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74/305)

#74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리는 날, 흘러가는 냇물에 떠오른 한 점의 부유물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 나는 빗물이 만들어 낸 희미한 파동에도 크게 흔들리고 마는, 아주 작고 가벼운 먼지였다. 툭, 투둑. 잔잔한 수면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조그만 불꽃이 튀어 올랐다. 생명의 탄생을 알리듯 숭고하고도 찬란한 빛이었다.

드디어 만물의 숙원인 유토피아를 찾은 것일까.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뒤늦게 진실을 마주했다. 풍족한 바다와 달리 하늘은 가뭄이 든 것처럼 균열이 져 있었다. 갈라진 틈새로 불그스름한 아지랑이가 빠져나와 나를 향해 손짓했다. 기괴한 모양새였으나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새하얀 하늘에 붉은 균열. 우주를 닮은 이곳은 오케아노스의 내부였다.

“…어?”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누군가 벼랑에서 등을 확 민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탓에 한동안 비몽사몽간의 경지에서 헤맸다. 뒤늦게 흐릿한 시야가 돌아와 약 일주일 동안 눌러 붙어살던 실습실이 보였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두 팔을 높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원래 지금쯤이면 관절이란 관절은 전부 살려 달라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이불 없는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훨씬 개운했다.

“이상하다….”

수면 부족으로 지끈거리던 두통도 사라졌고, 물약 때문에 메스껍던 속도 말끔하게 진정되었다. 게다가 틈만 나면 흩어지던 마력도 어쩐지 코어에 단단히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전부 오케아노스 덕분인가. 내 안에서 무슨 변화가 벌어졌는지 직접 확인할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팔짱을 낀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신 팔꿈치를 툭툭 건드렸다.

“오케아노스?”

혹시나 하고 불러 봤지만 실습실은 적막만 흘렀다. 당장 튀어나와 ‘역시 제 말을 듣길 잘하지 않았냐.’며 으스댈 줄 알았는데, 예상이 시원하게 빗나가 버렸다. 오케아노스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나와 볼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늠름한 자태를 가진 늑대가 그림자 위에 꼿꼿이 섰다. 두툼한 발등까지 덮은 털에 지금껏 본 적 없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간 마력 보호 차원에서 고양이나 토끼 등 주로 몸집이 작은 동물 위주로 소환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마력 소모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아그누스를 소환할 때면 몸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마력이 끝도 없이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적당량을 덜어 놓는다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실험해 보았다.

“꿰뚫을 수 있겠어?”

도서관에서 헤카테를 공격했을 때처럼 실습실 한가운데 놓인 바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아그누스는 머리를 8자로 천천히 흔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오직 목표물만 주시하는 눈동자에 서슬 퍼런 안광이 서렸다. 이윽고 아그누스가 도움닫기도 없이 단숨에 바위로 뛰어들었다.

콰광-!! 귀를 찌르는 굉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마치 가스통이 폭발한 것 같은 위력에 놀라 피할 생각도 않고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흩뿌려진 탓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차마 다가갈 생각은 못하고 얌전히 제자리에 서서 연기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보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허.”

단단한 바위 한가운데 깔끔하게 구멍이 뚫려 너머가 훤히 보였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뚫린 부분의 단면적은 상당히 깔끔했다. 헤카테를 공격했을 때보다 훨씬 훌륭한 솜씨였다. 정작 바위 하나를 작살 낸 아그누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곁에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길쭉한 주둥이로 종아리를 툭툭 건드리기에 서둘러 머리를 만져 주며 말했다.

“어어, 최고야. 정말… 잘했어.”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서 바위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물론 마력이 상당히 빠져나간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전처럼 두 발로 서 있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확실한 변화다. 안정된 코어를 체감하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올라 손이 덜덜 떨렸다.

“아그누스. 이건….”

어리둥절한 아그누스를 와락 끌어안은 그때, 난데없이 튀어나온 목소리가 맥을 끊었다.

- 아그누스 공격을 위한 마력이 불필요하게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현재 잔여량 50%. 최대 70%까지 보존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가 금세 진정했다. 내게 사무적인 말투를 쓰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시스템…?”

- 예. 태오 님.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시스템이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마물 도감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을 조언하니 신기한 걸 넘어 어색했다. 허공을 바라보며 괜스레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너 그런 기능도 있었어? 그럼 진즉에 좀 알려 주지.”

그럼 며칠간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곧 마음 한구석에서 불길한 낌새가 고개를 들었다. 시스템은 분명 마물 도감과 관련한 기능만 갖고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기능이 추가됐다는 건 너무도 수상했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시스템… 너 원래 목소리가 이랬나?”

어째서 시스템의 목소리가 바뀐 것 같을까. 처음 이 세계에서 만난 시스템은 분명 정갈한 여성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목소리는 낮은 음역대를 가진 남성의 것. 심지어 울림이 좋은 미성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대답해 줘. 시스템. 아니, 아무 말이라도 해 봐.”

순식간에 입 안이 바짝 말라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랜 정적 끝에 돌아온 건 나직한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가 아는 누군가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애써 부정했다.

그러자 귓등을 간지럽히는 웃음은 한층 더 짙어졌다.

- 생각보다 빨리 눈치채셨군요.

이번엔 머릿속이 아니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두 눈을 뜨고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눈앞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너, 아니. 당신은….”

계속 말을 더듬는데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 새롭게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태오 님의 편리한 모험을 도울 ‘시스템’입니다.

말도 안 돼!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려 묶고 정갈한 정장 차림을 한 남자는 누가 봐도 오케아노스였다. 그런데 자신을 보고 시스템이라고 소개하다니, 결국 미쳐 버린 걸까?

그래. 이건 꿈이다. 세상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최악의 악몽을 꾸는 것이다. 짓궂은 오케아노스가 나를 데리고 장난을 치는 게 분명하다. 불안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도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 손을 휘적거렸다.

“오, 오케아노스 장난치지 마요.”

- 물론 제게 ‘그’도 포함되어있지만, 이젠 시스템이라 부르셔야 합니다.

“…장난하지 말라고요. 오케아노스.”

- 시스템.

역시 고집만 두고 보면 오케아노스가 맞다. 그런데 천하의 오케아노스가 장난 한번 치겠다고 내게 존댓말을 쓸 리는 없었다. 은근슬쩍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가 괜히 아프기만 했다. 꿈이 아니다. 악몽 같은 현실이지.

“…….”

보호막 대신 아그누스를 꽉 끌어안고 오케아노스를 흘겨보았다. 항상 쓰고 있던 산호 왕관은 사라지고, 뒤로 넘긴 베일만 남아 꼭 면사포를 쓴 것 같았다. 줄곧 베일에 가려져 흐릿했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니 이질감이 더했다.

게다가 외형이 미묘하게 오케아노스와 달랐다. 원래 오케아노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푸른 눈동자에 물빛 머리카락을 가졌다. 하지만 이 오케아노스, 아니, 이 남자는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와 수면에 흩뿌려진 윤슬처럼 은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오직 이마에서부터 콧대까지 이어진 붉은 흉터만은 그대로였다.

다른 그림 찾기 하듯 원래 오케아노스와 자신을 시스템이라 주장하는 남자를 비교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케아노스와는 다른 존재로 느껴져 더욱 절망적이었다.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은발의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아니, 잠깐만요. 거기 서 봐요. 멈춰 보라고요!”

두 손을 바짝 올리며 언성을 높이자 그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멀찍한 마음만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추궁하듯 물었다.

“당신 정말 시스템이에요?”

- 예. 맞습니다. 갑자기 제게 존댓말을 쓰시는 걸 보니 이 모습 때문이군요.

“그 얼굴을 하고 존댓말을 쓰는 그쪽 때문에 약간 울고 싶어졌거든요….”

입꼬리를 씰룩인 그 남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별수 없다는 표정과 행동까지 무서울 정도로 오케아노스와 똑같았다. 초조하게 아랫입술만 깨물다가 대뜸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시스템임을 증명해 봐요. 그, 해 봐.”

시스템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말을 했다. 만약 진짜 시스템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에 대해 읊을 것이다.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니 그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더니, 당신은 증명받길 정말 좋아하는군요.

후, 하고 짧게 내뱉는 숨엔 약간의 귀찮음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을 기억하는 그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진짜 시스템인가…? 확신이 의심을 넘어가던 순간 남자는 간단히 쐐기를 박았다.

- 매일 알람을 오전 6시에 맞추고 노래가 3번 반복되면 껐죠.

“잠깐만. 진짜 시스템이야?”

-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뭐, 말 나온 김에 더하죠.

경악으로 물든 내 얼굴이 뭐가 재밌는지, 그 남자는 나긋나긋 웃는 낯을 고수했다.

- 모닝콜을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로 설정하면 아침에 행복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바꿨지만 오히려 역효과. 주말에도 그 노래만 들으면 출근해야 할 것 같단 생각에 빠져 일주일 만에 다시 바꿨죠. 게다가 플레이리스트에서도 해당 가수를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말이지…. 사정이 있었어.”

- 제일 많이 검색한 단어는 ‘티 안 나게 복수하는 법’. 그다음은 대학원 정보 플랫폼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선 익명 사이트에 단 한 번도 글을 올리지 않았죠. 교수 평가 게시판에 임시 저장된 글만 백 개가 넘게 쌓여 있었는데. …음침하게 생각만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아니, 그건 생각보다 익명 보호가 잘 안 된다기에….”

잠깐만.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지. 증명을 시킨 건 나인데 촌철살인을 당해 뒤늦게 후회했다. 멍청하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저절로 새어 나오는 탄식은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나를 몰아붙였다.

- 단축번호 1번은 가 족같은 교수. 그와 동시에 스팸 설정을 가장 많이 한 번호도 교수님. 2번은 119였지만, 다행히도 부른 적은 없죠. 알고리즘으로 당신에게 건강 식품을 추천했던 제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숨도 고르지 않고 말을 끝낸 그는 혈색 없는 입술로 싱긋 웃으며 물었다.

- 더 할까요?

“맞네. 맞아! 시스템이네. 내가 알던….”

부정하고 싶어도 시스템이 맞다. 심지어 처음보다 나에 대한 정보가 정교해졌다. 주석처럼 사이사이에 낀 의견을 듣자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건 마치 기계에 의지가 생긴 것 같지 않은가.

“그, 내가 머리가 굳어서 그런데… 이해하기 편하게 설명해 줄래?”

- 말 그대로 당신의 안에 자리 잡은 것들이 하나로 합쳐진 것뿐입니다. 마물과 인간… 그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한 당신만이 가질 수 있는 본질입니다.

혼돈. 그 자체였다. 정중한 시스템과 제멋대로인 오케아노스, 그리고 능글맞은 오필리아까지 합쳐져 괴상한 배합물이 완성되었다.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사이, 그 남자는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웃으며 말했다.

- 앞으로 당신이 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이 시스템이 친절히 짚어 드리죠.

계속 이 얼굴을 봐야 한다니. 역시 손해를 수반하지 않는 거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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