간에 멈춰선 세잔에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세잔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양날 검을 뽑아 가슴께까지 올렸다. 그러곤 검에 마력을 부여하듯 기도문을 읊으며 검신을 천천히 훑었다.

그때였다. 다부진 손을 따라 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웅- 마력에 공명하는 진동 소리가 동굴 속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상황은 끝났다. 단숨에 바위 앞으로 도약한 세잔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그러자 단단한 바위가 깔끔하게 두 동강 났다.

“오오오…!”

바위 조각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자칫 마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흠 잡힐 수 있는 부분을 자신 있는 검술로 채웠다. 세잔이기에. 아니, 이 대학에서 오직 세잔만이 도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검술에 능한 어머니와 마법이 출중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을 엮어 더욱 의미 있는 퍼포먼스였다.

“역시 세잔 경이네요.”

“내 저럴 줄 알았어. 우리한테 좋은 생각 안 난다고 엄살 부릴 때부터 이미 저 방법을 구상 중이었을걸?”

“하하…. 조용한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죠.”

아이리스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학생이 마법을 준비하는 사이, 세잔이 관중석을 빙 둘러서 다가왔다. 시연이 끝나서 그런지 시험장에서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수고했어요. 세잔 경. 정말 상상도 못한 방법이었어요.”

“전 그저 제국 기사단을 보고 따라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능력이 돼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두 눈에 선망을 가득 담아 빛내자 세잔은 쑥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뒤이어 진과 아이리스도 칭찬 대열에 합류했다.

“정말이라니까요. 다들 반응도 좋았어요.”

“잘하면 황태자 전하를 알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곧 졸업생들의 실력을 보면 놀라실 겁니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칭찬에 세잔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던 와중, 군중 사이에서 웬 청년이 나타나 세잔에게 귓속말을 했다. 놀라지 않고 말을 전해들은 세잔은 이내 미안한 듯 눈썹 끝을 살짝 내렸다.

“부모님께서 절 보자고 하시는군요.”

“아, 그래요. 어서 가 봐요.”

그렇게 세잔이 떠나간 후, 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도 다시 가야겠어요. 혹시 제 출품작에 관심 있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네요. 곁에 있는 편이 좋죠.”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리스가 대뜸 내게 물었다.

“나도 잠깐 갈 데가 있는데, 넌 여기 혼자 있을 거냐?”

“아뇨. 아스레인 교수님을 만나야하는데 어디 계신지 모르겠어요.”

다시 천막 주변을 살폈으나 여전히 아스레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자 진이 양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교수님이라면 아까 뒤뜰로 가시던데요?”

“뒤뜰…이요?”

“네. 혼자 가시더라고요.”

분명 학장은 아스레인이 맞이할 손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정문으로 간 줄 알았는데, 뒤뜰이라니…. 마치 밀회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생각에 잠겨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사이 진과 아이리스가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심심하다고 울지 말고.”

“뭘 울어요. 또 시간이 되면 만나요.”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도 걸음을 옮겼다. 뒤뜰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뒤뜰은 정원에 비해 볼 것도 없고, 전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스레인은 다른 곳도 아닌 하필 뒤뜰로 향했을까.

의문을 품고 목적지에 다다른 그때였다. 뒤뜰과 본관 건물 사이로 난 작은 숲에 웬 장정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험악해서 저절로 긴장감이 서렸다. 바스락, 낙엽을 밟으며 소리 내어 다가가자 길게 찢어진 눈이 나를 향했다.

수상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칼을 들이댈 것 같았다. 곧바로 고개를 까딱이며 정체를 밝혔다.

“…안녕하세요. 전 이 학교 학생인데, 뒤뜰에 볼일이 있어서요.”

다행히 그들은 칼을 뽑진 않았다. 하지만 단호하게 내 앞길을 막았다.

“이 앞으로 못 갑니다.”

“…네?”

“더는 못 들어가니 이만 돌아가 주십쇼.”

이유를 되물어도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무슨 일 있어요?”

“당신께서 어떤 대단한 집안의 자제분이어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와 팔에 두른 갑주, 그리고 허리춤에 찬 검. 먼발치에서 밖에 보지 못했지만 분명하다. 아까 천막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과 같은 차림새다. 뒤늦게 검 손잡이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을 발견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실례했습니다.”

뒤뜰에 황태자가 있다.

엮여 봤자 나만 위험해지기에 군말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등에 따라붙던 기사들의 시선까지 전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했다. 그대로 돌아가면 될 것을, 나도 모르게 나무 뒤에 숨어 대화를 엿들었다.

“요즘 도통 얼굴을 비추질 않는군요. 예전엔 자주 찾아오더니.”

어릴 적 사고로 동생을 잃어 계승권을 독차지한 황태자, 에브게니아 데우 칼리온이 같은 공간에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정확한 발음 덕분에 듣기 좋게 들렸다. 그 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태자궁에 자주 드나드니 괜한 소문이 도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을 터인데….”

역시 아스레인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무려 황태자가 말을 높였다. 황제 말고 두려울 것 없는 황태자가 공작도 아닌 백작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드문 일이었다. 과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아스레인 가문을 향한 예우일까. 단순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요즘 몸 상태는 어때요? 전과 같은 증세를 보이진 않나요?”

“딱히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아벨은 늘 제 몸을 사리질 않으니 못 믿겠어요.”

아벨…이라. 아스레인의 이름인 디아벨에서 따온 애칭인가. 물론 아스레인이 황실과 친분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사석에서 대하는 태도를 보니 상상 이상으로 친한 것 같았다. 황태자가 아스레인을 안겔루스 대학 교수직에 추천한 이유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저보다 폐하를 걱정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여전히 얼굴조차 안 보려고 하세요. 매일 응대하는 의원이 종종 상태를 전해 주는 게 다죠.”

매일 응대하는 의원. 그리고 공석뿐만 아니라 아들인 황태자에게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황제. 역시 황제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황태자는 연신 친근한 말투로 아스레인을 대했다.

“그래도 아벨이 조언해 준 덕분에 조금씩 정사에 개입하기 편해졌어요.”

“슬슬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글쎄요. 최대한 미루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요.”

서서히 목소리가 가까워져서 이만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였다. 하지만 방향 때문에 원치 않게 황태자와 아스레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스레인과 키를 견주는 황태자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똑똑히 보았다.

“당신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칼리온 전하.”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이 황태자를 향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에겐 늘 차가웠던 아스레인이 나에게만큼은 웃는 얼굴을 허락했다. 그래서 잠시 착각했었다.

“아벨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네요.”

나만이 아스레인이 쳐 놓은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았다. 저 높은 나무 위에 포도는 겨우 바닥을 기어 다니는 여우의 것이 아닌데….

“아, 맞아. 아벨이야말로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요.”

자만했다. 저 웃는 얼굴은 나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나만이 그를 웃게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쯤은 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스레인이 나를 데려다준 그날 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마음을 전해도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벨이니 힘닿는 데까지 도울게요.”

“영광입니다.”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늘 아스레인과 같은 장소에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저분은 전쟁 공을 세운 백작이다. 황태자에게 애칭을 들을 정도로 친한, 그러니 감히 내가 넘볼 수 없는 사람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주제를 알아야지.”

확실히 깨달았다. 아스레인이 내게 얼마나 멀고 먼 존재인지.

그리고 ‘제자’라는 신분으로나마 곁에 남고 싶다면, 최후의 선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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