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무사히 타협이 끝났다. 당분간 오케아노스 바다는 잠잠할 것이다. 비밀스럽게 협상을 마친 오케아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경들은 듣게.]
진중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짐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네.]
반드시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알현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납득할 수 없어도 감히 오케아노스의 결정에 토를 달지 못하는 것이다.
[짐이 직접 뭍으로 가서 멍청한 실수를 한 인간과 대화를 나눌 계획이네. 그때까지 경들은 폭풍우 없는 밤을 즐기도록 하세나.]
선언을 마친 오케아노스는 네일로스를 대동해 자리를 떴다. 정식으로 연회에 초대받은 덕분인지 신하들은 내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다만, 따가운 시선이 화살 비처럼 쏘아졌을 뿐이었다. 굶주린 맹수 우리에 던져진 고깃덩이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스틱스와 함께 알현실을 나왔다.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넌지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연회가 준비되려면 아직 남았어. 그러니 왕궁을 구경시켜 줄게.]
“감사하지만, …전 어서 가 봐야 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틱스가 우뚝 멈춰 섰다. 뒤돌아본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으나, 눈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어딜 가?]
“당연히 육지로 돌아가야죠.”
[그러니까 거길 왜 가.]
“…예?”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스틱스가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곤 비늘이 돋아난 손으로 내 목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듯했으나 뾰족한 손톱이 느껴져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윽고 그의 손끝이 빠르게 뛰는 경동맥 위에서 멈췄다.
[전하께서 친히 널 초대하셨는데, 설마 거절할 생각은 아니지?]
“아, 아뇨. 당연히… 연회는 가야죠.”
[그래. 말을 똑바로 해야지. 놀랐잖아~]
스틱스는 싱긋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왕궁 안을 구경시켜 주는 모습이 제법 소름끼쳤다. 결국 그들이 순순히 보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일단은 한 수 접고 연회에서 기회가 오길 기약했다.
짧은 왕궁 탐방을 끝내고 나오자 드디어 외관을 볼 수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이 높은 천장을 버텼고, 아치형 다리가 마치 울타리처럼 왕궁을 빙 둘러쌌다. 해조류와 따개비가 달라붙은 걸 보면 꽤 오래 전에 세워진 건물이었으나, 갈라지거나 변색된 곳 없이 백지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작게 감탄을 내뱉자 의기양양해진 스틱스가 어깨를 한껏 올리며 말했다.
[오케아노스 전하께서 마력으로 세운 왕궁이야. 대단하지 않아? 정확히 이 바다의 중심이래.]
잔뜩 신이 난 스틱스는 쫑알거리며 왕궁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 이유는 왕궁 근처를 둘러싼 수많은 범선 때문이었다.
평범한 정원엔 분수나 조각상이 있듯 오케아노스의 정원엔 낡은 배가 놓여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돛은 빈티지 커튼처럼 펄럭거렸고, 배의 표면은 나뭇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끼가 한가득 덮여 있었다. 눈대중으로 세어 봐도 다섯 척은 거뜬히 넘었다.
“저 배들은 뭐예요?”
[이 왕국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이지.]
스틱스는 왼쪽에서부터 배를 한 척씩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돛대가 뾰족한 배는 감히 우리들을 포획하려고 했던 놈들의 것이야. 전하께서 직접 권능을 행하셨어. 그리고 저 배는 암초를 보지 못해서 침몰했지. 우리 탓 아니다? 그리고 저건…. 아~ 뭐였더라? 아무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인간들의 최후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악의 없이 순수하여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걸 어째서 그냥 두는 거죠?”
[전하께서 남겨 두라 명하셨거든. 그들이 한 짓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고.]
대부분이 마물 포획을 금지하기 이전의 것으로 보였다.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진 범선 중에 그나마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해조류의 서식지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크고 화려한 배였다. 부유한 무역상도, 한때 부를 누리던 마물 사냥꾼도 저만한 배는 가질 수 없었다.
유심히 지켜보니 갑판 위로 떨어진 깃발이 물결에 펄럭였다.
“저건….”
깃발에 새겨진 독수리는 틀림없이 에브게니아 황실을 나타내는 문장이었다. 대체 황실의 배가 어째서 오케아노스 해저에 침몰한 채 남아 있단 말인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려던 그때였다. 물처럼 투명한 새가 날아들어 앞길을 막았다.
[어라, 연회 준비가 끝났나 봐.]
“네? 벌써요?”
[얼른 가자!]
조금만 더 가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스틱스는 가차 없이 내 손목을 붙잡고 새를 따라갔다. 그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오케아노스를 알현했던 왕궁이 아닌, 그 옆에 놓인 별채였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촛대와 이름 모를 천사의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게도 흔히 귀족의 저택에서 볼 수 있는 연회장과 상당히 유사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었다면, 뭍이라 헷갈릴 정도였다.
“장식품들은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연회장을 꾸미기 위해 침몰한 배에서 가져왔어.]
“인간을 싫어하면서 어째서 인간이 만든 물건을 쓰죠…?”
[딱히 싫어하진 않아. 오케아노스 전하께서는 충성만 맹세한다면 인간까지도 백성으로 받아들이시지. 단지 너희가 물에만 들어오면 얼마 못 버티고 죽어 버리는 걸 어쩌겠니.]
스틱스는 진정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심지어 ‘안 그래?’ 하고 되묻기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어느덧 연회가 한창인 홀 앞에 도착했다. 문틈에선 웅장한 바이올린 연주와 웃음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렸다. 길잡이가 되어 주던 새는 할 일을 마친 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서 들어가자~!]
스틱스가 문을 열자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온갖 반짝이는 보석으로 치장된 벽과 역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흡사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떠오르게 하는 선율이 연회를 더욱 우아하게 만들었다.
대체 누가 연주하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주자 없이 마법만으로 활이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바이올린은 침몰한 배에서 가져왔는지, 현 몇 개가 뜯겨 나가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여러 의미로 대단한… 광경이네요.”
마법 같은 풍경에 눈이 멀어 가장 충격적인 광경을 뒤늦게 접했다. 넓은 홀에서 세이렌들이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두 발은 없지만 춤 사위는 왈츠를 추듯 우아했다.
춤 상대가 옷을 갖춰 입은 인간의 해골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목이 뒤로 한껏 꺾인 해골을 데리고 왈츠를 추는 모습은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졌다.
그때 춤을 추던 세이렌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스틱스의 형제인 디오네였다. 그는 덜그럭거리는 백골을 불쑥 내밀며 낭랑하게 말했다.
[자, 널 위해 인간을 데려왔어!]
과학실에서 자주 보던 표본이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눈에 초점을 지우고 애써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반응을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하는데….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들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괘,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춤추세요…. 네.”
침몰한 배가 많은 바다이니 백골 또한 많으리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설마 그걸 가지고 왈츠를 출 줄은 몰랐다. 스틱스와 디오네는 사색이 된 내 얼굴이 우스운지 한참 동안 까르르 웃어 댔다.
겨우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오케아노스에게 다가갔다. 배운 대로 인사하자 오케아노스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권했다.
[어서 오게. 왕국 구경을 잘했느냐.]
“예, 짧은 시간 안에 둘러봐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후후, 말은 잘하는구나.]
자리에 앉으니 눈을 가린 세이렌이 다가와 잔에 불그스름하고 걸쭉한 액체를 따라 주었다. 용감하게 입은 대지 못하고 대충 마시는 척만 했다. 베일 아래로 정체 모를 액체를 마시는 오케아노스에게 조심스레 본심을 꺼냈다.
“이 연회가 끝나면 부디 절 뭍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왜 그리 위험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이곳에 있으면 걱정할 것도 없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오케아노스가 짧게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꼭 제 발로 바다에 기어 들어온 인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던데…. 혹 너도 뭍에 연인이라도 두고 온 게냐.]
콜록,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연인…이 아니라 절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거라면 사신을 보내어 대신 안부를 전해 주마.]
“호의에 감사합니다만, 전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오케아노스는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연회가 끝나면 무사히 뭍으로 돌려보내 주마.]
“감사합니다. …전하.”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록 곧장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더 욕심을 냈다간 어렵게 얻은 기회마저 걷어차는 꼴이 될 것이다. 내게서 관심이 떨어진 틈을 노려 다시 한 번 귀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슬쩍 만져 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그때 잔을 내려놓은 오케아노스가 대뜸 물었다.
[신기한 귀걸이로구나.]
“…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것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예사 물건이 아니야.]
단순 연락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오케아노스가 관심을 보이니 괜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장신구는 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
“절 구해 주신 분께 받았습니다.”
그의 가지런한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럼 그렇지. 그리운 색을 보고 짐이 착각을 했구나.]
“착각이라뇨?”
오케아노스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잔을 내려놓았다.
[찬란한 금빛으로 물든 그분이라면, 인간인 너도 알 테지.]
“…설마….”
[너희들의 선조이자 선황인 유피테르가 무참히 죽인 그분 말이다.]
예상치 못한 존재가 언급되어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존경을 담아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나, 이 땅에 뿌리 내린 생물이라면 응당 알고 있는 존재- ‘그 마물’.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오케아노스이니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싶은 사항이 있었다. 모르는 척 연기하며 말을 흘렸다.
“마물을 가호하는 그분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쌍생한 마물을 떠올리신 것 아닙니까.”
[쌍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케아노스의 손아귀에서 와인 잔이 깨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음에 일순 오케스트라 연주가 멈췄다. 춤추던 세이렌부터 연회를 즐기던 마물까지 전부 이쪽을 바라보았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정적이 이어졌다.
이윽고 오케아노스는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연회가 이어졌다.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들 인간이 역사를 어찌 바꿨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만, 그분은 유일하시다. 대륙의 중심인 코카서스 산에서 태어나 늘 우리를 우선하셨지. 그분이 계실 적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제아무리 약한 마물이어도 인간 따위 두렵지 않았어. 그분께서 정성을 다해 보호하셨으니까.]
오케아노스의 손에 마치 피처럼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하인이 다가와 급히 손을 닦아 주는 동안에도 오케아노스는 추억에 잠긴 채였다.
[결국 그게 문제였지.]
“……?”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네. …다신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오케아노스 덕분에 확실히 알았다. ‘그 마물’은 유피테르의 손에 죽었다. 역시 인간에게 적대적인 형을 죽이고, 아우는 인간과 마물 사이의 평화를 위해 힘쓴단 얘기는 보기 좋게 만들어 낸 설이었다.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예전에 진은 종종 ‘그 마물’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그들이 본 마물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또한 지어낸 이야기일까.
“전하. 제가 들은 바로는….”
오케아노스에게 목격담에 대해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연회장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이게 무슨 소란이냐.]
네일로스가 앞을 가로막자 병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치, 침입자입니다.]
오케아노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오늘은 지루할 틈이 없구나.]
가벼운 손짓을 따라 공중에 자그마한 물웅덩이가 생겼다.
[감히 이 왕국에 쳐들어오다니….]
오케아노스가 검지로 수면을 건드리자 물웅덩이에 파문이 일었다. 그 즉시 스틱스와 돌아다녔던 왕궁 일대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 아치형 울타리 밖에 고고하게 서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게 보였으나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흩날리는 황갈색 머리카락에 고요한 분노를 담은 금색 눈동자.
“아, 아스레인….”
[아는 인간이더냐?]
“그게….”
[아아, 널 데리러 온 모양이구나.]
오케아노스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웅덩이를 허공에서 치워 버렸다.
[인간 중에 짐이 쳐 둔 보호막을 뚫은 자는 지금껏 없었거늘…. 제법 실력 있는 마법사를 곁에 두었구나.]
“절 찾으러 온 분이니 저만 가면 됩니다.”
[아니, 됐다. 이런 유흥을 놓칠 순 없지.]
뭐? 설마… 상대하려는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아스레인과 오케아노스의 충돌이라니.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봤단 말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오케아노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스틱스.]
[예, 전하.]
[이 인간을 데리고 잠시 다른 곳에 가 있거라.]
“자, 잠깐만요! 전하!”
뛰쳐나가려고 해도 이미 스틱스에게 꽉 잡힌 후였다. 오케아노스는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 침입자는 짐이 친히 맞이하마.]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