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67/305)

#67

오케아노스 해안 답사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사히’란 단어를 쓸 수 없겠지만, 공식 보고에는 언제나 그렇듯 사고와 관련된 내용은 쏙 빠져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황실의 귀에 오케아노스와 페르가몬 백작이 나눈 협상 내용이 들어가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맑은 하늘을 등지고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록이었다. 폭풍우에 휩쓸린 오필리아가 어쩌다 안겔루스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자니 한 페이지를 거뜬히 채웠다. 그때부터 펜촉을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도시의 안녕을 위해 영역을 침범한 인간, 그로부터 영역을 지키기 위해 폭풍우를 일으킨 마물.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투쟁이 길게 이어지며 양 진영에선 끊임없이 피해자가 속출했다. 그나마 이번 사건은 정도가 심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조용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치기는커녕 고작 양손으로 물이 들어오는 구멍을 막기에 급급한 기분이다. 애초에 마물과 인간의 공생이 가능하긴 할까? 한정된 자원을 뺏고 빼앗겨 승자만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면….

“결국 한쪽만 남아야 하는 거잖아.”

날것 그대로의 생각을 쓰다가 흠칫 굳었다. 두꺼운 종이가 날카로운 펜촉에 짓눌려 찢겨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서 쓴 문장은 온통 부정적인 의견뿐이었다.

뒤늦게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펜촉으로 문장을 죽죽 그었다. 종이 위를 가로지른 선은 그만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바리케이드였다.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당연히 공생을 목표로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깃든 무언가가 뇌를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펜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때 창가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명작을 망치고 그러나.]

밤하늘을 너울거리는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베일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케아노스….”

이름을 부르니 베일 아래로 드러난 입꼬리가 싱긋 올라갔다.

[처음으로 네 진심이 표현됐는데, 아깝지 않느냐.]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볕 아래 오케아노스는 순결한 천사상 같은 자태였다. 페르가몬 저택에서 보호소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아스레인 옆에 앉은 그를 보았다. 단순히 환상이라고 치부했건만, 말까지 걸어오니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 계신 거죠?”

[그렇군. 원래대로라면 ‘일부’에 불과한 짐은…. 아니. 나는 이미 네게 흡수되었어야 했는데, 어째선지 점점 분리되고 있구나.]

오케아노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술식이 잘못된 건가.]

이유를 고민하는 그의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변덕스러울지라도 오케아노스는 일국의 왕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연구실에 나타난 오케아노스는 묘하게 가벼운 분위기를 풍겼다. 같은 외형을 가졌는데도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니 이상한 일이었다.

지긋한 시선을 느낀 오케아노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괜찮아. 그 덕분에 꽤 재밌는 걸 봤으니.]

사뿐사뿐 다가온 오케아노스는 반걸음 앞에 멈춰 섰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가 불안하기만 했다. 이윽고 온기 없는 검지 끝이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이 안에 제법 흥미로운 욕망들이 넘치더구나.]

감정의 동요를 숨기고 싶어도 솔직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감출 순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케아노스는 대답은 않고 대뜸 두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숨을 빼앗을 듯 입을 벌렸다. 그날, 꿈에서 보았던 수십 개의 눈을 가진 고래처럼 나를 삼킬 작정으로 보였다.

꼼짝없이 잡아먹힌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태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곧장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진과 눈이 마주쳤다. 진은 날이 선 시선에 놀랐는지 당황한 채로 문틀에 서 있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어서요….”

그 사이 오케아노스는 모습을 감췄다. 진에게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오케아노스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여 저절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메마른 입술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잠깐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나 봐요.”

“바,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이따가 다시 올게요.”

어색하게 웃으며 떠나려고 하는 진에게 황급히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환한 미소를 지어도 진은 연신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그럼요. …왜요?”

“하하, 아뇨. 분위기 때문에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것도 오케아노스의 영향인가. 썩 달갑지 않은 변화였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대신 닫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전에 비브린트 숲에서 데려온 사이누르 말이에요.”

“누르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큰일이라고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던 진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잠깐 약초밭에 갔다가 들었는데, 사이누르가 요 며칠째 식사를 안 한대요.”

“예? 어디 아픈 거예요?”

“아뇨. 혹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진찰도 해 봤지만, 몸엔 아무 문제가 없대요. 마력의 흐름도 그렇고요. 그래서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건강 문제가 아니니 다행이긴 하다만, 끼니를 거른다면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전해 줘서 고마워요. 바로 가 볼게요.”

“별일 아닐 거예요.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진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누르가 비브린트 숲을 떠난 지도 꽤 됐다. 자연의 품이 그리울 수도 있단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무리 온실이 숲을 재연해 놨다고 할지언정 누르는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벌써 그 시간이 다가온 걸지도 모른다.

진이 떠난 후, 보고서를 구겨 서랍에 넣어 놓고 곧바로 온실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지나자 몸을 동그랗게 말아 누운 누르가 보였다. 전보다 훨씬 커진 누르는 이제 어엿한 마물의 형태였다.

수풀을 바스락거리며 다가가자 누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인사 대신 언제나 그랬듯 손을 내밀었다. 왜 이제 왔냐며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누르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의아해하며 가까이 다가가니 누르는 급기야 뾰족한 이빨을 드러냈다. 의심할 여지없이 적을 대하는 태도였다. 잠깐 안 왔다고 벌써 나를 잊은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불렀다.

“누, 누르야…?”

다행히 목소리를 들려주니 경계심 가득하던 눈동자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이내 새까만 코를 움직여 냄새를 맡은 누르는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뭐야. 너였어?]

“무슨 소리야. …너 설마 나를 못 알아본 거야?”

[당연하지. 낯선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왔는데 어떻게 알아보겠냐?]

뒤늦게 누르의 마안은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본단 사실이 떠올랐다. 반갑게 흔들리던 꼬리는 이내 퉁명한 기분을 드러내듯 바닥을 마구 내리쳤다.

[또 그 짧은 사이에 뭔가 했구나.]

“아하하… 역시 네 눈은 못 속이는구나.”

[무슨 짓을 한 거야?]

“으음, 여러 사정이 있었어.”

뺨을 긁적이며 뭉뚱그려 말하니 누르가 털을 바짝 세웠다.

[야!!]

“어, 어?”

[제발 조심 좀 해. 내가 경고했지. 네 본질은 흐리디흐려서 물들기 십상이라고.]

“아이, 알겠어. 조심할게.”

누르의 상태를 걱정하러 왔다가 오히려 내가 혼나 버렸다. 그래도 평소대로 빼액 올라가는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앞에 쪼그려 앉아 복슬복슬한 회색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 누르에게 진심을 슬그머니 떠보았다.

“그보다 식사는 왜 안 하는 거야. 열매가 마음에 안 들어?”

누르는 고개를 돌리며 콧바람을 훅, 불었다.

[…하기 싫어서.]

“어?”

[성장하기 싫어서 그런다. 왜?]

“어째서? 얼른 커서 자연으로 돌아가야지.”

많이 크긴 했다만, 누르는 아직 도감에 나온 사이즈에 비해선 작았다. 나중에 다 크면 얼마나 멋진 모습을 보여 줄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그러나 누르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게 싫은 거야. 지금보다 커지면 더 이상 여기 살 수 없잖아.]

뒷말을 듣자마자 반박하려던 생각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누르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식사를 거부하는 거였다. 하지만 상태가 건강한 마물이 언제까지고 보호소에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아파도 그게 원칙이었다.

“…그래도 숲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아?”

[돌아가? 어디로. …내가 태어난 숲으로? 거기에 뭐가 남아 있는데.]

“…누르야….”

[너도 봤잖아. 그곳에 뭐가 있는지…. 내가 뭘 두고 왔는지.]

싸늘한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밀렵꾼이 철수했다고 해도 비브린트 숲은 아직 위험했다. 그러니 아드 쿠네가 열렸던 숲이나 황실이 지정한 보호 구역으로 가는 쪽이 좋았다. 하지만 보호소의 원칙을 알 리 없는 누르는 오해를 점점 키워 갔다.

[이제 날 버리려는 거야?]

“그게 무슨…! 내가 널 왜 버려.”

[그게 아니면 뭔데? 너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줄 알았어.]

“당연히 같이 있고 싶지. …하지만 건강한 마물이라면 마땅히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해. 그게 보호소의 원칙이야.”

[내가 인간이 만든 원칙을 왜 지켜야 하는데?]

무언가를 말하려 벌어졌던 입술은 무의미한 숨만 내쉬고 닫혔다. 숲에서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진 누르를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사히 자연에 적응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정을 떼야 한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내 손으로 들어 올린 그 생명의 무게를 기억한다.

“그건….”

멍하니 빈손을 들여다보는데, 웬 웃음소리가 맥락을 끊었다.

[갑자기 정곡이 찔려서 놀랐구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물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항상 누르가 지키던 바위에 오케아노스가 앉아 있었다. 왜 하필 지금…. 인상을 찌푸릴수록 오케아노스의 미소는 짙어졌다.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말거라. 인간이라면 적당히 버릴 줄도 알아야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지금의 네게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 네가 꿈꾸는 이상과 네 능력이란 현실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선뜻 부정할 수 없어 더욱 분한 말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을 피하는데, 갑자기 누르가 앞발로 내 허벅지를 꽉 누르며 물었다.

[너 지금 누구랑 대화하는 거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마안을 가진 누르에게도 오케아노스가 보이지 않는다니…. 그럼 지금 바위에 떡하니 앉아 있는 저 마물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일단은 상황을 수습하는 게 급선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오해하지 마. 절대 널 버리려는 게 아니야. 나는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에 데려다주고 싶어. 비브린트 숲이 아니라, …그래. 전에 쿠네 숲을 갔었는데….”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알고 하는 소리야?]

“풍부한 먹이와 안전한 보금자리잖아? 쿠네 숲이라면, 히페리온도 있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소개해 줄게. 그러니까….”

[하.]

짧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됐어. 너랑 말하고 싶지 않아.]

“누르야.”

[돌아가. 네 걱정거리나 한낱 식사라면, 열매든 뭐든 먹을 테니까….]

누르는 다시금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낮게 울었다.

[당장 내 영역에서 나가.]

어디서부터 잘못 꿰맸는지, 관계란 이름의 뜨개질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얼기설기 엉킨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그대로 온실에서 쫓겨났다. 덩그러니 문 앞에 서서 유리 온실을 바라보는데, 옆에 서 있던 오케아노스가 신경을 살살 긁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너무하는구나.]

“부탁인데, 그만 말씀하시겠어요?”

[후후…. 이제야 제 성질을 드러내는 게냐.]

결국 울컥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오케아노스에게 토해 냈다.

“대체 왜 자꾸 나타나시는 겁니까? 거래는 그때 끝났잖아요.”

[남아 있고 싶어서 붙어 있는 게 아니란다. 네가 ‘소화’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오케아노스’는 네게 일부를 떼어 주었고, 나는 그저 그의 기억이자 너와 그를 잇는 매개일 뿐이다.]

오케아노스의 형상을 한 ‘그’는 마치 오케아노스가 남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래서 오케아노스가 네 육체와 연결을 끊었을 때, 나 또한 사라졌어야 정상이지. 제아무리 술식이 잘못되어도 네 본질에 억눌려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도 난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그의 말마따나 이상한 일이지만, 당장은 오케아노스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현실을 도피하려 눈을 질끈 감곤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당신이 제가 만들어 낸 환상이든, 오케아노스의 잔상이든 상관없어요. 다만 헛된 말로 계속 제 생각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헛된 말? 아직도 내가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 것 같으냐.]

오케아노스는 픽 바람이 새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네 안에서 직접 본 욕망을 전해 주는 것뿐이다.]

“괜한 얘기할 거면 가세요. 누르의 일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말이 안 통하는 오케아노스를 두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나직한 목소리에 발목이 잡혔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냐. 아니면, 소설 속 주인공이 사라져 네가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게냐.]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들추는 말에 뒤늦게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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