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제국 최고라 불리는 안겔루스 대학의 학술 대회가 바야흐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학 관계자들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일제히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화와 천을 나르는 인부들이 본관 앞을 지나갔다.
그들의 손길을 따라 심심한 석조 기둥은 다홍빛 리시안셔스와 느슨하게 얽힌 천으로 장식되어 새로 태어났다. 창백한 겨울 기운이 맴도는 학교에 이른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이처럼 학교는 점점 바빠지는데, 신기하게도 기숙사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듣자 하니 학술 대회 기간엔 수업이 없어서 대부분 학생이 본가에서 대회를 준비한단다. 그 때문일까. 연구실로 드나드는 학생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 대신 아스레인 앞으로 날아오는 편지가 하루에도 수십 통에 달했다.
“교수님. 오늘도 이만큼 들어왔어요.”
“거기다가 두게.”
모두 마물학과 학생들이 보낸 논문과 보고서였다. 일면식도 없는 학생까지 보내오니 연구실은 점점 서류 창고로 변해 갔다. 수료생과 일반 학생의 문서를 분리해서 정리해 놓아도 산더미였다.
보고서는 최소한 열 장이 넘는 데다가 더욱이 논문이라면 수십 장에 달하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읽을 논문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아스레인을 슬쩍 떠보았다.
“전부 다 읽으시게요?”
“그래야지.”
대답과 함께 종이 위로 화려한 깃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첫 문단만 읽어도 결과가 훤히 보이긴 하지만, 그들에겐 최선의 결과물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죠.”
“그러니 누군가는 읽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바로잡아 줘야 하네.”
무리하지 말라며 말릴 수 없었다. 과거의 나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학생에겐 한 줄 평이라도, 하다못해 아스레인이 읽어 줬단 사실마저도 간절할 것이다. 그러니 아스레인에겐 미안하지만 부디 더 많은 보고서를 읽어 주길 바랐다.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하며 아스레인의 안색을 살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괜찮네. 자네는 전시할 보고서도 끝내지 않았나.”
“예. 그때 교수님께서 첨삭해 주신 덕분에 일찍 마쳤어요.”
“잘됐군. 그럼 대회 기간 동안엔 편히 쉬게.”
편히 쉬라니.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글자의 늪에 빠져 사는 아스레인을 두고 쉴 수 있을 리 없었다. 당분간 답사나 출장은 없을 테니 그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아이리스에게 마력 운용에 대해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뭐든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더 이상 방해되지 않게 연구실을 빠져나가려다가 문득 말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그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저… 교수님.”
“왜 그러나.”
“아이리스한테 들었는데, 이번 학술대회에 클라우스 자작이 올 것 같아요.”
불청객의 이름이 나오자 줄곧 보고서에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빠르게 튀어 올라왔다.
“…클라우스 자작?”
“예.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만나 보려고 해요. 짧은 대화에서 뭔가를 끌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경계를 늦추기 위해 눈도장을 찍어서 나쁠 건 없겠죠.”
“페르가몬 저택에서 받은 그 연회장 때문에 그러나.”
“연회를 포함해서 아이리스의 일까지… 계속 의심이 가서요.”
역시 아스레인 또한 클라우스 자작을 내심 의심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는 근심을 끌어안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빛을 잃은 금색 눈동자에선 무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얌전히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으니 아스레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겠지.”
“무리하지 말고,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바로 연락해라. …맞죠?”
“그래.”
아스레인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의자에 기대어 내게 가볍게 손짓했다. 심부름이라도 시키려는 걸까. 아무 생각 없이 책상을 빙 둘러서 옆으로 다가가자 아스레인이 내게 손을 뻗었다. 이윽고 섬세한 손길이 내 뺨을 감싸 쥐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서 종이에 스며든 잉크의 향기가 그윽하게 퍼져 가고 있었다.
“그새 표정이 많이 좋아졌군.”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가 화살촉처럼 가슴에 박혔다. 저 부드러운 미소에 또 속절없이 당해 버렸다. 늘 무심하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봄볕 같은 따뜻한 온기를 품을 때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당연한 일조차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무래도 저 사람에 대한 항체는 죽어도 만들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태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만치 날아간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지금 이 자리를 뜨지 않으면, 아무리 바보라도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황급히 한 걸음 물러서 손길에서 벗어나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뻣뻣하게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려고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본관에 다다랐다. 수업이 없는 강의실 앞은 여전히 학교를 꾸미기 바쁜 인부들을 제외하곤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니 마법학과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세잔이 있으려나….”
전에 레스토랑에서 세잔은 학술 대회 준비 기간 동안 교내 실습실에서 훈련하겠다고 말했다. 혹시 구경할 수 있을까 싶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운 좋게 실습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찾았는데, 막상 들어가자니 엄두가 나지 않아 다른 학교에 놀러 온 외부인처럼 문 앞을 맴돌았다.
그때 바로 옆에서 보랏빛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소리 지를 틈도 없이 기겁하며 돌아보자 시큰둥한 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뭐냐. 너였냐?”
“아이리스!”
“왜 좀도둑처럼 기웃거리고 있어?”
“좀도둑이라뇨. 단지 실습실에 제가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 망설이던 거였어요.”
아아. 작게 탄성을 내뱉은 아이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겔루스 대학 사람이면 자유롭게 출입해도 되는 걸로 알아.”
“정말요?”
“그럼 거짓말이겠냐. 그런데 네가 마법 실습실엔 왜 들어가려고?”
“세잔이 여기서 훈련한다고 들어서요. 구경하고 싶기도 하고….”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불쑥 뒤돌아서 아이리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수상쩍은 시선을 느낀 아이리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지금 한가하면 같이 가요. 아이리스.”
계단 위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린 아이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순순히 따라와 주긴 했지만, 무거운 발걸음에서 가기 싫은 감정이 다분히 묻어났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무렵 아이리스가 대뜸 물었다.
“넌 그 자식 불편하지도 않냐?”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왜요?”
“이상하잖아. 그 잘나가는 피아트 후작의 자제면서 우리 같은 평민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여긴 안겔루스 대학이잖아요. 세잔은 단지 신분을 떠나서 친구가 필요했던 것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게다가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해?”
만약 세잔이 도서관 앞에서 귀족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못 봤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가 후작가의 자제임을 몰랐을 것이다. 그만큼 편견 없이 대해 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냉정한 물음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
선뜻 반박하지 못하자 아이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있는 놈들 함부로 믿는 거 아니다. 호의엔 항상 이유가 있어. 경험상 쭉 그래 왔거든.”
아이리스의 말도 분명 일리가 있지만… 세잔만큼은, 적어도 내 주변 사람만큼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난데없이 심각해진 나를 두고 아이리스는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뒤늦게 그를 따라가니 마치 독서실처럼 휑한 복도 양옆으로 띄엄띄엄 떨어진 문이 보였다. 세잔이 어디 있는지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수많은 실습실 중에서 소음이 들리는 곳은 단 하나였다.
조심스레 노크를 하니 쿵쿵, 하고 불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잔이 문을 열고 나왔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와 뺨에 맺힌 땀을 닦던 세잔이 나를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오? 여긴 무슨 일로 왔습니까.”
“세잔 경이 여기 있을 것 같아서요. 괜찮다면 잠시만 구경해도 될까요?”
“아직 미숙한지라 조금 부끄럽지만, 들어오시죠.”
수줍게 웃은 세잔은 선뜻 실습실 안으로 맞아들였다.
실습실은 마법이 만들어 낸 충격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만큼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학생 서른 명을 수용하는 교실 크기만 한 공터에는 이번 학술 대회에 쓰일 바위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게다가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이 실습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상과 사뭇 다른 실습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세잔이 아이리스를 맞닥뜨렸다.
“아이리스, 당신도… 입니까?”
“예에. 뭐, 태오가 같이 오자고 해서 왔습니다.”
몇 번 얼굴을 보면서 밥 먹은 사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잔과 아이리스는 아직도 서로를 떨떠름하게 여겼다. 양 끝에 놓인 성격의 간극을 줄이는 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싸늘한 적막이 흐르기 전, 서둘러 세잔의 주위를 끌었다.
“오면서 보니까 실습실에 세잔밖에 없더라고요.”
“대부분 본가나 별장에서 훈련하니 학술 대회 기간에 실습실은 조용한 편입니다. 전 가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이곳에 있는 겁니다.”
“아…. 그럼 저흰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대로 해 주세요.”
“으음,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세잔은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묘하게 우리를 신경 쓰는 눈치였지만, 이내 눈을 감고 나직하게 기도문을 읊조렸다. 허공을 가르는 손짓을 따라 공기의 흐름이 천천히 바뀌었다. 벽에 딱 달라붙어서 다양한 마법을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진심을 툭 내뱉었다.
“저도 마법을 능숙하게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여러 방법으로 바위를 깼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광경은 가히 비현실적이었다. 부러운 듯 바라만 보고 서 있으니 아이리스가 툭 내뱉었다.
“꼭 마법을 쓸 필요는 없지. 너만 갖고 있는 게 있잖아.”
“네?”
의아하게 돌아보자 아이리스는 눈짓으로 발아래 드리운 그림자를 가리켰다. 그가 말하는 대상이 아그누스임을 깨닫곤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매번 부탁하기가 무리여서요. 마력이 부족하기도 하고….”
“마력이 많으면 좋긴 하다만, 필수 조건은 아니야.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지.”
“…어떻게 쓰는데요?”
자신 있게 대답하려 벌어졌던 입은 한 번 달싹거릴 뿐 말이 없었다. 그 후 한참동안 생각만 하던 아이리스는 별안간 내 손목을 붙잡고 저 멀리 서있는 세잔을 불렀다.
“세잔 경. 잠깐 얘 좀 데리고 가겠습니다.”
기도문을 외우던 세잔이 의문 섞인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도 아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로 옆 실습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간 그가 난데없이 말했다.
“꺼내 봐.”
“여기서요?”
“어. 아무도 안 보잖아.”
꽉 닫힌 문을 한 번 돌아보곤 아그누스를 조심스레 불러 보았다. 발끝에서부터 이어진 그림자에 파문이 일더니, 새까만 고양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전과 다른 형태를 본 아이리스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뭐야. 늑대가 아니었어?”
“네. 아그누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어요. 처음 봤을 땐 토끼였거든요.”
“아그누스라고 하는구나. 책에선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야.”
오랜만에 그림자 밖으로 나와 신이 난 아그누스는 끊임없이 내 다리에 뺨을 비볐다. 털끝에서 흘러내리는 아지랑이를 본 아이리스는 작게 감탄을 흘렸다.
“역시 넌 마법을 배울 필요는 없어. 얘만 잘 다룰 줄 알면 돼.”
“하지만 아그누스는 제 마력을 소모해서 실체를 유지해요.”
“그럼 오래 꺼내 둘 방법은 간단해. 최소한의 마력으로 유지해 두는 거야. 아마 지금은 익숙하지 않을 테니 필요 이상의 마력을 들이겠지.”
아이리스는 검지를 쭉 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령 네게 10만큼의 마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넌 10을 꼬박 들여서 아그누스를 소환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만약 아그누스를 소환하고 실체를 유지하는 데 3의 마력으로도 충분하다면?”
“나머지를 비축할 수 있겠죠.”
“그래. 그 나머지 7을 공격이나 방어를 지시할 때 쓰는 거야. 간단하지?”
이론은 쉽지만 실상은 달랐다.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이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도 똑같아. 마법의 종류는 많지만, 실제로 자주 쓰는 마법은 한정적이지. 계란 하나 부수는데 하늘에서 바위씩이나 떨어트릴 필요는 없잖아? 모든 건 효율의 문제야.”
“마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은 뭔데요?”
“미안하지만, 네가 천재가 아니고선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감을 익히는 방법밖에 없어.”
검술을 익히기 위해선 먼저 검을 몇 백번씩 휘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단순 노동에 가깝지만, 직관적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을 때 풀이 전체를 외워서 시험을 봤었던 내게 그 정도는 난관도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데요.”
“좋다고?”
“안 그래도 최근 시간이 많이 생겼거든요.”
싱긋 웃으니 아이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너도 참 너다.”
“고마워요. 아이리스. 가르쳐준 방식대로 해 볼게요.”
학술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목표가 생겼다.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실습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아그누스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