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68/305)

#68

그 후로도 계속 오케아노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허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내 안에서 생각을 들여다봤다던 오케아노스의 말이 진실이었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어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냐. 아니면, 소설 속 주인공이 사라져 네가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게냐.’

백지가 된 머릿속엔 오로지 싸늘한 목소리만 맴돌았다. 줄곧 잊으려고 눈을 돌렸던 난제를 억지로 마주치게 되어 불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눈앞에 들이닥친 사건을 막기에 급급했으니까.

연구실로 돌아오니 먼저 들어온 아스레인이 말을 걸었다.

“어딜 다녀왔나.”

“온실에 갔었어요. 누르가 식사를 거른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몸에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었어요. 절 보고 꼬리를 흔들어 주기도 했고, 스스로 머리를 비비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유를 말하자니 막막해졌다. 마물 도감에 대해 모르는 아스레인에게 다짜고짜 ‘실은 마물의 목소리가 들려요’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럴싸한 설명으로 둘러댔다.

“왠지 여길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안겔루스 대학 내 온실 말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건강에 큰 이상이 없는 마물은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그걸… 누르가 이해해 줄까요? 버린다고 생각하면 어쩌죠?”

버린다는 단어를 입에 담으니 죄책감에 심장이 따끔거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상처받은 누르의 표정도 떠올라 괴로웠다. 의사소통이 가능해도 진심은 쉽게 닿지 않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지금껏 다른 마물들은 어땠어요?”

“보호소로 들어오는 마물들은 치료를 받아도 끝까지 손을 타지 않았네. 그러니 적합한 서식지로 돌려보낼 때도 큰 어려움은 없었지.”

“역시… 그렇군요. 정을 붙인 게 잘못 일까요?”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네. 사이누르가 자네에게 각별한 감정을 가진 것도 사실이니.”

처음 누르가 눈을 떠서 열매를 받아먹을 때를 기억한다. 신뢰를 쌓아 가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앳된 목소리를 들려 주었을 때도, 가끔 누르가 좋아하는 열매를 사려고 시장을 돌아다니던 때도 전부 선명하다. 그렇게 정이 든 누르를 보내는 건 나로서도 크나큰 고통이었다.

“저도 마음 같아선 온실에서 자주 보고 싶어요. 그래도… 그 아이에겐 더 넓은 자연이 필요해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온실이 아니라 진정한 자연 말이에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잠깐의 침묵 끝에 아스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 심정을 알 것 같군.”

“…예?”

“자네도 언젠가 이 안겔루스 대학을 졸업해 독립할 것 아닌가.”

…잠깐만.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아니, 그보다 나는 대학원생을 끝내고도 계속 아스레인의 제자로 남을 생각이었는데, 아스레인은 벌써부터 내 독립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마 졸업하면 깔끔하게 대학에서 손 털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건가?

왠지 억울해져서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버렸다.

“저… 떠나야 하는 건가요?”

“음?”

“졸업 후에도 계속 교수님의 제자로 남고 싶었는데….”

이런 심정이었구나.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나를 영역에서 내쫓은 누르가 십분 이해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아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 그럼에도 아스레인은 차분하게 말을 돌렸다.

“제국엔 제법 괜찮은 연구실이 많네.”

“여기도 좋은 연구실이죠.”

“뭐, 다른 저명한 교수나 학자도 많고.”

“전 아스레인 교수님 아래서 공부하고 싶은 거예요.”

“그건 차차 생각하면 되네.”

“생각하지 않아도….”

“태오.”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문을 틀어막았다. 흡, 숨을 짧게 들이쉬자 아스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반드시 기억하게.”

오롯이 나를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는 저물어 가는 태양처럼 쓸쓸한 빛을 띠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네.”

속내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따금씩 아스레인은 의도치 않게 누구도 어루만질 수 없는 외로움을 드러내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풍파에 깎이고 깎여 둥그스름해진 돌 같은 그를 보곤 자연스레 할 말을 잃었다.

“사이누르를 향한 배려도 좋지만, 우선은 그의 의사를 최우선해 주는 게 좋지 않겠나. 무리와 가족을 잃은 사이누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자네일지도 모르네.”

“…교수님.”

“찰나에 지나가는 삶이니 하고 싶은 대로 살다 가도록 자네가 이끌어 주게나.”

뒤통수를 세게 한 번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누르가 말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냐고. 그래서 이론대로 대답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누르의 마음이었는데….

“그럼… 혹시 도와주시겠어요?”

“자네와 사이누르를 위한 거라면 기꺼이.”

아스레인은 내게 누르를 데리고 있으라 한 것이 아니라, 이끌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니 누르가 보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누르를 한 번쯤 쿠네 숲에 데려다주고 싶어요. 쿠네 숲이라면 밀렵꾼으로부터도 안심이고, 숲의 수호자인 히페리온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일단 그곳을 보여 주고, 그다음에 누르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에도 누르가 온실을 선택한다면, 그가 지낼 수 있도록 온실 한편을 마련해야겠다. 이제야 올바른 순서를 되찾았다. 아스레인 또한 흔쾌히 내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괜찮은 생각이군. 쿠네 숲이라면, 원래 사이누르 종족이 살던 비브린트 숲과도 비슷하니.”

“감사합니다! 근 시일 내로 준비할게요.”

오랜만에 쿠네 숲으로 가서 히페리온도 만나고, 그에게 누르를 소개시켜 줘야겠다. 둘은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히페리온이라면 무리를 잃은 누르를 위해 기꺼이 쉴만한 그늘을 내어 주겠지. 저절로 입가에 완연한 웃음이 그려졌다.

공간 이동 마법에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금 일을 시작한 아스레인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다.

“저, 하고 싶은 거라 하셔서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말해 보게.”

“교수님은 하고 싶으신 게 뭐예요?”

아스레인이 조용히 눈만 깜빡이다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뭐?”

“마물 연구 빼고요. 지금껏 가장 하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하지 못한 게 있어요?”

완벽해 보이는 아스레인도 포기한 것이 있을까.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바쁜 나머지 일상을 되찾고 싶다고 말해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갈 가벼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사뭇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오랫동안 방황하던 시선이 멈춘 곳은 겨울이 찾아온 창밖이었다.

“쉬고 싶군.”

“네?”

“마음 편히…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고 싶네.”

생각보다 단순한 소망에 이번엔 내가 당혹스러웠다. 역시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다. 오케아노스 답사 때도 내가 문제를 일으켜 새벽 내내 탐색하셨겠지. 여러모로 미안한 기분이 들어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오늘 연구실은 이대로 문 닫을까요?”

이상한 소릴 해도 끄떡없던 아스레인이 웬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니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붙었다. 보고서를 쓰려고 둔 종이에 ‘오늘은 쉽니다.’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었다. 마치 휴점하는 식당처럼 문 앞에 붙이고 연구실을 잠갔다.

그 후, 말수를 급격히 잃은 아스레인 앞에 다가가 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급한 서신이나 손님은 제가 받을게요. 그러니 교수님은 푹 쉬세요.”

“지금… 여기서 잠이라도 자라는 건가?”

“그럼 좋죠! 안 그래도 잠은 주무시면서 일하시는 건가 걱정이었거든요.”

말 바꾸기 전에 냉큼 긴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곧바로 소파를 눕기 좋게 테이블에서 살짝 떼어 놓고 정중히 안내했다. 집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아스레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말 누우라는 건가.”

“네. 나름 폭신폭신해서 좋아요.”

“벨 것도 없는데.”

“아…. 그러네요.”

하필이면 팔걸이가 쓸데없이 높아서 머리를 눕히긴 힘들어 보였다. 예전 연구실에서 쪽잠 잘 때 책 세 권 겹쳐서 베고 잔 적은 있지만, 차마 아스레인에게 책 베개를 권할 수는 없었다. 우왕좌왕하며 쿠션 대용품을 찾는 내내 차분한 눈동자가 내 뒤를 좇았다.

“먼저 권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당황한 모습이 제법 흥미롭군.”

“하하, 그러게요….”

열심히 연구실을 돌아다니는 그때 아스레인이 넌지시 나를 불렀다.

“태오.”

“네?”

칼같이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코트를 벗고 셔츠 차림이 된 아스레인이 보였다. 소파에 앉은 아스레인은 소파 끄트머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찌 무릎이라도 빌려주겠나.”

“…예?”

“머리를 편히 눕힐 만한 것은 그뿐인 듯 보이네만.”

말 한마디에 뇌의 활동이 정지했다. 연구실 가운데 우뚝 선 채로 굳어 나무가 되어 버렸다. 지금 무릎이라고 했어? 무릎?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제… 무릎이요?”

“그래.”

무려 아스레인이 내 다리를 베고 눕겠다고 말했다. 솜으로 꽉꽉 찬 쿠션을 줘도 죄송할 판국에 근육도 지방도 없는 이 초라한 다리를 베고 잔다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다 못해 머리카락까지 삐죽 서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말을 더듬은 끝에 힘겹게 문장 하나를 완성했다.

“그, 그… 하나도 안 푹신하고 딱딱할 텐데요….”

내빼는 척하면서도 걸음은 본능적으로 소파를 향했다. 당장 심장이 멈추는 한이 있어도, 아스레인의 자는 얼굴을 1열에서 볼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소파 팔걸이에 딱 붙어 앉아서 군기가 바짝 든 병사처럼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은 그러면서 순순히 앉는 저의가 뭔가.”

“편하게 쉬셨으면 하니까요….”

흘끔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모아 어깨 앞으로 내렸다. 진짜… 눕는 거야? 등을 돌린 아스레인과 긴장감에 딱딱해진 허벅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서서히 상체를 눕히는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리게 보였다.

“…….”

그리고 마침내 그의 머리가 내 허벅지 위에 닿았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황갈색 머리카락이 무릎을 간지럽혔다. 헙, 하고 숨을 멈춘 채로 그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스레인은 긴 다리를 뻗을 공간이 없어 산처럼 무릎을 굽힌 데다가 팔짱까지 꼈다. 하지만 평온한 얼굴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건 그에게 다리를 빌려준 나였다.

언제 어떻게 숨을 내쉬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베개가 숨을 쉬어도 되는 걸까? 내 손은 어디에 두면 좋지. 그래. 헛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을 틀어막는 게 좋겠다. 두 손을 겹쳐 입술을 꾹 누르니 오히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오랜만에 주기율표를 외워 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해 보려 아스레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상당히 불편하네.”

“헉, 그럼 역시….”

무릎 보단 책 베개가 훨씬 낫겠다. 처음부터 제안을 한 내가 글러 먹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두 다리를 꾸물거렸지만, 정작 불편하다고 말한 장본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게.”

정말 이대로 잠을 잘 작정인지, 이윽고 평온한 숨소리가 연구실 안을 채웠다. 그사이 나는 죽을 맛을 봤다. 숨을 잘못 쉬었다간 세차게 뛰는 심장을 그대로 뱉어 낼 것만 같았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갈수록 얼굴과 귓가로 열이 쏠렸다.

단지 쉬라고 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경주마처럼 앞에만 고정된 눈길을 돌려 조심스레 아스레인을 내려다보았다. 뒤척이다가 편한 자세를 찾은 건지, 아니면 불편하게 자는 걸 좋아하는 건지… 아스레인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마음 놓고 얼굴이나 구경할까 싶던 차였다.

“…아.”

하필이면 창밖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와 아스레인의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가을엔 우거진 나무가 어느 정도 햇볕을 가려 줬는데, 이젠 완연한 겨울이라 앙상한 나뭇가지론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왼손을 들어 얼굴 위로 자그마한 가림막을 만들어 주었다. 팔이 아프더라도 될 수 있는 한 오래 가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심은 곧 무산이 되었다.

“……?”

잠이 든 줄 알았던 아스레인이 팔짱 낀 손을 들어 내 손목을 턱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몸이 덜컥 흔들렸다. 그럼에도 아스레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끌어당겨 얼굴 위에 살포시 얹어 두었다.

어느새 내 손은 그의 눈가를 덮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손바닥엔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머릿속은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아스레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팔짱을 꼈다.

“…저….”

슬그머니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저 고요한 숨소리와 거친 심장 소리가 불협화음을 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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