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누르와 함께 쿠네 숲으로 가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쿠네 숲까지 마차를 타는 방법이 가장 간단하지만, 누르가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해 방법을 바꿨다. 그건 바로 이동 마법이었다.
이동 마법은 원체 어마어마한 마력을 잡아먹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히페리온을 옮길 때는 마력을 머금은 필리스 줄기를 사용하여 부담을 줄였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마석의 도움 없이 쿠네 숲으로 향하는 이동 마법을 완성했다. 이 견고한 마법진에 일정한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첫 블록을 쓰러뜨린 도미노처럼 이동 마법이 시전될 것이다.
목적지는 쿠네 숲. 혹시 길을 잃어도 필리스로 만든 팔찌가 히페리온에게로 이끌어 줄 것이다. 문제는 시전자의 부재였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려 아스레인이 먼저 쿠네 숲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걸로 빚은 전부 갚은 거다.”
“고마워요. 아이리스. 그리고 세잔도요.”
“이 정도쯤은 거뜬합니다.”
사정을 들은 세잔은 당연히 돕겠다며 나섰고, 아이리스는 귀찮다고 하면서도 약속 장소로 나와 주었다. 그들을 데리고 아스레인이 마법진을 그려 둔 온실 뒤 공터로 향했다. 우거진 수풀을 지나 깊숙하게 들어가니 아이리스가 투덜거렸다.
“대체 어디에 마법진을 처박아 놓은 거냐?”
“학교 허락 없이 몰래 진행하는 거거든요. 두 분도 꼭 비밀 지켜 줘요.”
검지를 입가에 대며 싱긋 웃자 상반된 반응이 튀어나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밀 좋아하시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잔과 달리 아이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말을 마친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성격이 전혀 다른 서로를 신기하게 여기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윽고 인적이 드문 공터에 도착했다. 마법진을 가리기 위해 덮어 둔 마른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워 냈다. 그러자 거친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려진 마법진이 드러났다. 연신 퉁명스럽던 아이리스는 복잡하게 얽힌 마법진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야. 이게 전부 마법진이야?”
“역시 …이동 마법진이군요.”
세잔은 곧바로 마법진 근처에 자리를 잡곤 섬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들은 마치 내가 처음 오파러스를 봤을 때처럼 넋을 놓고 마법진에 매료되었다. 결국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두 분이 보기에도 대단해요?”
“물론입니다. 보통은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테두리를 따라 추가적으로 기도문을 적어 놓습니다. 하지만 이 마법진엔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만큼 마력에 자신이 있다는 거죠. …역시 아스레인 교수님입니다.”
세잔은 마법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리스 또한 마법진 주변을 돌아다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 쌍의 눈동자는 마치 처음 장난감 코너에 간 아이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 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법진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설계를 보면 아마도 이쯤에….”
“그렇군요. 그럼 어느 정도 마력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은 학회를 방불케 했다. 얼마 이따가 확신에 찬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잔에게 말했다.
“반드시 될 거예요.”
마법진을 응시하는 회색 눈동자가 유독 총명하게 빛났다. 이런 인재가 지금껏 권력이란 그림자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전히 마법진 분석에 푹 빠진 아이리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역시 아이리스는 대단해요. 전 교수님께서 마법에 대해 설명할 때 전혀 이해 못했거든요.”
“뭘 또 추켜세우냐. 이건 술식이 대단한 거지, 난 한 것도 없어.”
아이리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자 세잔까지 합세했다.
“아닙니다. 태오의 말대로 대단한 분이시군요. 마법진을 보자마자 해석할 수 있는 건 배경지식이 받쳐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분이 마물학과에 계실 줄은….”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아이리스는 애써 쑥스러운 기색을 감췄다. 칭찬이 익숙하지 않아 뺨을 긁적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젠 쓰지도 못하는데, 뭐.”
공허한 눈동자엔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얼핏 서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자 아이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아이리스.”
“그래서 네가 데려가려는 마물은 어디 있는데?”
“…제가 금방 데려올게요.”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젠 주인공만 데려오면 된다. 마법진을 세잔과 아이리스에게 맡겨 두고 온실로 향했다. 인기척을 느낀 누르는 둥그런 귀를 쫑긋거렸으나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바위처럼 말린 등에선 단단히 토라진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번 영역에 들어오지 말란 경고 때문에 먼발치에서 이름을 불렀다.
“누르야.”
예상대로 누르는 알은체도 안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살랑거리는 꼬리를 봐선 아직 완전히 미움을 산 건 아니었다. 부디 진심이 닿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생각이 짧은 내 잘못이야. 네게 필요한 건 물질적인 게 아니었는데…. 무신경한 말 때문에 상처를 줘서 미안해. 많이 반성했어.”
천천히 몸을 낮추며 여전히 반응이 없는 뒤통수를 향해 물었다.
“정말 나… 안 볼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을 쓸던 꼬리가 우뚝 멈췄다. 휙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도끼눈조차도 귀엽게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게 기쁜 나머지 해맑게 웃으니 누르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왜 왔어?]
“물론 사과하려고 왔지. 그리고 네가 날 용서해 준다면, 꼭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디?]
“전에 말한 쿠네 숲을 네게 보여 주고 싶어. 나랑 같이 놀러 가자.”
잠시 생기를 되찾았던 눈동자가 다시금 힘없이 바닥을 향했다.
[역시 그곳에 날 두고 오려는 거지.]
“이상한 오해하지 마. 쿠네 숲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속 여기 있어도 돼. 성장한 후에도 넓게 쓸 수 있도록 온실 안에 장소를 마련해 볼게.”
[…정말이야?]
“당연하지. 나는 단지 소중한 네 세계를 넓혀 주고 싶은 것뿐이야.”
진위를 확인하려 나를 흘끔 올려다본 누르는 이내 흥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그냥 놀러 가는 거라면, 특별히 어울려 줄게.]
“…!! 다행이다. 거기 바람이 엄청 시원하거든.”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마음을 열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연구원의 시선을 피해 누르와 함께 온실에서 빠져나왔다. 세잔과 아이리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법진 위로 올라와 눈을 감았다. 줄곧 당당해 보였던 누르는 내심 겁을 먹었는지, 내 다리에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날 믿고 따라와 준 덕분에 수월하게 히페리온의 팔찌가 발하는 빛을 따라 출구에 다다랐다.
“으음….”
한 번 경험해 본 덕분에 전과 달리 의식을 잃지 않고 무사히 쿠네 숲에 도착했다. 이동 마법 후유증으로 약간 멀미가 나는 것만 제외하면 괜찮았다. 종아리에 딱 달라붙어 있는 누르의 상태를 확인하려는데, 산들바람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다행히 그놈…. 아니, 그 학생이 마법을 제대로 읽었나 보군.”
“교수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나무 그늘 아래서 팔짱을 끼고 있던 아스레인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한달음에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발목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니 발목을 바짝 감은 꼬리가 보였다.
갑자기 낯선 환경이 펼쳐져서 그런가. 잔뜩 움츠러든 누르는 내 다리 뒤에 숨어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왜 그래. 괜찮아?”
누르는 아무 말없이 내 다리 사이로 아스레인을 흘겨보았다. 선뜻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걸 보면 겁먹은 것 같은데, 뚫어지게 아스레인만 올려다보는 시선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마치 아멜리 백작가에서 선망하는 아스레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반응과 비슷했다. 누구 앞에서든 기세등등하던 누르가 귀까지 바짝 내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스레인도 누르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히페리온을 만나겠다고 했던가.”
“아, 네. 히페리온이라면 누르를 기꺼이 반겨 줄 거예요.”
오랜만에 히페리온을 만날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다. 당연히 아스레인도 함께 갈 줄 알았건만, 그는 나무 그늘 아래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같이 안 가시는 거예요?”
“난 괜찮으니 둘이 느긋하게 다녀오게나.”
직접 히페리온의 상태를 보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아스레인이 마법진 곁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쉬운 대로 누르와 단둘이서만 쿠네 숲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나무와 풀로 우거져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웠으나, 이정표가 있어 다행이었다. 청량하고 맑은 기운이 짙어질수록 주인의 마력을 알아본 팔찌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스 줄기가 여름날 햇빛을 머금은 나뭇잎처럼 진한 청록색을 띠었다. 히페리온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 재잘거리는 속삭임과 함께 수풀이 소란스럽게 흔들렸다.
[침입자?]
[아냐.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리니 나뭇가지에 앉은 나뭇잎 나비가 보였다. 역시 히페리온의 씨앗이었다. 나와 누르를 두고 수군거리는 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어라? 저번에 우리를 부른 인간이잖아.]
[그러네. 태오였던가?]
[맞아. 어르신의 하인!]
마지막 말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뭐.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나뭇잎 나비 떼는 곧바로 경계를 풀고 가까이 날아왔다. 검지 끝에 내려앉은 씨앗을 향해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히페리온은 잘 있어?”
[응! 깨어나실 때마다 치자 꽃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셔.]
[이렇게 추운 날 피어날 리가 없는데도 말이야.]
[이상하지? 영원을 사시는 분께서 겨우 꽃이 피어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게.]
생각지 못한 소식에 순간 울컥해 버렸다. 숲에 사는 그들에겐 고작 꽃 한 송이일지 몰라도, 히페리온과 내게 치자 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새하얀 꽃이 만발하는 그날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었다. 고맙게도 히페리온은 그날 나눈 약속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홀로 감동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씨앗들의 관심사는 누르로 옮겨갔다.
[그런데 얜 뭐야?]
[귀엽다.]
[떡잎이네~]
순식간에 씨앗에게 둘러싸인 누르는 제자리에 굳었다. 곁눈질로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어쩔 수 없이 누르 앞으로 끼어들었다.
“너희 말대로 아직 어린아이야. 쿠네 숲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 주려고 왔어.”
[와아, 잘 왔어. 새로 쿠네 숲의 주민이 되려는 거야?]
“그건 아직 몰라. 나중에 누르가 정할 거거든.”
[난 환영이야! 하지만 그 전에 어르신의 허락을 받아야지.]
참새처럼 쪼르르 날아가는 씨앗을 따라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저 멀리 숲의 수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나무가 합쳐져 하나가 된 반얀트리 같은 형태는 다시 봐도 압도적이었다.
숲의 주민을 보호하려 뻗어 나간 나뭇가지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저 왔어요.”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듯 기다란 나뭇가지가 일제히 움직였다. 솨아아-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릴 즈음, 애처로운 탄성이 들려왔다.
[아아, 이 목소리는….]
봄날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벚꽃처럼 씨앗들은 나무 기둥을 둘러싸고 날아다녔다. 꼬리에 꼬리를 문 나뭇잎 행렬은 곧 회오리가 되어 제자리를 맴돌았다. 멍하니 동화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그 순간, 돌풍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바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후, 고요한 숲속에 새소리만 들려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히페리온?”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니 대답 대신 머리 위로 나뭇잎이 떨어졌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자 정장 차림의 중년 신사가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문이 막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정말 당신…이에요?”
숲을 사람의 형태로 빚는다면 그가 되지 않을까. 엷은 노란색과 녹색이 교묘하게 섞인 피부는 햇빛을 듬뿍 머금은 잎사귀를 닮아 있었다. 게다가 잎맥처럼 가느다란 선이 셔츠 칼라 위로 드러난 목에서부터 턱으로 이어졌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은 바닥을 뒤덮은 흙을 연상시키는 진한 갈색이었다.
[그대. 어서 오게나.]
온화한 미소를 따라 그의 눈가에 세월을 담은 나이테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