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64/305)

#64

오케아노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스틱스가 내 팔을 붙잡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끌려가지 않으려 버텨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어깨가 빠질 것같이 아프기만 했다. 혹여 창밖으로 아스레인이 보일까 봐 연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체 왜 저를 숨기시는 거예요?!”

[그야 나도 모르지. 전하께선 장난을 좋아하시거든.]

변덕스러운 천성을 누가 모를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분은 대립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건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혹시 널 구하러 온 인간이 죽을까 봐 걱정돼?]

“아뇨. 그건….”

상대가 오케아노스라 걱정이 되긴 하지만, 왠지 아스레인이 질 것 같지는 않다. 뒷말을 흐리자 발끈한 스틱스가 별안간 고함을 쳤다.

[너 설마 오케아노스 전하께서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려도 스틱스는 꿍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연회장을 빠져나와 왕궁 뒤편으로 빙 둘러 돌아갔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행선지가 아니었다.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지금쯤 둘이 맞닥뜨리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일대는 고요했다. 왕궁 너머 상황이 궁금한 한편, 폭발음이나 굉음이 들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휴…. 역시 이성적인 아스레인이 대놓고 공격 마법을 쓸 리 없지. 그리 안심한 순간이었다.

쾅-!

[뭐, 뭐야?!]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커다란 불길과 거센 물줄기가 맞닥뜨린 것처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때다. 시야가 흐려진 틈을 타 스틱스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앞이 보이진 않았으나 일단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바닥만 보고 달리다가 계단이 보이자마자 다짜고짜 올라갔다. 어렵게 표면을 더듬어 문을 발견하고, 다닥다닥 달라붙은 이끼와 해조류를 뜯어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숨을 돌리고 고개를 드니 박제된 독수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헉, …여긴 어디지?”

긴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줄지어 선 문은 흡사 아늑한 여관처럼 보였다. 하지만 낮은 천장과 군데군데 찍힌 독수리 문장 덕분에 알았다. 여긴 연회장에 가기 전, 얼핏 보았던 에브게니아 황실의 배 안이다.

당장 나가는 게 우선이었으나 괜한 호기심이 걸음을 이끌었다. 단순 무역용 범선은 아닌지, 곳곳에 여객선처럼 먹고 지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더 많은 걸 보기 위해 낡은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찰나였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나~?]

스틱스였다. 여기서 계단을 밟는 순간 들키고 말 것이다. 곧바로 몸을 낮추고 복도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튀어 들어갔다. 문틈으로 보니 스틱스는 갑판 앞쪽 방부터 하나씩 확인했다.

[와, 숨바꼭질이야? 좋아~]

차라리 놀이로 받아들여 주니 다행이었다. 숨죽여 문을 닫고 뒤늦게 방 구조를 확인했다. 원래대로라면 바닷물로 부식되어야 할 방은 오케아노스의 마력 덕분에 완벽히 보존되었다. 세월의 흐름만 제외하면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붉은색을 써서 장식한 걸 보면, 꽤 직위가 높은 이가 머물렀던 선실인 것 같다. 에브게니아 혈통의 귀족인가? 덩그러니 놓인 원형 테이블이나 의자엔 별다른 단서가 없었다.

[태~오!]

그사이에도 맹랑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잡혀서 무슨 꼴을 볼지 모르니 일단 몸을 숨겨야겠다. 마땅한 곳을 찾다가 벽에 걸린 벨벳 커튼을 발견했다.

“급하니까 여기라도….”

커튼 뒤로 숨기 위해 자락을 주욱 잡아당겼다. 그런데 천이 주르륵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망연자실하여 이불처럼 말린 벨벳 천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태오~ 전하께서 찾으셔~!]

그러다 스틱스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튼 천 무더기 안에라도 숨어 있어야겠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벨벳을 어깨에 두르다가 우연찮게 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애초에 벨벳 천은 커튼이 아니라 그림을 가리기 위해 놓여 있던 것이다.

“…뭐지?”

몸을 숨기다 말고 커다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금색 액자에 정성스럽게 담긴 그림엔 세 인물이 그려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백발 중년과 그의 무릎에 앉아서 책을 읽는 소년. 그리고 노인의 의자에 손을 얹은 청년까지- 특별할 것 없는 귀족 집안의 단란한 모습이었다.

조금이나마 유용한 단서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다가 우측 하단에 써 있는 자그마한 글씨를 발견했다.

[토리코르토 산 에브게니아 공작 각하께. 존경을 담아, 체릭 판토니오 올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에브게니아라는 성을 달고 공작이란 직함을 가진 자는 카르사 역사에 단 한 명뿐이다.

“에브게니아 1세잖아….”

그 말은 즉, 이 범선은 황실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다. 에브게니아가 시오를 밀어내고 즉위하기도 전에 완성된 그림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미술관의 도슨트가 된 것처럼 팔짱을 끼고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비스듬히 서있는 청년의 등 뒤로 새로운 인물을 찾았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려묶은 남자였다. 몸은 창가를 향하고 있었지만, 곧은 콧대를 가진 옆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익숙했다.

“…아스레인?”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디아벨 아스레인, 그였다. 차림새는 지금보다 단출했으나 얼굴은 똑같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림 속 그의 모습을 어루만졌다. 아무 감정 없는 얼굴은 마치 영혼을 불어넣은 인형 같았다.

“선조랑 되게 닮았네….”

빼닮은 외모는 그렇다 쳐도 뭔가 이상했다. 분명 아스레인 가문은 전쟁에서 에브게니아 공작의 편에 선 덕분에 백작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보다 이전의 모습을 담은 듯 보였다.

미묘하게 뒤틀린 타임라인에 모순을 느끼던 그때였다.

[와, 찾았다!]

어깨 위로 손이 덜컥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스틱스가 씨익 웃었다.

“…!! 스틱스. 언제 왔어요?”

[방금 왔지. 얼른 가자.]

“어디를요?”

[오케아노스 전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어.]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문 밖으로 물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 연회장으로 이끌었던 오케아노스의 분신이었다. 그림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틱스는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배 밖으로 나갔다.

[아, 맞다. 알고 보니 그 침입자… 아니, 손님이 오케아노스 전하의 지인이었다지 뭐니?]

“예?”

[그래서 전하께서 널 데려오라고 하셨어. 흔쾌히 뭍으로 돌려보내 주시겠대.]

“그럼 그 폭발음은 뭐예요?”

[글쎄. 너무 반가워서 마법이라도 쓰셨나?]

두 번 반가웠다간 누구 하나 죽겠네. 그래도 아스레인이 오케아노스와 뜻밖의 인연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서둘러 스틱스를 따라 왕궁 안 접견실로 향했다. 대략 하루정도 갇혀 있었는데, 왠지 일주일 만에 아스레인을 보는 것 같다.

문 앞에 도착해서 노크하기 직전, 문득 내 옷차림이 떠올랐다.

“자, 잠깐만요.”

[왜 그래?]

“제 옷 주세요.”

[무슨 옷 말하는 거야~]

“제가 원래 있고 입던 옷 말이에요!”

[아~ 곧 가져다줄게. 그보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들어가 봐.]

“이 꼴을 하고 어떻게 들어가요…!!”

소곤소곤하게 시작한 대화는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가슴과 옆구리로 모자라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낸 차림으로 아스레인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스틱스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옆을 돌아보자 아스레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태오, 괜찮….”

미처 마음의 준비도 못하고 괴상한 꼴로 그를 마주했다. 벌어진 옷 트임이라도 어떻게 좀 잡고 있을걸! 뚝 끊긴 그의 목소리가 당혹스러움을 대변했다. 뒤이어 나온 오케아노스는 입을 가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스틱스. 이 자에게 옷을 가져다주거라. 짐은 연회를 마무리하고 오마.]

[예!]

내 말은 죽어도 듣지 않던 스틱스는 냉큼 걸음을 돌렸다. 오케아노스까지 사라지니 접견실엔 나와 아스레인만이 남았다. 그는 문 안에, 그리고 나는 문 밖에. 마치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는 것처럼 서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슬쩍 손을 올려 벌어진 가슴을 여미고,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 쪽 트임을 붙잡았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얼음이 된 그가 걱정스럽게 느껴질 즈음, 멀리서 맹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옷 가져왔어!]

저 멀리서 다가온 스틱스의 품에는 반가운 옷들이 안겨 있었다. 감격하며 옷을 받아들자 스틱스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까?]

괜찮다며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의사를 표현한 건 내가 아니라 아스레인이었다.

“그만 건드리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아스레인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 쥐며 접견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스틱스를 불청객 취급하듯 노려보며 문을 쾅 닫았다. 말투나 태도를 보아하니 아스레인은 내게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죠. 그게… 연락은 하려고 했는데, 마력이 차단돼서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제 힘으로 나가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요.”

쓸데없는 변명을 중얼거려도 아스레인은 반응이 없었다. 문에 기대어 서서 조용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가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줬으면 했다. 옷을 품에 안고 구석으로 가서 멋쩍게 말했다.

“그, 금방 갈아입을게요.”

왠지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곧바로 벽난로 위에 장신구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잘그락, 툭. 무거운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그 와중에도 아스레인은 내 행동을 눈으로 좇기 바빴다. 일부러 신경 쓰이게 하려고 쳐다보는 건가. 그런 거라면 성공이다.

“…저….”

뒤 좀 돌아 주실래요? 라고 물으려다 말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남자끼린데 뭐 어때. 대중목욕탕이라 생각하면 되잖아. 학생 때는 교실 안에서도 훌렁훌렁 벗었으니까 괜찮아. 당연히 의식하는 쪽이 이상한 거지. 응. 내가 이상한 거지. 그렇지.

최대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등을 돌리고 허리에 묶은 끈을 풀었다. 스르르 매듭을 푸는 소리마저 소란스럽게 들렸다. 툭, 카펫 위로 옷을 동여매는 유일한 끈이 떨어졌다. 겨우 손으로만 붙잡고 있던 옷자락마저 놓으니 다리가 허전해졌다. 볼품없는 다리를 가리려 서둘러 바지를 챙겨 입었다.

단지 옷을 입는 것뿐인데…. 매일매일 하는 일상이 왜 이리도 떨리는지 모르겠다. 바지 버클을 채우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부디 아스레인은 보지 못했으면 했다. 단지 옷을 갈아입으며 신혼 초야처럼 긴장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후우.”

이제 겨우 바지를 입었다. 막상 상의를 벗으려니 괜히 솜털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아스레인은 뭘 하고 있을까.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가 또렷한 금안과 마주쳤다. 마치 넓은 미술관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림 한 점이 된 것만 같았다.

도망치듯 시선을 피하고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훤히 드러난 등 위로 부드러운 실크가 스치고 지나가 저절로 어깨가 떨렸다. 곱게 접어 둔 셔츠를 주우려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

어느새 아스레인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자 가지런한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치부를 들킨 기분에 눈가가 화악 붉어졌다. 마음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걱정하셨어요?”

지금 꼴이 얼마나 우스울까. 난데없이 끌려와 이상한 옷을 입은 것도 모자라,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으로 귓가가 붉어진 사내자식이라니. 당장 소파 뒤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황급히 셔츠에 팔부터 끼워 넣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잠갔다.

“아~! 맞다. 리오는 좀 어때요? 그 다친 학생 말이에요.”

“…….”

“발목을 심하게 삔 것 같던데.”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차라리 혼잣말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맞겠다. 그가 보는 앞에서 셔츠까지 입으니 조금은 진정되었다. 한 번 더 화제를 돌리려 숨을 들이쉬는데, 마침내 아스레인이 입을 열었다.

“옷을.”

“네?”

짧은 한마디에 고개를 드니 못마땅한 표정과 마주쳤다.

“저 옷을 자네 의지로 입은 건가?”

“예?! 아, 아뇨!!! 설마요. 억지로 입혀졌어요.”

“…입혀졌다?”

얇은 입꼬리가 매섭게 비틀렸다. 상황을 수습하고자 두 손을 내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실은 정신을 차려보니, 좀 웃기게도 나체 상태였거든요.”

“허, 나체 상태라.”

“그, 그게… 있죠. 세이렌이 저를 단장시킨다고 맨몸에 오일을 발라 주는 바람에….”

“맨몸에….”

“하하, 그때 하필이면 저 옷을 주길래 어쩔 수 없이 입었어요. 다 벗은 채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 같다. 오랜 침묵 끝에 아스레인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여태껏 저리도 복잡한 심경이 담긴 한숨을 처음이었다. 아스레인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몸을 돌렸다.

“들을수록 가관이군.”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조끼를 입는데,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