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65/305)

#65

화를 삭이려는 듯 기나긴 한숨이 이어졌다. 산책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강아지를 찾는 주인의 심정일까. 아스레인의 얼굴에 스친 피곤한 표정 때문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케아노스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예전에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알게 됐네.”

“아, 그럼 오랜만에 만났으니 여유롭게 담소 나누시지 그랬어요.”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닐세.”

관계에 선을 긋는 태도가 퍽 단호했다. 하지만 침입자라면 경계부터 하는 오케아노스가 쉽게 왕궁으로 들일 정도라면, 단순하게 안면을 튼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오케아노스로부터 ‘거래’ 얘기도 들으셨을까.

슬쩍 눈치를 살폈으나 아스레인은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어렴풋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이미 내 것도 돌려받았고.”

자, 잠깐. 지금 뭐라고…? 저절로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단어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정작 불붙은 폭탄 같은 말을 던진 아스레인은 유유히 접견실을 나섰다.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망상이 과하면 정신 건강을 해친댔다. 그래. ‘내 제자’를 잘못 말씀하신 거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빠르게 단념하는 쪽이 낫다.

매무새를 정리하며 아스레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왕궁 앞에선 오케아노스와 세 명의 세이렌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호위병들은 온데간데없이 조용한 배웅이었다. 앞서 걸어간 아스레인이 오케아노스와 대화하는 사이, 세이렌이 다가와 나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잘 가. 짧은 시간 동안 재밌었어.]

[같이 춤을 못 춘 건 조금 아쉽지만~]

[나중에 또 놀러 와. 아, 살아서 와야 한다?]

품에 안겨 덜그럭거리는 백골이 떠올라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바짝 얼어붙은 내 얼굴이 우스운지, 디오네와 칼리로에는 까르르 웃으며 자리를 떴다. 스틱스가 그들을 따라가기 전, 황급히 불러 세웠다.

“스틱스. 혹시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후후, 당연하지.]

“혹시 아까 제가 들어갔던 배는 왜 침몰했는지 기억해요?”

[아~ 그거?]

스틱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 어딘가에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거든. 신나서 애들끼리 가 봤는데, 아쉽게도 인간은 한 명도 없더라고.]

분명 배 안에 생활감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가라앉을 당시 선원마저 사라졌다니…. 침몰할 걸 알고 서둘러 빠져나갔나? 지금 와서 마법의 흔적을 찾기엔 시간이 오래 지나 불가능했다.

“또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

[음~ 글쎄.]

재차 고민하던 스틱스는 짧은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지금껏 침몰한 배는 상자 안에 음식이나 보석이 들어 있었거든. 그래서 괜찮은 물건이라면 무조건 오케아노스 전하께 바쳤지.]

“그게 일반적이죠.”

[그렇지? 그런데 그 배는 이상했어.]

“왜요?”

스틱스는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거대하고 화려한 배라서 기대했건만, 상자 안에 돌만 한가득 들어있지. 뭐니!]

“돌…이요?”

[그, 있잖아. 구멍이 숭숭 뚫린 돌.]

나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찌푸렸다. 배에 실어 나르는 물건이 돌뿐인 것은 그의 말마따나 이상한 일이다. 마치 바다로 가라앉기 위해 일부러 배를 무거운 돌로 채운 것 같지 않은가.

만약 가설대로 멀쩡한 배를 침몰시켰다면, 그 이유는 뭐지? 배에 탄 선원들은 단순히 무역선이나 수송선으로 보이기 위한 눈속임인 건가. 게다가 화산암이라니. 카르사 제국을 뒤덮은 산맥 중 화산이 있었나…? 풀리지 않은 의문의 연속이다.

그때 멀리서 대화를 마친 아스레인이 나를 불렀다.

“태오.”

“아, 네! 갈게요!”

서둘러 스틱스와 인사를 마치고 걸음을 돌렸다. 돌로 된 아치 아래 서 있는 아스레인은 어서 왕국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춰 서서 오케아노스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전하.”

[만나서 즐거웠네. 태오.]

엷은 미소를 그린 오케아노스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곤 내 어깨 위로 온기 없는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우리의 약속을 잊지 말게.]

주머니에 넣어 둔 진주가 오케아노스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울렸다. 지금 오케아노스는 부드럽게 나를 대하지만, 언제든 적대할 수도 있단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아스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혼자 고생한 것이 무색하게 뭍으로 돌아가는 길은 편안했다. 부드러운 물줄기가 몸을 감싸 무사히 수면 밖으로 빠져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떨어졌던 절벽에 서서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바다 위를 가득 채운 먹구름이 서서히 사라지고, 수평선 너머로 불그스름한 태양이 떠올랐다. 바야흐로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또 신세를 졌네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아스레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신세를 진 건 이쪽이지.”

어째 그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공연히 반응을 떠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오케아노스에게 폭풍우를 언급하니 이미 얘기가 끝났다더군. 그는 자네에게 ‘설득’되었으니 내 말은 듣지 않겠다고 했지.”

“…아.”

“하지만 손익이 확실한 오케아노스에겐 설득은 통하지 않네. 반드시 조건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그런데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응당 자네를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올곧은 금안은 떠오르는 태양에 물든 하늘처럼 선명한 홍색을 띠었다.

“폭풍우를 멈춰 주는 대가로 뭘 걸었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숨기려던 건 아니다. 단지 아스레인이 너무도 피곤해 보여 다음을 기약하려고 했다. 하지만 추궁당하는 지금, 그를 향한 배려는 오히려 의심을 키울 뿐이었다. 마른 입술을 꾹꾹 깨물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정말 말하려고 했어요. 숨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알았으니 말해 보게.”

조심스레 새끼손톱만 한 진주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여전히 의아해하는 아스레인에게 오케아노스와의 거래에 대해 말했다.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딱딱한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불허하겠네.”

“교수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금방이라도 다시 바다로 들어갈 것 같은 기세였다. 곧바로 아스레인의 앞을 가로막고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오케아노스는 이 사건의 당사자예요. 직접 사과를 들을 권리가 있고, 전 그 의사를 존중해 주고 싶었어요.”

“맞는 말이지만, 방법이 틀렸네.”

“그럼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데요?”

당돌하게 되묻자 그의 눈썹 끝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애초에 방법을 논할 필요가 없네. 베제프 경에게도 말했지만, 우린 그저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걸세. 그 외의 의무를 어째서 자네가 지는 건가.”

“아시다시피 보호소에 더는 다친 마물을 수용할 자리가 없어요. 이대로 폭풍우가 이어진다면 여러 마물이 해안가에서 죽고, 이곳 사람들은 불안에 떨겠죠. 덮어 놓고 있다간 자칫 종족 간 전쟁으로 커질 수도 있다는 걸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대답이 없는 아스레인에게 쐐기를 박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고작 몸을 빌려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죠.”

고귀한 희생정신 같은 게 아니다. 객관적으로 계산하자면 다수를 위하는 쪽이 낫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스레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하는군. 두렵지도 않나?”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니고 한시적이니 괜찮아요. 게다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

“다른 이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제 몸 사리기 바쁜데, 어째서 자네는 정반대로 구는 겐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지난날을… 후회했거든요.”

모두가 죽을 날을 받아 두고 살진 않는다. 나만 해도 등 뒤로 따라온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해 평소 같은 일상을 보냈다. 만약 정문 앞에서 차에 치일 줄 알았더라면, 그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빠짐없이 했을 것이다.

허구한 날 접대하기 바쁜 교수의 앞을 가로막고 논문 초고를 봐 달라고 닦달하거나, 부당한 심부름을 시키는 교수에게 과감히 안 하겠다고 말하거나,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려 미뤄 둔 책을 전부 정독하거나.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않아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 엄청 후회했는데, 뒤늦게 돌아보니 다신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버킷리스트는 열 손가락이 부족할 만큼 많았으나 지금 와선 전부 쓸모없는 망상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 생만큼은 공중에 흩날린 논문처럼 물거품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요.”

그게 설령 누군가의 눈에는 터무니없이 무모한 짓으로 보일지라도 괜찮다. 후회보다 미련한 감정이 없다는 걸 이젠 알고 있으니까.

“교수님. 부디 제가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아….”

깊은 한숨을 끝으로 절벽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스레인이 극구 말린다면 어찌할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자의 선택을 믿어 주는 것도 스승의 도리겠지. …자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게.”

고맙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아스레인은 걸음을 옮겼다. 님프의 숲에서 보호소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마차가 없었기에 오랜 시간을 그와 나란히 걸었다.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으나,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나 이따금씩 스치는 그의 옷자락이 따사로웠다. 보폭을 맞춰 주는 사소한 배려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니, 중증이 따로 없었다.

“발은 안 아픈가?”

“그럼요! 걱정 마세요.”

괜찮다고 말해도 아스레인은 자연스레 돌부리가 험한 곳을 자처해서 걸었다. 그 덕분에 비교적 평탄한 길로 걸어가며 흠모하는 옆모습을 몰래 바라보았다.

혹시 이 사람은 알까. 이번 생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내가 지금도 후회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이유가 당신이라는 걸.

***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빨갛게 눈이 충혈된 아이리스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잔소리를 들었다. 나를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잤냐고 물으니 다짜고짜 욕부터 내뱉었다. 그 모습이 귀엽고 고마워서 해맑게 웃었다. 그 때문에 어김없이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어 버렸다.

개운하게 씻고 나오니 아스레인은 페르가몬 백작가에 서신을 보냈다고 말했다. 폭풍우가 멈춘 이유와 그걸 이뤄 내기 위한 오케아노스의 거래 조건까지 편지에 담았단다. 심부름꾼을 시켰으니 반가운 소식은 금세 백작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어쩌면 이른 새벽부터 먹구름 없는 하늘을 보고 진즉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 백작가에 갔던 심부름꾼이 돌아왔다. 페르가몬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에는 최대한 빨리, 가능하다면 당장 방문해 줬으면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거뭇한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폭풍우를 멈추기 위해 오케아노스가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 누구든 흥미를 가질 내용이었다. 궁금한 심정을 십분 이해하기에 바로 아스레인과 함께 페르가몬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오케아노스를 받아들여야 한단 긴장감에 멀미조차 나지 않았다.

익숙한 풍경을 지나 마차는 페르가몬 저택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백작 없이 그의 아들인 베제프만 기다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서 한결 밝아진 기색이 도드라졌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중히 인사하는 베제프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궁금했으면, 전처럼 차를 대접하지도 않고 곧바로 방으로 안내했다. 너른 책상 뒤편의 책이 가득한 방은 접견실보단 서재로 보였다. 베제프는 푹신한 소파를 권하며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편지에 요청하신 대로 하인들이 잘 오고 가지 않는 장소로 준비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버지께서 집무실로 오실 겁니다.”

아스레인을 향한 손이 무색하게 자리에 앉는 건 나뿐이었다. 멋쩍게 손을 거둔 베제프는 나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당신의 몸에 오케아노스가 들어오는 겁니까?”

“의심되시면 함께 계셔도 괜찮아요.”

“아, 아닙니다. 의심이 아니라 신기해서요. 인간의 몸에 마물이 들어온다니….”

뒷말을 흐린 베제프는 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몸에 바다를 다스리는 전설 마물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제 몸으로는 오케아노스가 힘을 쓰지 못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한시름 놓이는군요.”

작게 한숨을 내쉰 베제프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 아침 햇살이 저를 깨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얼마 만에 보는지… 감개무량했습니다. 우리 가문과 도시를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해 주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부디 약속만 잘 지켜 주세요.”

“물론입니다. 아버지를 도와 이 페르가몬을 착실하게 꾸려 나가겠습니다.”

오케아노스의 신뢰를 두 번 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씩씩한 베제프의 모습에 안심하다가도,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불안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주머니에서 진주를 꺼내자 눈치 빠른 베제프가 걸음을 돌렸다.

“그럼 교수님은 저와 함께 접견실로 가시죠. 차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괜찮네. 그보다 그를 기다릴 만한 방을 내어주게.”

“아, 바로 옆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베제프를 따라 나가는 아스레인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금방 나갈게요.”

오늘따라 금색 눈동자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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