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의심이 객관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의심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 같다. 잘못된 보기를 정답이라 믿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는 점도, 문제를 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정신을 갉아먹는다는 점까지도 닮아 있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총구를 신중하게 겨눠야 한다. 그것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재라면, 더더욱 시간을 들이고 들여 완벽한 증거를 잡아내야 한다.
“하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와 나무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수풀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
무성한 풀 사이에서 회색 털 뭉치가 불쑥 튀어나와 내게 한달음 달려왔다. 혀를 내밀며 웃는 표정을 보니 가슴 속에 묵힌 근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주 웃으며 누르를 반겨 주었다.
“잘 놀았어?”
[응. 그보다 엄청 웃긴 일 있었어.]
“뭔데?”
[글쎄 할아버지가 꽃 냄새를 맡다가 재채기를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 있지. 가끔 하품하다가 꽃도 피우신대. 신기하지. 응?]
“하하, 그러네. 나도 같이 가서 볼 걸 그랬다.”
[게다가 내가 술래잡기도 전부 이겼어! 할아버지가 나보고 대단하대.]
한껏 수다스러워진 누르는 그동안 보여 준 의젓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이제야 제 나이대의 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자 누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있잖아. 나 여기가 마음에 들어.]
“정말?”
[봄이 오면 새하얀 꽃이 만발한대. 게다가 나무 열매도 많이 열릴 거래.]
“잘됐네! 맛있고 싱싱한 열매도 아주 많을 거야.”
열매란 소리에 어린 마물은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꼬리를 높이 뻗었다. 누르가 쿠네 숲을 마음에 들어 한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대로라면 안겔루스 대학에게 누르의 방사를 허락받기만 하면 된다. 숨길 수 없는 기쁨을 한가득 담아 동그란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마냥 행복해 보이던 누르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다 좋은데… 계속 마음이 쓰여.]
“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줄게.”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색을 살피자 누르가 시선을 흘끔 올렸다. 눈치를 살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마치 죄를 저지른 것처럼 침울한 눈빛이었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누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뭐?”
[우리 가족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 막말로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겠지.]
“누르야….”
[그래서 내가 행복할 때면 가족들이 떠올라. 맛있는 열매를 먹을 때나, 새로운 꽃향기를 맡을 때나, 하다못해 햇빛이 창창한 날만 되어도… 우리 엄마도 좋아했을 텐데, 하고 생각해.]
추억을 회상하며 나무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고요한 수면과 같았다.
[내 동생이 태어나던 날, 작은 키쟌 나무에 처음으로 꽃이 폈어. 그 후에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가 자랐지. 그거 알아? 키쟌 나무 열매는 빨개지기 전까진 쓴맛이 심해서 완전히 여물기를 기다려야 해. 그래서 매일매일 열매만 올려다봤어. 새빨갛게 익고 나면, 내가 동생에게 그 열매를 직접 따다 주려고 했어.]
털로 뒤덮인 발이 흙바닥을 하염없이 툭툭 건드렸다.
[단 하루였어. 딱 하루만 지나면 됐는데, …전부 사라졌어. 태오. 도망칠 새도 없었어.]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쓴맛이 나는 대로 줄걸…. 바보같이 왜 기다렸을까?]
그간 쌓였던 후회를 토해 내는 목소리가 서글프게 떨렸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누르를 쳐다보기만 했다.
[동생은 열매도 맛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는데, 내가 맛있는 열매를 잔뜩 먹어도 되는 걸까? 다들 나를 원망하면 어떡해?]
앳된 목소리가 여린 심장을 찔러 와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그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무리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얼마나 무거울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나로선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아무도 널 원망하지 않아.”
[…그래?]
“당연하지. 오히려 가족들은 네가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더 배부르고, 더 건강하게 살길 바랄 거야. 물론 매일이 지금처럼 새롭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 키쟌 나무엔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 피는지, 그 열매에선 어떤 맛이 나는지…. 가족들은 전부 너를 통해 느끼고 있을 거야.”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누르와 머리를 맞대었다. 이마로 느껴지는 적당한 온기에서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서서히 심호흡이 비슷해질 즈음,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누르를 만나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만나게 된 계기가 후회스러울 뿐이다. 만약 처음으로 돌아가 비브린트 숲에서의 참사만 없앨 수 있다면, 내 평생 누르를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오히려 무리 속에 사는 그의 행복을 기쁘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럴 거야. 날 믿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두 팔을 뻗어 누르를 꽉 안아 주었다. 그러자 누르는 내 작은 품에 머리를 비비며 속삭였다.
[다들 이곳에 있었다면, 널 정말 좋아했을 거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던 손이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기뻐해야 하는데, 그 어떤 말보다 고마운 칭찬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불과 몇 분 전, 오케아노스가 물었다. 어째서 마물과 관련된 사건에 책임을 지려는 것이냐고. 그땐 의무감이라 말했지만,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었다.
“반드시 너를 지켜 줄게. 네가 성체가 되어서도 이 숲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게.”
사이누르도, 히페리온도 인간에게 화를 입었으면서 또다시 인간인 내게 마음을 내어 주었다. 쉽게 옮겨붙는 원망의 불씨를 저버리고 나를 믿어 주는데, 또다시 인간에게 배신당하지 않도록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이만큼 해 줬으면 됐지. 뭘 더 해 주려고.]
“그래도….”
품에서 부드럽게 빠져나온 누르가 네 발로 땅을 짚고 섰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단단한 번데기를 열고 나온 나비처럼 강인한 모습이었다. 가족을 생각하며 초점 없이 공허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총명한 빛을 띠었다.
[이젠 내가 성장해서 널 지킬게.]
말이 끝나자마자 맑은 효과음이 울렸다. 사이누르와의 관계 평가가 최종 단계인 수호로 진전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이 과분한 마음을 어찌 보답할 수 있을까.
***
마지막까지 아스레인이 힘을 써 준 덕분에 무사히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왔다. 쿠네 숲에 갔던 것이 자극제가 되었는지, 평소보다 누르의 식사량이 훨씬 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오케아노스 사건까지 일단락되었으니 당분간은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다.
하지만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고 마냥 기쁜 건 아니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저 멀리서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제 수중에 남은 건 클라우스 자작이 페르가몬 저택으로 보낸 초대장뿐이다. 마물에게 피해를 입은 영주들을 모아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보겠다고 했던가. 제법 그럴싸한 논의로 보이지만, 클라우스 자작과 연관된 단서들이 영 신경 쓰였다.
대체 왜 클라우스 자작은 데히드 꽃을 보낸 걸까. 아이리스를 아스레인의 제자로 만들려는 노력도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지금으로선 직접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 확인하는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눈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어딜 데려가나 했더니 또 이 레스토랑이야?”
“그렇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는 걸요.”
“다른 분들은 못 오시는 겁니까?”
“아, 교수님이랑 진 씨는 일이 있어서 못 오셨어요.”
누르를 쿠네 숲으로 옮기는데 도움을 준 세잔과 아이리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할 것 없이 그들을 데리고 시장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왔다. 종업원에게 오늘의 메뉴를 주문하고 돌아오니 퉁명스러운 얼굴과 마주쳤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아이리스는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좋은데, 넌 왜 항상 보답을 식사로 하냐?”
“아, 그… 오래된 버릇이에요.”
예전에 오랜만에 만나거나 고마운 사람에게 무조건 ‘내가 밥 한 번 살게’라고 말해 왔다. 이 세계에 넘어온 지 꽤 되었는데도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멋쩍게 웃으며 눈치를 살피니 세잔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전 태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칙칙한 사내놈이랑 시간 보내는 게 뭐가 좋다고….”
비아냥대는 목소리를 들은 세잔이 아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 말에 토를 달아서 화가 난다기보단 의아한 표정이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낀 아이리스가 세잔을 흘끔 쳐다보았다.
“…왜요.”
“그렇게 나오기 싫어하는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얘랑 있으면 피곤하니까 그러죠.”
“그럼 왜 약속 시간이 되기도 한참 전부터 나와서 기다린 겁니까?”
허를 찌르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리스가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럽게 물을 들이켠 아이리스는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닦으며 대답했다.
“그, 그거야 제가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성격이라 그렇죠.”
“아… 그러셨군요.”
세잔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아이리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빈 컵에서 입을 떼지 못하고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릅뜬 눈이 SOS 신호처럼 보여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정말 고마웠어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누르를 쿠네 숲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걔가 마음에 들어 하긴 했어?”
“네! 누르가 좀 더 크고 나면 차차 방사를 준비하려고요.”
“잘됐네. 하긴 그 온실은 사이누르에게 너무 좁아.”
마침 애피타이저가 나와 여유롭게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점점 식당 안에 들어차는 손님이 많아져 바로 앞에 있는 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포크를 내려놓고 주위를 크게 둘러보며 말했다.
“곧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네요.”
“그렇겠지. 대학도 바빠졌으니까.”
“저희 대학도 뭔가를 하나요?”
축제라도 있으면 괜히 시끄러워질 텐데. 시큰둥한 반응을 본 세잔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안겔루스 대학에서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학술대회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없습니까?”
“하, 학술대회요?”
“4개의 학과에서 각각 1년의 성과를 발표합니다. 마물학과는 꽤 오래전부터 수료생만 논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아마 태오는 학기 내에 쓴 보고서를 전시하게 될 겁니다.”
“우와…. 전혀 몰랐어요.”
학과 별로 나뉘는 학술대회라니! 축제를 떠올릴 때와 달리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테이블을 꽉 붙잡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자 세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대회 기간엔 인재를 찾는 여러 귀족과 안겔루스 대학에 후원하는 연구원들이 방문합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걸음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신다고요?!”
“매년 황실 직속 기관에 가장 많은 연구생을 보내는 학교이니까요.”
쩍하고 벌어진 입이 도통 다물어지지 않았다. 황제, 황실, 황태자. 황이 들어간 황송한 단어들을 들어 보기만 했지, 설마 황태자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단 상상은 못했다.
“그럼 마법학과에서도 세잔과 아이리스도 뭔가 하는 건가요?”
“예. 마물학과와 달리 마법, 검술, 약초학과는 실제 능력을 보여 주는데 치중한 편입니다. 게다가 시험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도록 종목을 매년 바꾸죠.”
취업전선과 맞닿은 졸업 전시회 같은 건가 보다. 흥미롭게 눈을 빛내자 아이리스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참고로 이번 마법학과 테스트 주제는 쉽고 단순해.”
“뭔데요?”
“모든 학생이 같은 강도의 바위를 마법으로 부수기만 하면 돼.”
“생각보다 훨씬 직관적이네요.”
“그래서 더 까다롭지. 단순히 부수기만 해서는 그리 좋은 점수는 못 받을 테니까 말이야. 수두룩한 천재들 사이에서 임팩트를 남기려면, 최소한 돌을 모래 단위로 쪼개 버리거나 한 방에 조각상을 만들거나 해야 할걸.”
아이리스의 말에 십분 동의하는지, 세잔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그간의 고민이 드러나 넌지시 물어보았다.
“좋은 생각 있어요? 세잔 경.”
“아직 구상 중에 있습니다.”
“아이리스는요?”
“나는 편입한 지 얼마 안 돼서 보고서 대체야.”
“그건 좀… 아쉽겠네요.”
“차라리 잘됐지. 당장은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그렇게 음식이 바닥날 때까지 학술대회에 대한 대화가 죽 이어졌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손님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날이 새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세잔과 아이리스를 먼저 레스토랑 밖으로 내보냈다.
혼자 남아 계산을 하는 사이, 나간 줄 알았던 아이리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태오.”
“네?”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말인데….”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아이리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에 자작님께서 오실 거야.”
“…클라우스 자작님이요?”
“응. 안겔루스 대학 학술대회라면 매년 가셨으니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아마 이번엔 반드시 널 만나러 오실 거야.”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이리스가 말을 이었다.
“뭔가를 물어도 성실하게 답하지 말고 어중간하게 넘겨. 오랫동안 그분을 모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자작님의 관심을 사서 좋을 건 없어.”
문득 그의 목에 자리 잡은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아직도 아이리스는 클라우스 자작에게 목숨을 담보로 잡혀 있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경고해 주니 고마울 뿐이었다.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충고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미안해요. 아이리스. 그 충고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