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댕, 대앵- 학술 대회 시작을 알리듯 본관 앞 시계탑 종이 울렸다. 이윽고 건물마다 독수리가 수 놓인 깃발을 하늘 높이 올려 왕립 대학의 위용을 떨쳤다.
벌써부터 인파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구석진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갔다. 그런데 벤치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누운 모습이 꼭 흘러내린 치즈 같았다. 웬 취객인가 싶어 슬그머니 얼굴을 확인했다가 익숙한 보라색 머리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뭐야. 아이리스?”
“어, 왔냐.”
아이리스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 허공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느리게 끔뻑이는 눈은 며칠 야근한 직장인처럼 피곤이 잔뜩 묻어 나왔다. 곤죽이 된 그의 옆에 앉아서 걱정스레 물었다.
“밤새웠어요?”
“어제 보고서 제출하고 나니 잠이 안 오더라고.”
늘어지게 하품하던 아이리스는 반쯤 감긴 눈으로 인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 꼴을 보는데 안 피곤하겠냐.”
“아는 분들이에요? 교수님…이라기엔 한 번도 못 본 얼굴들인데.”
“전부 잘난 분들이지. 직접 후견할 학생을 찾는 귀족도 있고, 제 연구를 도울 인재를 찾는 학자도 있고.”
“…귀족이라고요?”
아이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내가 본 귀족과 달리 저들의 옷차림은 너무도 평범했다. 갈색 모직 조끼에 셔츠차림이나 레이스가 한 단밖에 없는 드레스는 마을 길거리에서나 볼 법했다.
연신 정체를 의심하니 아이리스가 선뜻 설명을 이었다.
“예전부터 고수하던 학술 대회 출입 조건이거든.”
“출입 조건이 있어요?”
아이리스는 손가락을 검지부터 하나씩 치켜들며 말했다.
“신분이 드러나는 옷은 입지 마라. 과한 장신구를 삼가라. 오직 지식과 능력을 추구할 자만을 환영한다.”
참으로 안겔루스 대학다운 규칙이었다. 설마 귀족에게, 심지어 학생도 아닌 외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줄은 몰랐지만. 헛웃음을 흘리니 아이리스가 내 어깨에 팔을 척하고 걸치며 말했다.
“진짜 웃긴 작자들이야. 저래놓고 뭐 대단한 걸 감내한 듯 얘기한다니까.”
“하하….”
“서민 체험도 아니고 뭐냐? 꼴사납게.”
“그래도 다 비슷하게 입고 있으니 정말 누가 귀족이고 누가 평민인진 모르겠네요.”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던 아이리스는 내 말에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래.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줄곧 옷차림으로 사람을 구별해 왔으니까.”
비죽 올라간 입꼬리에선 사뭇 씁쓸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 후 아이리스는 여러 신분이 뒤섞인 광장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침묵을 못 견디겠는지, 작게 혀를 차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훈련은 잘됐냐?”
“아이리스 덕분에 훨씬 나아졌어요. 나중에 식사라도….”
“됐어. 내가 돼지 새끼도 아니고 왜 자꾸 먹여?”
“딱히 어떤 보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요.”
멋쩍게 어깨를 으쓱이자 아이리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이 가까운 건 둘째 치고,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 연신 흘끔거렸다. 입 모양으로 ‘왜요?’ 하고 묻자 아이리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너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나.”
“할머니요?”
“어. 자작님 저택에서 살 때, 나한테 삼시 세 끼를 먹이지 못해 안달 난 하녀가 있었거든. 자길 친할머니처럼 생각해 달라나 뭐래나. 그래서 할망구라고 불러 줬지.”
무연고인 아이리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걸까. 까칠한 그가 친근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소중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하녀에 관해 물어보았다.
“아이리스한테 가족 같은 분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지금도 저택에서 일하세요?”
“아니, 작년에 죽었어.”
환하게 웃은 얼굴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무척 덤덤했다. 차분한 반응에 오히려 죄책감은 배가 되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신경했어요.”
“뭘 또 그러냐? 내가 꺼낸 얘긴데.”
“그래도요. …병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병사(病死)라고는 하더라. 그런데 난 안 믿었어. 그 할망구, 엄청 정정했거든.”
“예?”
정정하던 사람이 아무런 증상도 없이 병으로 사망하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곁에서 지켜본 아이리스라면, 그 이상함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입술만 깨물던 아이리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러다 반년 뒤 하녀들끼리 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어.”
“무슨….”
“저택을 청소하던 할망구가 봐선 안 될 걸 봤대. 그래서 죽은 거래.”
초점을 잃은 회색 눈동자엔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모든 걸 체념한 이의 눈빛이었다. 늘 불같던 아이리스가 축 처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어깨에 올라간 손을 토닥이자 아이리스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너 원래 아무한테나 이러냐?”
“…네?”
“됐다. 아무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애초에 알려고도 안 했어.”
팔을 거둔 아이리스는 곧장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때마침 시계탑에 있는 종이 크게 울려 퍼졌다. 시간을 확인한 아이리스는 고갯짓으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다. 시험 준비 도와줘야 돼.”
“그럼 이따가 세잔 경 마법 시험 때 봐요.”
“그래.”
손을 휘적거리며 가던 아이리스가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뭔가를 잊은 듯 아, 하고 탄식하더니 다시 벤치 앞으로 걸어와 나직하게 속삭였다.
“할망구 얘기 심심해서 한 거 아니야. 그 사람은 마법도, 검술도 못하지만…. 이상하게 무시할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아이리스는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건강하던 시녀가 갑자기 죽은 것도 모자라, 그 이유가 저택 안에서 무언가를 목격했기 때문이라니. 클라우스 자작을 향한 의심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깊은 생각에 잠겨 벤치에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정원까지 인파가 몰렸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물학과 전시관으로 향했다. 건물 앞에서 우연찮게 아스레인을 봤지만, 학장과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 차마 다가가진 못했다.
홀로 계단을 올라가 제1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에 보면대가 주르륵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저자의 이름이 적힌 논문과 보고서가 줄지어있었다. 조용히 논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가니 끄트머리에 내 이름이 적힌 보고서가 있었다.
누군가 읽은 흔적이 있어 괜스레 흐뭇해하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직접 쓴 논문인가?”
“예? 아, 네. 보고서에 가깝지만요.”
“아까 봤거든. 제법 잘 썼던데.”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하며 이름 모를 남자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가지런히 가르마를 타고 넘긴 머리카락은 호두나무처럼 짙은 초콜릿색이었고, 작은 동공은 그보다 엷은 색을 띠었다. 어쩐지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삼백안은 부드러운 미소로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언제나 맞아 들었다.
“네가 그 까다로운 아스레인 교수님의 제자라지.”
“…저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비릿한 미소를 지은 남자는 한 손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일전에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 하나가 네게 실례를 범하지 않았나.”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 남자는 그토록 만나고 싶던 클라우스 자작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라우스 자작님.”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슬그머니 눈을 돌려 1층을 내려다보았다. 아스레인은 여전히 학장과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젠장. 최악의 타이밍에 하필이면 클라우스가 나타났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 낫겠다. 전시관에는 나와 클라우스 말고도 다른 관람객이 있으니 허튼수작은 부릴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차하면 제압할 수도 있다.
인사를 끝내고도 아무 말 안 하니 클라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꽤 시간이 흐르긴 했다만, 일전의 일은 대신 사과하마. 난 단지 너와 친하게 지내라 명했을 뿐이다. 그런데 워낙 욕심이 많은 아이라… 질투심에 눈이 멀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
클라우스는 선뜻 사과했지만, 이마저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별일이… 아니었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제게 사과했습니다. 게다가 자작님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제게 함구하길 부탁했습니다. 모시는 분을 최우선하는 마음을 알기에 저도 ‘별일’ 아니라 칭했을 뿐입니다.”
아이리스와 있었던 일을 술술 내뱉으니 클라우스가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설마 내가 아이리스를 흉볼 줄 알았던 건가. 물론 단기간에 환심을 사기엔 가장 편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내 이미지를 직접 깎아내리는 멍청한 일이었다. 함부로 남을 폄하하지 않아 신중한 이미지를 사는 게 우선이다.
“아이리스가 자작님을 귀인으로 모시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리 납시어서 평민인 제게 친히 사과까지 해 주시니… 벌써 그 이유를 알 것 같군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순순히 시선을 내리깔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듣던 대로 성격이 모난 곳 없이 유하구나.”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면, 단순히 멍청한 것인지.”
클라우스는 혼잣말을 일부러 들으라는 듯 툭 던졌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공격적으로 나와도 내 입가의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멍청하게 봐주는 그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클라우스가 나를 만만하게 볼수록 파고들기 편해지니까.
“논문은 찬찬히 둘러보셨습니까.”
“음. 기대를 하고 왔건만, 다 비슷비슷하여…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어.”
“배움의 정도가 비슷하여 미처 자작님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었나 봅니다.”
“너라도 알아 다행이군. 다들 마물과의 공생을 논하지만, 정작 실현 가능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아. 이상적인 말은 누군들 못하겠나.”
실현 가능성이라…. 근래 비슷한 생각을 했기에 응수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저 또한 그렇게 느낍니다. 최근 연구를 다니며 마물과의 공생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그리 이상적이지 돌아가진 않으니까요.”
“호오. 그런데 어찌 그런 고리타분한 글을 썼나.”
“부정적인 의견을 글에 녹였다간 배척당할까 두려웠습니다.”
자신 없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흘렸다. 누군가 들을까 봐 괜히 주변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불안해 보이도록 온갖 신경을 쓰면서도 속으론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제 주제에 튀는 것보단 녹아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미끼를 물어라. 고작 미꾸라지인 걸 알면서도 기꺼이 낚아채 줄 테니.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슬쩍 눈치를 살피자 클라우스는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기죽지 말게. 새로운 주장은 늘 배척당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옳은 쪽이니까.”
“빈약한 추측입니다만… 자작님께선 저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 때는 내가 마물과 인간이 공생할 방법을 찾아냈을 때였지.”
“…찾아내셨다니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클라우스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범죄자들을 사형시키면서 예방이 되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한 적 있지 않나?”
“예?”
“마물도 똑같네. 위험인자를 미리 제거하면 충돌할 일이 줄어들 테지.”
“…인간에게 호의적인 마물만 남겨 두잔 말씀이시군요.”
클라우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멍청했다. 벌써부터 귀를 씻어 내고 싶었지만, 아직 캐낼 것이 한참 남았으니 참아야만 한다.
대단한 이론을 접한 사람처럼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걸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그간 연구를 통해 알아낸 방법이 있다만….”
왠지 말하길 망설이는 것 같다. 여기서 어물거리는 순간 다신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간절한 애원과 선망을 담은 시선으로 클라우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작님. 부족한 제게 현자의 가르침을 나눠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아. 참 오랜만에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감언을 뱉었다. 사람에 따라서 아부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클라우스 자작이 어떤 사람인지는 확실했다. 예전 지도 교수와 무서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신이 제일 똑똑한 줄 아는 부분도, 자신 외에 나머지는 전부 틀렸다고 착각하는 부분도.
역시 클라우스 자작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지. 깨우친 자들끼리 유익한 토론을 나누기 위해 내 저택에서 연회가 열리네. 궁금하다면 오도록 하게. 아, 아스레인 교수님을 모셔와도 상관없어.”
“넓은 배려에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의 식견을 넓혀 주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웃기고 있네. 역시 무식한 놈보다 어설프게 아는 놈이 위험하다. 잘못된 사상을 굳게 믿고 있는 클라우스의 눈동자엔 얼핏 광기가 서렸다. 더 캐내려고 했으나, 클라우스는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만 가야겠군. 바빠서 말이네.”
“제가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거 같아 죄송합니다.”
“괜찮네. 나야말로 괜찮은 인재를 찾은 것 같아 기쁘군.”
“영광입니다.”
전시관 앞까지 클라우스를 배웅한 후 본관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입가에 서린 미소는 봄날 눈 녹듯 빠르게 사라졌고, 냉정해진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굴러갔다.
어느새 곁에 나타난 시스템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 제법 낯짝이 두꺼워지셨군요.
“그래? 저런 부류를 상대하는 덴 이미 도가 텄거든.”
- 연회에 가실 겁니까?
“당연히 가야지. 누굴 모아놓고 어떤 헛소리를 하는지 궁금하잖아?”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원체 나를 알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쉽게 연회를 초대받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먼저 아스레인을 데려오라고 당당하게 제안했다. 비밀스러운 집회라면 이렇게 허술하진 않을 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해.”
- 예상 가는 게 있습니까?
“아니, 아직은.”
짧은 대화를 회상하니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위험인자를 미리 제거한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게다가 아스레인을 두고 식견이 부족하다고 하는 망언까지. 싸늘하게 식은 손을 주먹 쥐며 자만심에 가득 찬 클라우스를 향해 조소를 흘렸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제 주제를 알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