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 (76/305)

#76

새하얀 수선화로 둘러싸인 호숫가를 지나가는 내내 작은 창밖에는 한 폭의 유화가 펼쳐졌다. 호수 한가운데는 오리가 떠다녔고, 자그마한 발짓을 따라 짙푸른 호수에 비친 노란 불빛이 일렁거렸다. 마치 염료를 실어 나르는 나그네가 금빛 가루를 담은 보따리가 터진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냇물을 건넌 흔적 같았다.

달칵, 달칵. 말발굽 소리에 맞춰 마을의 빛을 옮기는 랜턴이 흔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마을에서 여러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거나하게 취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술집 앞에서 호탕하게 웃는 소리까지. 평소라면 시끄럽다 느낄 소음에마저 낭만을 느끼니- 이것이야말로 꽤 오랜만에 찾아온 평안이었다.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몬테나 산에서 안겔루스 대학까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차 언덕길에 접어든 마차는 무사히 안겔루스 대학 앞에 도착했다. 내일이 학술대회라 그런지, 생화와 장식 천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학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는 별말 없이 인사만 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정문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곁에 나타나 나란히 걷던 시스템이 말했다.

- 조용하군요.

“그러게. …내일이면 여기에 사람이 꽉 차겠지?”

- 그러니 이제 그만 기숙사로 돌아가시죠.

“아니. 아직 기숙사로 안 갈 거야.”

- 예?

“연구실에 들러서 그간 못한 청소를 해야 하거든.”

- 아스레인 교수가 시켰습니까?

“응? 설마. 그분은 나한테 그런 일 안 시켜.”

그러니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거지. 일할 생각에 생글 웃으니 시스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흘겨보곤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연구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오랫동안 출근하지 않았으니 도착하자마자 청소부터 해야겠다. 설마 해가 다 저문 지금까지 아스레인이 연구실에 남아 있진 않겠지. 시야에 건물이 보이자마자 문틈과 창문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연구실 안은 불빛 없이 어두웠다.

조금 이상한 점은 연구실 문이 열려 있단 사실이었다. 원래 퇴근하면서 잠그고 열쇠를 맡기는 게 규칙이다. 아스레인이 사소한 걸 잊을 리는 없고, 내가 연구실로 돌아올 줄 알았던 건가.

“실례합니다….”

의아함을 뒤로하고 조용히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상 촛대에 꽂혀 있는 양초에 불을 붙이자 눈앞이 점차 선명해졌다. 은은한 불빛이 내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비쳤다. 학술대회 기간에도 어김없이 아스레인을 찾는 서신은 한가득했다.

탁탁, 크기가 제각각인 종이를 일렬로 맞춰 정리하던 그때였다. 문득 시야 끄트머리에 웬 실루엣이 들어왔다. 순간 소름이 끼쳐 서류를 움켜쥔 채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돌아볼까? 그러다 귀신이랑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아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짧은 사이 속으로 수십 번을 고민하다가 겨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미처 불빛이 닿지 못한 곳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무서운 느낌은 없어 정리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책상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헉…!”

귀신이라 착각한 실루엣은 다름 아닌 아스레인이었다. 그는 고이 눈을 감은 채로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논문을 평가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촛대를 아스레인의 책상 위에 올려 놓자 일렁이는 불빛에 고아한 얼굴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혹여 잠을 깨울까 봐 숨을 죽이자 방 안은 진공 상태에 빠진 것처럼 고요해졌다. 그대로 아스레인이 자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 죽은 듯 자는 사람이다. 얼마나 조용하면 숨소리까지도 안 들릴 지경이었다.

“…어?”

잠깐만. 아무리 잠꼬대가 없다지만 숨은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아스레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창백한 그림자가 얼굴을 삼켜서 그런지, 왠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불안이 엄습했다.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정말 호흡이 없었다. 게다가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기는커녕 움직이지도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코 아래 검지를 가져다 대는 그 순간이었다.

아스레인이 눈을 번쩍 떴다.

“으악!!!”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제자리에서 튀어 올라 책상을 붙잡았다.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허, 하고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스레인은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콩벌레처럼 잔뜩 움츠러든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내가 튀어나와 놀랐을 만도 한데, 그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교수님! 놀랐잖아요.”

책상 위에 엎드리다시피 한 몸을 일으키며 뒤늦게 눈치를 살폈다.

“…혹시 제가 깨웠어요?”

멋쩍은 웃음을 지으니 아스레인은 퍽 덤덤하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안 자고 있었네만.”

“아~ 그냥 눈만 감고 계셨…. 아니, 잠깐만요. 제가 들어온 걸 아셨어요?”

“그래.”

“그럼 왜 아는 척 안 하셨어요?!”

“내가 잘 때 자네가 무얼 하는지 궁금했거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잘 때 뭘 하는지 궁금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이유로는 들리지 않았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반응을 넌지시 떠보았다.

“마치 제가 뭔가 하길 바란 것처럼 들리는데요…?”

“설마. 단지 시선은 제법 따가웠네.”

“그, 그건 잘 주무시나 걱정돼서 쳐다본 것뿐이에요.”

“자는 모습까지 지켜봐 주니 좋은 제자를 뒀군.”

“그런 게 아니라요!”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엔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녹아 있었다. 물론 자는 얼굴을 마음껏 구경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진정 아스레인을 뚫어져라 쳐다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교수님께서 숨을… 안 쉬는 것 같았어요. 호흡이 없었거든요.”

수면 중 무호흡이라면, 건강에 이상 신호가 있다는 뜻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레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지금껏 몰랐던 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써 숨기려던 비밀을 ‘들켰다’는 쪽에 가까웠다. 익숙하게 표정을 숨긴 아스레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자주 그러세요?”

“가벼운 습관이니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네.”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맙군.”

아스레인은 의례적인 인사말로 대화를 마쳤다.

여기까지다. 나와 그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한 걸음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간 많이 가까워졌다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미 해가 졌는데 왜 아직까지 여기 계신 거예요?”

“흠. 논문을 읽다 보니 시간이 이리 흘렀는지 몰랐네.”

“혹시 제가 연구실에 출근하지 않는 동안 계속 이러셨어요?”

줄곧 나를 바라보던 눈길이 슬쩍 내게서 떨어졌다. 아니, 이 사람 일주일 내내 밤샌 거 아냐? 굳이 아스레인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 서서 인상을 팍 찡그리고 불렀다.

“교수님!”

“자네가 내게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

“네? 저요?”

“아이리스한테 전부 들었네. 잠 잘 때만 빼고 마법학과 실습실에서 살다시피 지냈다고. 식사도 꼬박꼬박 걸렀다지.”

“그건….”

“할 말 있나?”

순식간에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 당당한 기세가 꺾여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변명했다.

“아그누스를 다루는 훈련을 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짧은 휴가 기간 안에 달성하기엔 다소 무리인 목표였다. 물론 아직도 아그누스를 능숙하게 다루기는 멀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본질을 완성해 냈으니 다행이었다.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는 내내 아스레인은 말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흘끔 쳐다보았다가 가늘게 뜬 눈과 마주쳤다.

“흐음, 확실히 마력의 흐름이 좋아지긴 했군.”

“그렇죠?”

“어째 마물의 냄새가 짙어지긴 했다만.”

“아…. 아그누스 때문인가 봐요. 하하, 너무 끌어안고 있었나?”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육감이다. 차마 마물과 본질이 뒤섞였기 때문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딱딱 끊기는 웃음을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무뚝뚝한 입매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젠 내 도움 없이도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구나.”

“에이, 전 아직 멀었어요. 저만치 계신 교수님을 조금이나마 따라가려면 노력해야죠.”

나란히 서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평생 그의 옷자락이나마 붙잡을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스레인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자넨 금방 나를 앞설 걸세.”

“예? 제가 어떻게….”

“난 그저 한 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니.”

또 그 얼굴이다. 의미심장한 말이, 체념한 눈동자가 나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앞으로 유인한다. 하지만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려 하면 가차 없이 뚜껑을 닫아 버린다.

“시간이 너무 늦었군.”

바로 지금처럼. 그럼 나는 또다시 황량한 우물 앞에 기대어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무거운 뚜껑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얌전히 제자리를 지킨다. 그럼 언젠가 열어 주겠지, 하면서도 틈새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생겨난다. 열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억지로 열었다간 다신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릴까 참는 것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입는 아스레인을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 시선을 느꼈을 텐데, 아스레인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능숙하게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학술 대회 내내 정신없을 테니 오늘은 그만 기숙사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교수님은요?”

“교수회관에서 쉴 테니 걱정 말게.”

아무튼 쉰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안도했다. 촛불을 끄고 아스레인과 함께 연구실을 나왔다. 문을 잠글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다가 공손히 인사했다.

“그럼 내일 봬요.”

그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뒤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힐끔 돌아보니 어느새 넓은 보폭으로 나를 바짝 쫓아오던 아스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왜 따라오지? 교수 회관이 기숙사 근처에 있나? 아무리 구조를 생각해도 기숙사 근처엔 그럴싸한 건물이 없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걸음 걸어가다가 멈췄다. 그러자 아스레인도 나를 따라 걸어가다가 제자리에 섰다. 뭐야. 이건. 설마… 나를 데려다주는 건가? 현실 따위 잊은 행복 회로는 오늘도 열심히 돌아갔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굳이 아스레인에게 에둘러 물었다.

“교수회관이 기숙사랑 같은… 방향인가 봐요?”

그를 향한 눈동자에 부디 기대감이 서려 있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듯 아스레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나?”

“네, 한 번도 안 가 봤어요.”

이내 아, 하고 짧게 탄식이 돌아왔다. 그 반응 덕분에 알아챘다. 그냥 같은 방향이었구나. 매번 홈런을 치는 나쁜 예감과 달리 행복 회로는 늘 헛스윙이었다. 입꼬리를 씰룩이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다시 기숙사로 향하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해졌다. 결국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열기가 홧홧하게 올랐다. 어두운 밤에 하필이면 기숙사로 향하는 길목만은 불빛으로 환했다. 혹시나 아스레인에게 들킬까 봐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연신 그의 시야로부터 벗어나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뒤따라오는 아스레인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대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태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아스레인이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차, 방심한 사이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달아오른 얼굴을 그대로 보여 버렸다. 대체 무슨 착각을 했냐며 비웃음을 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웃음기 없이 진중하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교수회관은 도서관 너머에 있네.”

“예? 그게 무슨….”

친절한 설명은 조금 뜬금없게 느껴졌다. 영문을 몰라 인상을 찌푸리자 아스레인이 가볍게 웃었다. 왜 웃는지 모르면서도, 그저 내게 닿는 시선이 하도 다정하여 속절없이 마음이 쓸려 나갔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은은하게 그를 비추었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처럼.

이윽고 그의 손이 내 귀걸이에 닿았다. 목과 어깨에 스치듯 닿은 손길이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에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도리어 잔뜩 예민해진 목덜미를 손등으로 쓸었다. 아련히 풍겨 오는 짙은 창포의 향기와 잉크의 내음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잘 자게.”

그대로 아스레인은 떠나갔다. 열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한여름 밤의 꿈만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누구라도 보면 낭패였기에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문득 3층 계단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첨탑이 본관 뒤로 삐죽하게 올라와 있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저런 건축물은 학교 내에 도서관뿐이었다.

그래. 도서관뿐이다. …기숙사와 정반대에 있는 도서관.

“…아?”

뒤늦게 그의 말이 떠올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교수회관은 도서관 너머에 있네.’

그냥 위치를 알려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속뜻을 알아챈 지금도 어째서 아스레인이 먼 길을 돌아 나를 데려다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한 호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거리를 데려다주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문제였다.

“…이러면 기대하게 되잖아요….”

여전히 손길이 느껴지는 목덜미를 감싸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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