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따사로운 눈빛은 예전 나를 지켜 주겠다며 마주쳤던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져도 그는 분명 히페리온이었다.
“이런… 모습도 할 수 있군요….”
[조금 어색하지만, 이편이 그대에게 편하지 않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아래로 시선이 흘러갔다. 급히 인간의 옷차림을 따라 하려고 해서 그런지, 그의 구둣발과 바지자락엔 자그마한 나뭇가지가 돋아나 있었다. 어? 하고 놀라니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꽃이 피어났다. 자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마물다운 모습이었다.
“형체를 유지하기 힘들지 않아요?”
[이젠 마력이 많이 축적되어 이 정도쯤은 괜찮네.]
“상태가 좋아졌다니 다행이네요. 잘 있었어요?”
[그대 덕분에 편히 쉬었지.]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곧 히페리온은 미간을 좁히며 눈썹 끝을 시무룩하게 내렸다.
[그보다 일전 그대가 나를 불렀을 때 직접 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 아니에요. 그땐 그만한 마력도 부족했고….”
도서관에 있던 꽃 한 송이로 1급 위험 마물을 소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양손을 다급하게 휘저었지만, 히페리온의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뺨을 쓸어 주는 손은 나무껍질처럼 거칠었으나 손길만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위급한 일이었더냐.]
“지금은 괜찮아요. 제 부름에 응해 준 씨앗이 잘 도와준 덕분이에요.”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이젠 괜찮아졌으니, 언제든 불러 주려무나.]
싫어서 안 부르는 게 아니라, 마력이 부족해 못 부른다는 사실을 히페리온은 몰랐다. 아마 자력으로 히페리온을 소환하려면 약초밭에 있는 사라세니아를 전부 뜯어 먹어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입 안에 씁쓸한 맛이 느껴져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아하하…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속사정을 모르는 히페리온은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직 봄이 오지 않았거늘, 무슨 연유로 이 땅에 들러 주었나.]
“이 아이에게 쿠네 숲을 구경시켜 주려고 놀러왔어요.”
얌전히 발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누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다정한 녹색 눈동자가 누르를 향했다. 히페리온은 한쪽 무릎을 굽혀 누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직 어린 나무로구나.]
친절한 태도 덕분인지, 아스레인 앞에서 말도 않던 누르가 공손히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구나. 무리는 어디로 가고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는 게냐.]
[가족은… 흙으로 돌아갔어요.]
복슬복슬한 귀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살려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히페리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말했다.
[그럼 나와 마찬가지로구나.]
[할아버지도 혼자예요?]
[아주 오랜 시간을 혼자 보냈지. 태오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그랬을 게야.]
기운 없이 처졌던 귀가 쫑긋 섰다. 어느덧 새까만 눈동자도 히페리온을 향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강한 마물들은 모두 주변에 엄청난 수하를 거느리고 있는 줄 알았어요.]
[강한 마물?]
[전 본질을 볼 수 있거든요. 할아버지의 본질은 따뜻하면서도 강인해요.]
[하하하, 고맙구나. 하지만 본디 강한 힘을 가진 자일수록 혼자 남게 되지.]
[그렇구나…. 강하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었네요.]
누르가 이토록 쉽게 경계를 푼 건 처음이었다. 모두 히페리온의 천성 덕분이었다. 천천히 흔들리던 꼬리는 이내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쓸어 담을 정도로 거세졌다. 한 발 물러서서 급속도로 친해지는 광경을 보자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히페리온은 듬성듬성 새싹이 돋아난 손으로 누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내 아이들과 놀아 주려무나. 이 할아버지는 저 왕성한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서 고민이거든.]
[제가요?]
[부디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겠니?]
[뭐, 부탁까지 하시니 어쩔 수 없죠.]
킁, 하고 콧바람을 분 누르는 힘차게 수풀로 뛰어갔다. 그동안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있던 씨앗들은 누르를 따라 냉큼 날아갔다. 드넓은 쿠네 숲을 놀이터 삼은 술래잡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어색하게 나뭇잎 나비를 툭툭 치던 누르는 금세 적응하여 수풀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누르는 온실이 아니라 숲에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흐뭇한 미소로 누르와 나뭇잎 나비를 바라보는데, 히페리온이 나긋하게 불렀다.
[나의 소중한 친구.]
“…네?”
[그대에게서 광활한 바다의 내음이 느껴지는구나.]
시적인 표현에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저 오케아노스를 만났었어요.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아아, 그래. 그 이름이었지.]
“역시 서로 아는 사이였군요.”
먼 곳을 바라보는 녹안이 서서히 추억에 잠겼다.
[머나먼 옛날…. 내가 아직 뿌리조차 깊게 뻗지 못한 시절의 이야기지. 이젠 흐릿한 기억이네만, 이따금씩 그리워지기도 하네.]
“오케아노스와 친구 사이였던 건가요?”
[나는 여태껏 친우라고 생각하지만, 아마 그는 부정할 게야. 항상 마음대로 안 되면 내 영역에 바닷물을 뿌리겠다고 했었지. 지금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오는구나.]
소금기 가득한 물을 녹지에 뿌린다니… 거의 독살 아닌가. 하지만 히페리온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오케아노스와 서로 장난을 칠만큼 밀접한 사이였나 보다.
“티격태격하셨나 봐요.”
[그럴 수밖에 없었지. 서로 그분께 잘 보이고 싶었으니….]
“그분이요?”
아득한 세월을 산 히페리온이 존칭을 쓸 마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세상에 불을 밝힌 금빛의 마물 말이네.]
히페리온도 오케아노스처럼 ‘그 마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죄를 저지른 인간으로선 그 마물이 언급될 때마다 말을 삼갈 수밖에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자 히페리온이 넌지시 말했다.
[인간들도 그분을 알고 있나 보구나.]
“그럼요. 그 마물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요.”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이야기인 건국 신화에 등장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마을 광장에서 보았던 연극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회상에 잠긴 사이, 히페리온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실은 그와 관련해서 걱정이 있네.]
“뭔데요?”
[그분의 소식이 끊긴 지 꽤 되어 가네. 물론 나도 그분께서 짐을 내려놓고 쉬길 바라지만, 오래도록 숲에 들러 주시지 않으니 내심… 뵙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구나.]
진심이 느껴지는 깊은 한숨에 저절로 심장이 따끔거렸다. 히페리온은 아직도 그 마물이 유피테르의 손에 뿔이 잘려 죽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그저 소식이 끊긴 그 마물이 속세에서 벗어나 쉬고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입술이 몇 번이나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끝내 기회를 찾지 못해 마른침만 삼켜 넘겼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남은 희망의 촛불을 꺼 버릴 용기가 아직 내겐 없었다.
속내를 모르는 히페리온은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안색을 살폈다.
[기운이 영 없구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 저 아이 때문이라면, 걱정 말거라. 무사히 짧은 생을 끝내고 가족에게 돌아갈 때까지 내가 지켜 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고개를 툭 떨구니 히페리온이 부드럽게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다정함을 저버린 느낌이 들어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요한 바람이 죄책감을 건드리고 지나가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털에 나뭇잎을 잔뜩 묻힌 누르가 달려왔다. 내가 아닌 히페리온의 앞에 멈춰선 누르는 혀를 내밀며 말했다.
[할아버지! 이리 와 보세요!]
[…응? 나 말이니?]
[네!! 저기 엄청 예쁜 꽃이 있어요!]
사뭇 당황한 히페리온에게 어서 가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히페리온은 귀여운 손주에게 이끌려 가는 할아버지처럼 어설프게 따라나섰다. 서서히 수풀 너머로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행복은 한철에 피고 지는 꽃처럼 찰나에 사라졌다.
[이젠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나무 그늘 아래서 들려오는 미성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또 무슨 일이에요. 오케아노스.”
[네가 보고 듣는 걸 전부 공유하는 내게 너무 까칠한 것 아닌가.]
어느새 오케아노스는 치자 꽃나무 곁에 앉아 있었다. 제멋대로 나타나고 꼭 필요할 때 사라지는 그가 밉기만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비아냥대듯 말했다.
“오랜만에 히페리온과 인사하시지 그래요. 많이 그리워하시던데.”
[후후, 너도 알잖나. 그의 눈엔 내가 보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창백한 손으로 이파리를 어루만지는 그에겐 그림자가 없었다. 마안을 가진 누르에게도 보이지 않으니 이로써 확실해졌다. 형체가 없는 그는 오케아노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부이자, 내 안에서 불필요한 감정과 기억까지 전부 흡수한 찌꺼기였다. 남이 숨겨 둔 심연을 함부로 들여다보고도 생글생글 웃는 낯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왜 오신 거예요?”
[내 친히 널 위해 충고를 해 주마.]
거부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한 발 앞으로 다가온 오케아노스는 누르가 달려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어린 마물이 어째서 혼자가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밀렵꾼에게 무리가 몰살당했기 때문이죠.”
[그래. 인간이야.]
인간. 그 짧은 단어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귓속을 찔렀다. 얇은 베일로 가려진 물빛 눈동자엔 얼핏 붉은 광기가 서렸다.
[과연 저 아이만 인간에게 당했을까? 네가 모르는 사건들이… 네가 자는 사이에, 네가 행복한 사이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을까. 아마 지금도 몇몇 마물들은 인간이 놓은 덫에 물려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른단다.]
“…그래서 죄책감을 가지라는 건가요?”
죄책감이라면 늘 무력감과 함께 끌어안고 있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오케아노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바로 그게 문제야.]
기다란 손가락이 내 가슴을 툭 건드렸다.
[그걸 왜 네가 책임지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아무도 네 행적을 신경 쓰지 않아. 아무도 네 수고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상관없어요.”
[그 갸륵한 마음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잔뜩 날을 세우고 쳐다보자 오케아노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였다.
[안타깝구나. 네가 이렇게 노력하는 동안 정작 그치는 손 놓고 있으니.]
“누굴 말하는 거죠…?”
[그분을 죽인, 추악한 유피테르의 후손 말이야.]
오케아노스가 손을 펼치자 허공에 물로 만들어진 독수리가 나타났다. 명실상부한 대륙의 주인, 에브게니아 황실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먹잇감을 찾으려 창공을 비행하는 독수리는 퍽 늠름한 자태를 뽐냈다.
오케아노스는 화려한 날개를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본디 일국의 왕이라는 자는 폭풍우를 일으켜서라도 백성을 위해 영역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의 주인은 이 지경이 되도록 도통 소식이 없구나.]
“제국이 워낙 넓으니까요. 제가 알 수 없는 고충도 있겠죠. 게다가 비브린트 숲 사건은 즉시 황실에 전달했어요. 오케아노스 해안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래서.]
노골적인 조소가 말허리를 잘랐다.
[뭐가 달라지긴 했나?]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던 입술이 우뚝 멈췄다. 오케아노스의 말 그대로였다.
매번 사건이 끝나면 황실에 서신을 보냈지만, 지금껏 명확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은 모두 함구된다. 진물이 나오면 치료를 해야 하는데, 곪아 터진 상처를 그저 숨기기 급급하다. 심지어 아스레인마저 토를 달지 않으니 나는 더욱 발언권을 잃어 간다.
제국에선 황명이 곧 법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예전에 세잔은 황제는 공식 석상 말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사건을 덮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누가 침몰하는 배를 보고도 손을 놓고 있단 말인가.
[그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야 너도 많은 걸 깨달은 것 같구나.]
“…….”
[아, 그렇지. 깨달은 게 아니라 애써 부정하던 사실을 자각한 것뿐이구나.]
오케아노스가 손짓하니 하늘을 가로지르던 독수리가 갑자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끝내 제왕이라 불리던 독수리는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른 낙엽 위에서 허무한 날갯짓만 하던 독수리는 수증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태오. 세상에 완전한 진실은 없단다. 누군가는 속고 있고, 또 누군가는 속는 걸 알면서도 당하고 있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오케아노스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속삭였다.
[그러니 정녕 네 것을 지키고 싶다면, 끊임없이 의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