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예상보다 긴 시간이 지체되었다.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창가를 거닐던 아스레인은 생각했다. 그나마 옆방에서 고함이 들리지 않아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오케아노스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스레인은 이번 협상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오케아노스가 지배한 육체가 하필이면 태오였으니, 아스레인의 걱정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서쪽으로 기울던 시각, 문 너머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던 아스레인은 곧바로 고갤 돌려 문을 응시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태오. 몸은 좀 어떤가.”
방으로 들어온 태오는 아스레인을 보자마자 눈웃음을 지었다. 창백한 피부와 달리 혈색이 드러난 입술이 퍽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늘 시선이 마주치면 수줍게 웃던 모습과 달라 괴리가 느껴졌다.
그 탓에 아스레인은 곧바로 알아챘다. 저 청년은 자신이 아는 태오가 아니라고.
“왜 아직도 그 몸에 있나.”
“오랜만에 뭍에 나오니 감회가 새로워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같은 목소리인데 나른한 어투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들렸다. 그 사실이 불쾌한 아스레인이 인상을 찌푸리자 태오의 몸을 차지한 오케아노스가 싱긋 웃었다.
“아, 지금은 ‘아스레인’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을까요?”
오케아노스는 마치 나비가 꽃잎 위에 내려앉듯 사뿐한 걸음으로 아스레인 앞에 멈춰 섰다.
“자네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후후… 짓궂으셔라.”
단단한 가슴께에서부터 목선을 따라 얼굴로 닿는 시선이 유혹적이었다. 자잘한 상처가 남은 손이 길게 내려온 황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스레인은 불편한 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면서도, 혹여 태오의 몸에 상처를 입힐까 섣불리 손을 쳐 내지 못했다.
움찔거리는 아스레인의 손을 본 오케아노스는 작게 키득거렸다.
“다시 봐도 놀랍군요. 귀한 당신께서 어찌 인간의 거죽을 쓰고 계신 겁니까.”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그 몸에서 나오게.”
“이자를 돌려받고 싶다면, 우선 제 질문에 대답부터 해 주시지요.”
항상 유순한 곡선을 그리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오케아노스의 수중에 귀중한 육체가 들려 있는 이상, 아스레인은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오케아노스는 그의 주변을 천천히 돌며 말했다.
“전 지금 당신의 모든 언행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린가.”
“어째서 온 세상에 당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지 않는 겁니까? 모든 마물이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날부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는 당신밖에 없는데….”
평온한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아스레인의 앞에 도달한 오케아노스는 다소 격양된 상태였다. 부릅뜬 눈동자가 아스레인을 탓하듯 노려보았다.
“미천한 저를 위해 변명이라도 해 주시지요.”
“아직은 말할 수 없네.”
“아직…이라면, 언제까지 이 연극을 이어 나갈 생각이십니까.”
대놓고 코웃음을 쳤으나 아스레인은 미동도 없었다. 오케아노스는 마치 무대 위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두 팔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말했다.
“새로 태어난 마물에게 축복을 내리던 당신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저 고요한 해안가에서 제게 이 바다를 맡기겠다 말씀하셨죠. 히페리온에겐 숲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치셨고, 헬리오스와 셀레네에겐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황홀경을 경험하듯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순식간에 안광이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세요.”
인상을 찌푸리며 웃으니 순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참 비위도 좋으십니다. 당신의 뿔을 자르고 죽인 종족을 말살해도 시원찮을 판에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 사이에서 인간 행색을 하실 수 있습니까.”
오케아노스가 토해 내는 감정은 명백한 배신감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존재가 살아 있어 기쁘면서도, 지금껏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 않은 아스레인이 미웠다.
정작 아스레인은 제게 쏘아지는 격정적인 감정에서 눈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도 못 느끼겠군.”
노골적인 거절에 거무스름한 눈 밑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설마 오래도록 인간 사이에서 산 나머지, 마물보다 인간이 좋아지기라도 하신 겁니까.”
꾹 다문 입술은 오히려 오케아노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바위처럼 무거운 입을 억지로라도 열게 하기 위해선 목숨을 건 도발이 필요했다.
물론 천지지간 만물 중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존재는 쉽게 아킬레스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자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었으니- 오케아노스는 아스레인의 역린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오케아노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스레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곤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려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인간을 마음에 두기라도 하신 겁니까.”
긴 머리카락 아래 덮인 관자놀이 위로 핏대가 섰다. 아스레인은 당장 밀쳐 내고 싶었으나 그 모습이 태오이기에 겨우 화를 억눌렀다. 찰나의 순간 금안에 서린 동요를 눈치챈 오케아노스는 이를 역으로 이용했다.
“어쩜, 그때도 지금도 한낱 정에 이끌려 실수를 하시는군요. 아쉬울 게 없는 당신께서….”
오케아노스는 손을 천천히 내려 아스레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것도 모자라 마치 오랜 연인을 대하듯 단단한 가슴에 뺨을 대며 웃었다.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방 안에 살벌하게 울렸다. 짓궂은 미소를 흘린 오케아노스는 아스레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도 좋으시거든 억지로 취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비록 어엿한 사내의 몸이지만, 의지를 잃은 지금이라면 저항할 힘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스레인의 인내심은 다 타 버리고 재가 되었다. 끝내 아스레인은 허황된 말을 지껄이는 가녀린 목을 바짝 쥐었다. 오케아노스가 뒤늦게 벗어나려 상체를 틀었지만 하등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다. 목울대를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오케아노스를 향한 살기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말을 삼가게. 자네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자가 아닐세.”
오케아노스는 인간을 지키려는 아스레인의 태도에 사뭇 당황하며 말했다.
“농이 많이 느셨군요. 설마 당신께서 이럴 리 없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그만.”
단호한 목소리가 오케아노스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만 흔적도 없이 나가 다신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게. 이자의 몸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 순간, 오케아노스란 이름을 가진 바다는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
오케아노스를 향한 아스레인의 눈동자는 태양의 표면에서 피어오르는 홍염처럼 위험한 빛을 띠었다. 목을 붙잡은 손이 떨어지자마자 오케아노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충분히 거리를 둔 후에야 멈췄던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오케아노스는 여전히 감촉이 남아있는 목울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떻게 당신께서 살아 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저희에겐 오직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니까요.”
“…….”
“그러니 존귀한 계획이 끝나시거든 이 오케아노스를 불러 주십시오. 인간들은 감히 알지 못하는 해저에서 오직 당신만을 위한 군대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오케아노스는 한쪽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뒤로 빼며 왕국식 인사를 했다.
“저희에게 온전한 복수의 기회를….”
이윽고 굽은 등 위로 물보라가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몸이 고꾸라졌다. 아스레인은 황급히 가냘픈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품에 기대도록 끌어당겼다. 의식을 잃어 쓰러진 태오의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스레인은 본능적으로 태오를 끌어안으며 넌지시 대답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베제프는 축 늘어진 태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오라는 자는 괜찮은 겁니까?”
“…단지 기절한 것뿐이네.”
아스레인은 태오의 팔을 유리 공예품을 대하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불과 몇 분 전 목을 틀어쥐었던 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제야 안심한 베제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버지께서도 곧 건강을 되찾으실 겁니다. 그래서 이번 사안에 대한 보답은 어찌해야 할지….”
“감사는 내 제자에게 전해 주도록 하지.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든 건 전적으로 태오의 의사였으니.”
“아, 그럼 이자를 따로 불러서 대접하도록….”
“아니. 됐네.”
신이 나서 혼자 주절거리는 말을 멈춘 건 단호한 손짓이었다.
“다신 얼굴을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가늘게 뜬 눈엔 완연한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아스레인에 베제프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아스레인은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와 백작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오케아노스 바다를 조사한 이유는 황실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네.”
“그, 그게 무슨….”
“하지만 이번 일은 비밀로 부치겠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건 피차일반이니 서로 함구하도록 하지.”
황실이란 단어에 베제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학생까지 전부 대동했기에 단순 연구차 방문한 것이라 단정 지은 잘못이었다. 갑작스레 진실을 마주한 베제프는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스레인은 짧게 혀를 찼다.
“알겠나? 페르가몬 가문과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이 어찌 되든 나와는 하등 상관없네. 처음부터 화를 자초한 건 자네이니, 앞으로도 알아서 일을 처리해 주길 바라네.”
통보에 가까운 말을 마친 아스레인은 허리를 숙여 태오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베제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그만 길을 비켜 주게.”
***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각양각색의 산호와 처음 보는 수생 마물들이 인사하듯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숨이 모자랄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하게 돌아다니다가 저 멀리서 새하얀 바위를 발견했다. 치명적인 독이라도 뿜는지, 그 주변엔 어떤 생물도 다가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거대한 바위 앞에 다다랐다. 가까이서 보니 바위 표면엔 손만 한 가로줄이 듬성듬성 찍혀 있었다. 게다가 벼락 모양처럼 갈라진 틈새로 새빨간 해조류가 자라고 있었다. 호기심에 손을 뻗었다가 손끝이 닿기 직전 우뚝 멈춰 섰다.
바위가 눈을 떴다. 아니, 바위만 한 고래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스크래치인 줄 알았던 가로줄들은 전부 눈이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새도 수십 개가 넘는 시선이 나만을 향했다. 순백의 고래가 내뿜는 위압감에 손을 뻗은 채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를 탐색하듯 바삐 돌아다니던 눈동자가 멈췄다. 일 초, 이 초…. 시간은 흐르는데 마치 이 공간만 세월이 멈춘 것 같았다. 그래서 고래가 서서히 입을 벌리는데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거대한 입속으로 들어간 그때였다.
“헉…!”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번쩍 떴다. 몸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고,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덮고 있던 코트가 스르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비몽사몽한 눈을 손등으로 벅벅 비비며 버릇처럼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교수님?”
“잘 잤나.”
낮은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지럽혔다. 다행이다. 아스레인이 곁에 있었다.
“여기 어디예요?”
“일이 무사히 끝나 보호소로 돌아가는 길이지.”
“아…. 잘 끝났나요? 오케아노스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요?”
꼬박꼬박 대답해주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왠지 불안해져서 코트를 꽉 쥐며 눈치를 살폈다.
“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흐릿한 눈으로 어렴풋이 아스레인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고 싶어 아무리 눈을 끔뻑여도 뿌연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괜찮네. 자네가 걱정할 일은 없었으니.”
그럼 다행이지만… 어째서 그의 목소리에 씁쓸한 감정이 묻어나는 걸까.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지친 몸이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옹알이 같은 말을 웅얼거리자 아스레인은 가볍게 웃으며 내 이마를 눌렀다.
“그러니… 좀 더 눈을 붙이게.”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우니 다시금 잠이 몰려왔다. 서서히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런데 아스레인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눈을 깜빡이자 금방 사라졌지만, 똑똑히 보았다. 나를 보며 웃는 오케아노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