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73/305)

#73

천재가 아닌 이상 빈틈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노력뿐이다. 그날부로 매일같이 실습실을 드나들었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낮인지 밤인지 구별도 안 되는 실습실 안에서 아그누스를 소환하는 의식만 반복했다. 하지만 훈련이 시작된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심지어 셋째 날까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력은 소모품이기에 아그누스를 소환하는 족족 사라졌다. 정작 충전하는 방법을 모르니 의욕이 넘쳤던 시작과 달리 빠르게 지쳐 갔다. 마치 도착 지점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다리부터 움직이니 체력이 바닥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그누스. 가만히 있어야지.”

게다가 아그누스는 훈련을 놀이로 인식했는지, 소환될 때마다 그림자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사이에 내 마력은 가뭄이 든 우물같이 비쩍 말라 갔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이마에 땀이 저절로 흥건해졌다.

“하아…,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결국 훈련을 시작한 지 나흘째 되던 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마력이 부족해 형체가 희미해졌는데도 아그누스는 뭐가 좋은지 보랏빛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대형견을 산책시키는 주인이 이런 느낌일까.

물론 단 며칠 만에 커다란 변화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미약한 감이라도 잡히길 바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태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소환을 거듭할수록 마력이 모이지 않고 자꾸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전에는 바닥에 얇게 쌓인 눈을 뭉치는 거였다면, 지금은 물도 없이 퍽퍽한 모래를 뭉치려고 아등바등 힘쓰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아그누스를 쓸 때마다 백이면 백 지쳐 쓰러질 것이다. 비단 아그누스 소환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마물을 소환하기 위해선 반드시 마력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머리로는 이론을 이해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왜 안 되지. 왜….”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뜨거운 한숨을 뱉어 냈다. 아그누스는 이미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는데, 빈껍데기가 된 기분은 여전했다. 혈관까지 전부 텅 비어 버린 느낌이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쪽잠을 자려고 눈을 감은 순간, 중저음의 미성이 귀를 간질였다.

[본질이 비어서 그렇단다.]

이 사람은 왜 항상 내가 약해지기만 하면 나타나는 걸까. 그것도 내 생각을 정확히 꿰뚫는 말을 하면서. 불쾌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듯 목소리로부터 등을 돌려 누웠다.

“그놈의 본질 타령. 아무리 말해도 전 이해 못해요.”

[그 반응을 보아하니 나 말고도 누군가한테 본질에 관하여 들었나 보구나.]

심심치 않게 들었다. 처음 누르는 마안을 통해 내 본질을 보고 ‘텅 비었다.’고 표현했다. 그땐 단지 마력이 부족하다는 말로 알았지만, 다른 마물을 만난 후에야 진상을 파악했다.

내 몸은 빈 요람이었다. 그래서 밀어내야 할 것을 밀어내지 못하고 전부 받아들이고 만다.

“육체를 가지고 세계를 넘어온 부작용일지도 모르죠.”

[일리는 있어. 하지만 중요한 건 원인이 아니야.]

목소리에 희미하게나마 묻어나 있던 웃음기마저 사라졌다.

[내가 네 안에 있은 지 채 한 달도 안됐지만, 네 상태…. 꽤 심각하단다.]

갑작스러운 선고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니? 마물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는 조언은 들었어도, 이렇게 직접적인 경고는 처음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눈을 덮은 수건을 치우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원래 네게 흡수되어야 했던 내가 점점 분리되고 있다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오케아노스가 내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뿐만이 아니야. 빈껍데기 속에 수많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지. 이전 세계에서 지낸 시간, 소설에 머무른 기억. 오필리아의 의지와 바로 나, 오케아노스의 일부까지.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섞이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고 있어.]

가늘게 뜬 눈초리엔 싸늘한 감정이 맺혀 있었다.

[손을 쓰지 않으면 언젠가 네가 조각조각 갈라지게 될 거야.]

갈라진다고…? 바닥에 떨어져 금이 간 구슬처럼 내 몸이 부서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쉽게 믿기지 않아 오케아노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베일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평소와 달리 진지할 뿐이었다. 진정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에 창백한 두려움으로 휩싸였다.

“제가 뭘 해야 하죠?”

[혼란스러운 네 본질을 전부 합쳐야만 해. 그게 네가 힘을 기를 방법이자,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지.]

“그걸 어떻게….”

[내가 도와주마.]

힘없이 떨구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를 향해 슬그머니 미소 짓는 그는 영혼을 빼앗으려 꿰어 내는 악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현듯 있는 놈들의 호의를 함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아이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조건이 뭔데요?”

[간단해.]

오케아노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히 말했다.

[이제 그만 엑스트라이길 포기해.]

“그게… 무슨 소리죠?”

[넌 네 모순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 엑스트라의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우습지 않니? 꽃을 뿌리려고 온 들러리가 돌연 부케를 뺏는다는 게.]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검지로 내 입술을 쓸어내린 오케아노스는 소름 끼칠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책임을 지는 게 두려우면, 처음부터 얌전히 꽃바구니나 들고 있어야지.]

그래. 나는 줄곧 누군가가 이 바통을 넘겨받아 주길 바랐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세계가 멸망하는 것보다, 내 계획이 잘못되어 세계가 멸망하는 쪽이 몇 배는 더 두려우니까.

그래서 무너진 담장을 하나씩 고치며 ‘이것만 하면 누군가가, 이 일만 끝나면 누군가가 나타날 거야.’ 하고 자신을 세뇌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책임을 아무리 회피해도 내가 기다리던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사이 가파른 언덕 위에 멈춰 있던 돌이 신탁대로 굴러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돌은 무너진 담장을, 이 제국을 덮치고 말 것이다.

그 결말을 두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나? 아니, 이미 너무 깊이 관여한 건 아닐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 불안을 읽어 낸 오케아노스가 말했다.

[포기가 안 되니? 그럼 이제 그만 인정해야 할 거야.]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투명한 눈동자에 볼품없는 내 얼굴이 비쳤다.

[넌 주인공이 될 운명이야. 태오.]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을 느끼곤 나도 모르게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괜한 걸 물었네요.”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던져 놓고 실습실을 빠져나왔다. 오케아노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꼭 돌아올 걸 확신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더욱 씩씩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덧 밤이 되었는지, 밖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횃불만이 간간이 보였다.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그때 길목에 서 있는 훤칠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세잔?”

일렁이는 불빛 아래 선 세잔은 금세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태오 형.”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예. 설마 아직까지 계신 줄 몰랐습니다.”

“실습실 안이 계속 밝아서 그런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그야 그렇지만….”

다정한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빛을 띠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자연스레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잔잔하게 울리는 정원에서 세잔에게 물었다.

“잘 되고 있어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오시니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보여 드려야죠.”

굳은 의지가 드러난 얼굴은 평소 세잔과 사뭇 달랐다.

“있잖아요. 세잔.”

“네, 형.”

“세잔은 …피하고 싶지만, 결국 피하지 못한 게 있었나요?”

혹 무례한 질문일까 뜸을 들인 것이 무색하게 세잔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뭔지 물어봐도 돼요?”

“피아트 가문의 후계자 자리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입술만 움찔거리다가 겨우 이유를 물었다.

“어, 어째서요?”

“저는 후작이 될 인재가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결단력이 있지도, 어머니처럼 강직하지도 않죠. 그런데 제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내가 보기엔 세잔은 후작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마력이 부족한데도 마법을 쓰려는 집념과 신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간의 고민까지 부정하는 꼴이 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복잡한 표정에서 속내를 읽어 낸 듯 세잔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받아…들인 건가요?”

세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책임을 회피하는 시간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데 쓰는 게 낫지 않습니까.”

***

벌써 실습실로 출근한 지 5일이 지나갔다. 오늘은 반드시 감을 잡아 보리라고 다짐하며 사라세니아를 챙겼다. 기억하고 있는 제조법대로 약물을 만들어 실습실로 들어갔다. 마개를 열자마자 사라세니아로 만든 약물을 입에 부어 넣고 꿀꺽 삼켰다. 쓰디쓴 맛이 바늘처럼 혀뿌리를 사정없이 찔러 대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겨우 입을 틀어막아 참고 급히 아그누스를 불렀다. 사라세니아 덕분일까. 아그누스는 어제보다 훨씬 윤기 흐르는 털을 자랑하며 그림자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아니, 발끝까지 형태가 다 잡히기도 전이었다. 아그누스가 신기루처럼 공중에서 흩어졌다. 내가 들어가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모습을 감춰 버렸다. 다시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그누스는 현신하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내일 먹으려고 남겨 둔 약병을 꺼냈다. 당장 마개를 열려고 하자 새하얀 손이 나타나 가볍게 제지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밑 빠진 독에 물을 아무리 부어도 똑같아.]

약병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면 부족인가. 아니면, 신경 쇠약인가. 잠들지 못한 밤이 이어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인내심은 빠르게 타들어 갔다. 나를 위한 손을 날카롭게 쳐 내며 예민한 반응을 드러냈다.

“솔직히 당신의 저의를 모르겠어요.”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제 본질이 조각나고 있다는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 쳐요. 그럼 그냥 제가 쪼개지게 두시면 되잖아요. 어째서 도와주신다는 거예요? 단지 제가 온전치 못하면 당신도 사라지니까 그런 건가요?”

[뭐, 그 이유도 물론 있지만.]

손을 휘적거린 오케아노스는 자못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넌 내 본체였던 오케아노스와 달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뒤바뀌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도 하지. 나약한 인간이면서 마물을 위해 무모한 짓을 하는 널 보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어.]

한 걸음 앞으로 불쑥 다가온 오케아노스가 내게 허리를 숙였다. 사락, 얇은 베일이 흘러내려 내 콧잔등에 닿았다. 백옥 같은 이마를 가로지른 흉터가 유독 붉게 보였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 보겠다고 아등바등 사는 네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길게 찢어진 입매에 무서울 정도로 순수한 흥미가 번져 갔다. 오케아노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부는 날 두고 도박을 할 셈이다. 전쟁의 결말을 알고도 내 장단에 맞춰 주겠다던 말은 진심이었나 보다.

아직도 의심스러웠지만, 난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호기롭게 물었다.

“제가 감수해야 할 손해가 있나요?”

[없어. 네가 져야 할 것은 책임뿐이야.]

정말이란다. 붉게 물든 입술이 매혹적인 감언을 속삭였다. 내게 내민 손을 맞잡으려다가 말고 씨알도 안 먹힐 으름장을 놓았다.

“무슨 일이 생겼다간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당신을 도려낼 거예요.”

[후후, 무섭기도 해라.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네가 사라지면, 곧 나도 사라진단다.]

호선을 그린 눈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어제 세잔이 한 말을 들었을 때, 한참 허우적거리던 늪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시간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데 쓰는 게 낫다.

여전히 책임을 지는 것은 두려웠다. 하지만 지키고 싶은 것이 있으니 감수해야만 했다.

“좋아요. 주인공이니 뭐니, 그 소린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손으로 구한 그들에 대한 책임은 지고 싶어요.”

끝내 오케아노스의 손을 맞잡았다. 온기는 전혀 없었으나, 새하얀 살결 아래 숨어 있는 힘만큼은 뚜렷이 느껴졌다. 꽉 잡은 손을 끌어당긴 오케아노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생각했다. 신의 계획에 없는, 신탁을 거스른 아이야.]

사방이 막힌 실습실에서 갑자기 돌풍이 불어왔다.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바람이 멈춘 후에야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인간의 형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십 개의 눈을 지닌 고래가 나타났다. 끼긱, 끼긱. 기괴한 소리를 움직이며 돌아간 눈동자가 전부 나를 향했다.

[내가 기꺼이 네 혼돈을 감싸 안고, 온전한 본질이 되어 주마.]

마치 여러 명이 말하는 것처럼 다양한 목소리가 한 번에 들렸다. 그곳엔 오필리아의 목소리도, 시스템의 목소리도, 심지어 내 목소리까지도 섞여 있었다. 이윽고 순백의 고래는 거대한 입을 벌려 나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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