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그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비록 시스템의 존재는 아직 낯설지만, 확실히 그가 나타난 후로 마력의 흐름이 수월해졌다.
긍정적인 변화는 아그누스 소환을 거듭할수록 뼈저리게 체감되었다.
“확실히 좋아진 것 같은데.”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자 옆에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들렸다.
- 뭐가 좋아졌단 건가요?
“전보단 확실히 괜찮아졌잖아.”
- 그래서 당신의 마력이 마르지 않는 샘물인 줄 아십니까? 바닥이 없는 그릇에서 고작 피클이나 담는 작은 접시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소환하면 조만간 당신의 단축 번호 2번을 누르게 되는 일이 벌어질 테죠.
“앞으로 연습할게. 한다고….”
역시 가만히 있을 시스템이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조목조목 따져 오니 파고들 틈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력을 채우기 위해 아그누스를 돌려보내고 실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숨을 푹 하고 내쉬니 내심 마음이 쓰였는지, 시스템이 곁으로 다가왔다.
- 그래도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죠.
“그러면서 또 날 혼내려는 거지.”
- 저를 대체 뭐로 보시는 겁니까.
눈살을 살짝 찌푸린 시스템은 이내 표정을 풀고 말했다.
- 앞으로 마물의 의지에 따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뭐?”
- 단, 관계 평가가 친밀에 이르기 전엔 마물은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저절로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시스템이 나지막이 웃었다.
- 어떠십니까.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주인공’의 능력입니다.
시스템은 내 반응을 떠보려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곧바로 환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추를 단 것처럼 뚝 떨어졌다. 물론 이 세계에 막 왔을 때라면 마냥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새로운 능력에 뒤따른 감정은 설렘도 아닌 불안이었다.
- 썩 기뻐 보이지 않는군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아이리스가 가진 능력을 보고 왜 저주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저건 축복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조금은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가 그 능력으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능력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주인공 아이리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마물과 인간을 중재하고자 나선 이유는 비단 희생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물의 목소리가 들리면 교감하기 편하긴 하겠지. 하지만 남들은 못 듣는, 듣지 않아도 되는 처절한 호소까지 들리는 거잖아.”
도와 달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게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약자라면, 심지어 다른 사람에겐 목소리가 닿지 않을 어린 동물이라면?
아마 지금은 칼 같이 쳐 낼 수 있다는 사람도 막상 그 상황이 오면 돕고 말 것이다. 그건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영웅의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순간적인 본능이다. 그러니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손해를 수반하지 않는 거래는 없다고.
가슴에 가지런히 손을 올린 시스템은 살짝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 인간과 마물의 새로운 중재자가 태어났으니, 이제 이 이야기는 당신의 것. 끝내 인간이 남을지, 마물이 지배할지…. 혹은 당신의 이상대로 공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주인공인 된 당신의 선택이 결말을 만들 겁니다.
가늘게 뜬 눈매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유독 빛났다.
오로지 내 선택이 결말을 만든다. 그 말을 들으니 어릴 적 바둑을 배울 때 아버지께서 신신당부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매 수를 신중하게 둬야 한다.’
네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판 위에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흑과 백의 점이 손을 떠난 순간부터 결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늘 바둑알을 든 나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어설픈 한 수가 묘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단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 나는 지금 이름도 모르는 상대와 바둑을 두고 있다. 주변에서 훈수를 두는 이는 많지만, 결국 다음 수를 정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손끝이다. 그러니 한 수 한 수 최선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설령 이미 판국이 기울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바야흐로 새로운 수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이 패착이 되지 않으려면 이 판의 첫수부터 복기할 필요가 있다. 나의 처음은 안겔루스 대학도, 아멜리 백작가도 아닌 오지 한가운데였다.
당시엔 이름도 없는 빈털터리로 이 세계에 떨어져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마물을 연구하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간절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때보다 더 나은 환경에 살고 있으면서도, 너무도 많은 걱정에 짓눌려 간절한 마음은 빛바랜 종이가 되어 버렸다.
다시 그곳에 간다면, 처음에 가졌던 그 순수한 열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묘수가 떠오를 지도 모른다.
학술대회 준비가 시작되면서 아스레인이 내게 준 휴가도 슬슬 끝나갔다. 휴가 마지막 날 몬테나 산으로 향하기 전, 잠시 연구실에 들렀다. 여전히 아스레인의 책상은 논문과 보고서로 가득했다. 한창 바쁜 그가 혹여 나를 찾을까 짧은 쪽지를 남겨두었다.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마차에 올랐다.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간 마차는 오랜 시간을 달려 산 초입에서 멈췄다. 발판을 딛고 내려와 마부에게 몇 닢을 쥐여 주며 말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곁을 지켰다. 그를 뒤로하고 인적이 드문 산길로 들어서니 서서히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멀어졌다. 산 중턱 즈음 오르자 마물이 출몰한다는 경고판이 보였다. 살벌한 글씨를 보고도 위기감을 느끼긴커녕 수더분한 미소만 흘렸다.
“얼마 만이지….”
드디어 돌아왔다. 나의 시작 지점, 몬테나 산으로.
추운 겨울이 다가와 조금은 삭막해졌지만, 따스한 햇볕이 스며드는 풍경만큼은 여전했다. 약초사들이 내놓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저 멀리 나무 사이로 익숙한 들판이 보였다.
바로 여기다. 사고를 당한 후 처음으로 이곳에서 눈을 떴다. 물론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낯선 환경에서 험악한 기사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불안감에 심장이 떨렸었다. 그럼에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까.
당시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 서서 멍하니 들판을 바라보니 시스템이 말을 걸었다.
- 꽤 오랜만이군요.
“시스템도 몬테나 산을 기억해?”
- 당연합니다. 그땐 지켜보는 입장이었습니다만, 그대로 끝나는 줄로만 알았죠.
“그랬어? 난 꿈인 줄 알았는데.”
우악스러운 손이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릴 때까지도 설마 소설 속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러던 와중 신비한 존재를 만났다. 찻길에서 사고 나기 전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접한 마물이자, 이 세계로 들어오자마자 처음 마주친 마물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 역시 오파러스를 보러온 거군요.
“응. 나한텐 꽤 의미 있는 마물이거든.”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머리를 든 마물의 형상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줄곧 마물을 보고 싶었던 내게 꿈과 같은 순간이었다. 그래서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오파러스는 기나긴 마라톤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오파러스를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감 내용을 토대로 오파러스와 관련된 온갖 서적을 뒤졌다. 그 덕분에 오래됐지만 유의미한 정보를 알아냈다. 사람이 부는 휘파람 소리가 오파러스의 새끼가 내는 소리와 비슷하단 사실이었다.
“과연 와 줄까? 분명 내가 동류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 텐데.”
- 평범한 인간이 아닌 당신이니 확률은 높습니다.
“…그래?”
- 마물의 일부가 깃든 덕분에 인간인 당신에게서 마물의 냄새가 날 겁니다. 그러니 오파러스 또한 당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겠죠.
시스템의 말을 믿고 당시 오파러스가 서 있던 들판으로 걸어갔다. 나무 사이로 햇볕이 스며드는 곳에 서서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가벼운 소리가 고요한 산속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몇 번을 불어도 숲은 조용했다. 찌르르 울던 풀벌레마저 기척을 느끼고 자취를 감췄다.
“안 되나….”
다시 한 번 숨을 짧게 들이쉰 그때였다. 끼에엑- 저 멀리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오파러스에게 위치를 알리려 재차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하울링에 대답하듯 방금 전보다 훨씬 선명한 소리가 돌아왔다.
퍼드덕. 마물의 괴성에 놀란 산새들이 놀라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온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오파러스가 다가오고 있다. 몸을 숨길 곳 없는 들판에 당당히 서서 오파러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모습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거센 날갯짓이 만들어 낸 바람에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들판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잡초마저 전부 오파러스를 피해 몸을 눕혔다.
“…….”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역시나 눈동자였다. 그의 눈동자엔 넓은 우주가, 여러 색깔이 뒤엉킨 성운이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자 오파러스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경계의 의미였다.
지금 섣불리 다가가면 도망치고 말 것이다. 혹시 냄새를 맡으면 괜찮아질까 싶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을 내민 채로 가만히 있었으나 오파러스는 나를 응시하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보석같이 빛나는 눈엔 다가올 기미도, 공격할 기미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마냥 기다렸다. 손이 저리고 팔이 떨려도 오파러스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
“…어…!”
오파러스가 천천히 머리를 숙여 내 손등에 미간을 가져다 대었다. 툭, 와 닿은 무게감이 어깨까지 전해져 살짝 뒤로 밀려났다. 겨우 환호성을 참고 손을 뒤집어 오파러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푸르르, 성대를 긁는 낮은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안녕. 오파러스.”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인사를 나눴다. 당시엔 그저 멀리서 관찰할 수밖에 없던 마물을 쓰다듬으니 이로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교감을 확인했다는 시스템의 알림도 지금은 뒷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파러스는 다시금 날개를 펴 하늘로 올라갔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걸로 충분했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마물의 모습은 자유롭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마음을 뜨겁게 만든 건 ‘세상을 구해야겠다.’ 같은 대단한 다짐이 아니었다.
단지 저 모습을 오래도록 관찰하고 싶다는 열망뿐이었다. 그것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 이제 오파러스까지 관계 평가에 등록된 마물은 총 여섯 개체군요.
“아직 멀었어. 도감에 있는 마물을 전부 만날 수는 있을까?”
- 그건 오직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시스템의 말에 처음 오파러스를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언제부터 새로운 마물을 만나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을까. 사이누르처럼 고통받는 마물이 있진 않을까, 오필리아처럼 두 종족 간의 갈등에 휘말린 마물이 있진 않을까. 늘 마물을 만나러 갈 때마다 그 걱정에 빠져 살았다.
처음을 떠올려보면, 내 목적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마물을 연구하고 싶다. 그게 전부였다. 인간의 편이나 마물의 편을 가르기 위해 이 세계에 오고 싶다고 빈 게 아니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오파러스가 나는 모습 정말 아름답지 않아?”
- 예?
“그걸 나 혼자 본다면 너무 아쉽겠지.”
나 같은 사람이 분명 또 있을 테니까. 그러니 마물을 오래도록 연구하기 위해, 후세에 기록으로만 남은 개체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앞으로 어떤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내 신념만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안 그래?”
올라올 때와 달리 가벼운 발걸음을 돌리자 시스템이 말했다.
- 먹구름이 한결 걷힌 것 같군요.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다시금 깨달았거든.”
손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과 살아있는 온기를 기억하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간 흐려졌던 목적이 조금이나마 제 빛깔을 찾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시스템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당신의 모험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당신께서 알맞은 때에 올바른 장소에 도착할 수 있도록.
적막이 흐르는 숲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