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 (62/305)

#62

그 짧은 한마디에 장내가 혼란에 빠졌다. 팔팔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꼴이었다.

[역시 인간 측에서 보낸 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저 무례한 놈에게 죽음을…!]

[이럴 때일수록 권능을 행사하셔야 합니다!]

핏대를 세운 오케아노스의 추종자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이를 갈았다. 당장 내 목을 쳐서 뭍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은 수많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내가 긴장한 이유는 저들 때문이 아니었다.

[전하…!]

난리 통 속에서도 오케아노스는 조용히 평정을 유지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선 어떠한 생각도 드러나지 않았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이가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니, 오히려 두려웠다.

그 와중에도 화는 산불처럼 끝없이 퍼져 갔다. 왕좌 옆을 지키던 심복, 네일로스가 보다 못해 지팡이를 내리쳤다. 쿵! 묵직한 소리가 모든 소음을 빨아들였다.

[누가 감히 전하의 면전에서 소란스럽게 구는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사납던 불길이 단숨에 진화되었다. 이윽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여기서 자칫 빈틈을 보였다간 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속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오케아노스를 바라보았다.

베일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괜한 반감을 샀나. 걱정하던 순간 오케아노스가 난데없이 어깨를 흔들며 끌끌 웃었다.

[원체 겁이 없는 건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배짱이 대단하구나.]

웃음을 머금은 오케아노스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물었다.

[이름이 무어라 했지.]

“…태오라고 합니다.”

[그래, 태오. 이건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다. 그걸 알고 있느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가 만들어 낸 잘못이었습니다. 신전을 지으라고 명한 자는 지금… 제 잘못을 깊게 뉘우치며 전하께 용서를 구하려 합니다. 전하께서 깊은 아량을 베풀어 주신다면, 다신 영역에 그 어떤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페르가몬 가에서 장남인 베제프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인간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마물에게 머리를 숙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반응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겨우 진정된 그들에게 불씨를 던져 준 격이었다.

[거짓말입니다. 전하.]

[저 세 치 혀를 당장 뽑으소서!]

이미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은 마물들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불길이 나를 삼킬 듯 위협해 왔다. 분노로 점철된 광경을 지켜보던 오케아노스가 한 손을 들었다. 그 작은 손짓에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잘못을 뉘우친다, 라….]

입가에 머문 미소와 달리 오케아노스의 목소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어떻게 믿겠나. 저들의 말대로 짐에게도 거짓으로 들린다만.]

처음부터 믿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증거를 가져오든 그들의 반응은 일관됐을 것이다. 설령 페르가몬 문장이 찍힌 각서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마물에겐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바쳐야 한다. 오케아노스가 인간인 나를 믿고 폭풍우를 거둬 줄 만한 담보를….

“어찌하면 믿어 주시렵니까.”

당돌하게 물으니 오케아노스가 나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그 약속이 깨진다면, 짐에게 거짓을 고한 네 혀를 잘라 가겠다.]

베일 아래로 핏기 없는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오케아노스가 내 진심을 시험하고 있다. 날카로운 적의가 온몸으로 느껴져 저절로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목숨을 건 제안을 하면서 이 정도쯤은 예상했다.

“저로 인해 왕국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응당 벌을 받겠습니다.”

[호오.]

가늘게 뜬 눈이 내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지금의 네 태도를 보니 문득 궁금해지는구나.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 주인이 책임을 지라 명령하던가? 아니면, 폭풍우에 일가족이라도 잃었더냐.]

오케아노스는 나를 페르가몬 가의 명령을 받고 온 사자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이 아닌 마물을 위해서였다. 그러니 오케아노스에게 바깥 상황을 가감 없이 알려 줄 필요가 있다.

“폭풍우가 끊이지 않아 죄 없는 당신의 백성들까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를 붙잡은 네일로스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결국 네일로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한 발 나서서 고함쳤다.

[네놈이 감히 전하를 모함하느냐!]

끓어오르는 분노가 살갗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움찔거리는 입술은 나를 당장 쳐 내란 명령을 애써 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때 예상 밖의 인물이 팽팽한 긴장의 끈을 잘랐다.

[괜찮네. 네일로스 경. 어디 한 번 계속 들어 보지.]

오케아노스의 명령에 네일로스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오케아노스가 내 말에 귀 기울여 들어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발언 하나하나에 신중을 가하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무 힘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윗분들의 생각일랑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폭풍우가 계속되면 그들이 무력을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도 그런 비극을 원치 않으실 것 아닙니까.”

애초에 협상이 가능한 이유는 페르가몬 백작이 일찍이 계획을 접었기 때문이다. 만약 백작이 무모하게 신전 건축을 강행했다면,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의미한 진흙탕 싸움이 이어졌을 것이다.

역시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오케아노스는 고민하듯 입가를 어루만졌다.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바로 승부사를 던졌다.

“오케아노스 전하. 이건 양날의 검입니다. 오필리아와 같이 구조된 마물들도 있으나, 폭풍우가 끝없이 이어진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이 바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육지에서 숨을 거둘 것입니다.”

보호소로 구조된 마물만 올해 들어 수십 마리다. 지금도 그 수가 점점 늘어나 감당하지 못할 한계치에 이르기 직전이다. 마물들이 미처 구조되기 전에 해안에서 사망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지금껏 보호소에서 만난 마물들은 하나같이 왕국을 지켜 낼 수 있다면 상관없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백성을 위해 일으킨 폭풍우에 도리어 백성이 휘말린다면, 대체 뭘 위한 희생이란 말입니까.”

바로 밀렵꾼이다. 폭풍우로 육지에 떠밀려 온 마물이 밀렵꾼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전하. 저를 믿으란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아직 차선책이 남아 있음을 알아 주십시오.”

어느새 오케아노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백성을 아끼는 그 마음과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부디 현명한 선택을 내리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여기서부턴 오로지 오케아노스의 결정에 달려 있다. 내 목을 치고 전쟁을 일으킬지, 아니면 약속을 믿고 화를 거둘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그의 대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랜 침묵 끝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가죽을 쓰고서 마물의 입장을 논하다니… 흥미롭구나.]

짧은 한숨엔 여러 감정이 녹아 들어가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때, 오케아노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가까이 와 보거라.]

갑작스러운 제안에 모두가 일제히 술렁거렸다. 반신반의하며 흘겨보니 오케아노스가 우아하게 손짓했다.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후 계단 앞에 멈춰 서자 오케아노스가 재차 말했다.

[이리 올라와 보게나.]

여기서 더 가까이 가라고?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군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두 계단…. 다가가는 내내 오케아노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왕좌가 놓인 단상에 다다랐다. 손을 뻗으면 옷자락이 닿을 거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백옥같이 하얀 그의 발이 보였다. 피부에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이 형상이 본체가 아닌 모양이다. 이윽고 노골적인 시선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니 오케아노스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왜 네가 불쾌하지 않은가 했더니 마물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구나. 특히나 그 팔찌에선 제법 그리운 냄새가 나.]

“…히페리온을 아시나요?”

[어찌 그 지루한 노인네를 모를까. 아득히 먼 옛날… 얼굴을 마주하며 담소를 나눈 적도 있었지.]

숲을 다스리는 히페리온과 바다를 지배하는 오케아노스가 아는 사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가운 마음에 슬그머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오케아노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너무 가까이 했어.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지.]

오케아노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안 그런가?’ 하고. 변명할 말이 없어 시선을 피하며 손목을 응시했다. 오케아노스의 마력으로 인해 말라비틀어진 필리스 줄기가 유독 애처롭게 보였다.

“히페리온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죠.”

[그렇다 한들, 인간을 과신했기 때문에 얻은 상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건….”

말문이 턱 막혔다. 히페리온의 상처를 보고 어째서 인간을 증오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나로선 할 말이 없었다. 오케아노스에게 신뢰를 사도 모자랄 마당에 나 자신의 논리에 모순을 찾아 버렸다. 입술을 꽉 깨물자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집스럽다 했더니 또 거짓말은 못 하는구나.]

오케아노스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감미하듯 훑어보곤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그래. 좋다. 네 용기와 직언을 높이 사마.]

[전하…!!]

얌전히 듣고 있던 네일로스가 기겁하며 말렸다. 하지만 오케아노스는 아랑곳 않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폭풍우에 무고한 백성들이 휘말리고 있는 건, 짐에게도 골치 아픈 우환이었지.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본디 전쟁이란 얻는 것이 있으면 잃기도 하는 것 아니겠느냐.]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난 오케아노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웅성거리기도 잠시, 네일로스와 그 신하들은 주군을 따라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네 말대로 피해를 덜 볼 수 있다면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오케아노스는 히페리온의 팔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메마른 필리스 줄기가 서서히 생기를 되찾았다. 기적을 목격해 멍해진 내게 오케아노스는 속삭였다.

[단, 짐은 그치에게 사과와 약속을 직접 듣고 싶구나.]

바로 아래 있는 네일로스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그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하나 짐이 이 자릴 떠나는 건 위험하니… 너를 통해 뭍으로 가겠다.]

“…예?”

오케아노스는 긴 소매 안에서 진주를 닮은 구슬을 꺼내었다.

[이걸 먹으면 한시적으로 네 몸은 짐의 것이 되지. 네 의식은 바닷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빈 육체를 짐이 마음껏 취할 수 있다.]

오케아노스가 페르가몬 백작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해 내 몸을 빌리려 하다니. 전혀 상상치 못한 조건을 내걸기에 걱정이 앞섰다. 불현듯 오필리아에게 매혹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통제력을 잃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과연 짐에게 몸을 내어 줄 수 있겠느냐.]

하지만 이것으로 오케아노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하겠습니다.”

선뜻 구슬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새하얀 입술이 길쭉한 호선을 그렸다.

[여봐라.]

[예. 전하.]

[오늘 연회에 이 무모한 인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거라.]

명령을 받은 신하가 나가자마자 오케아노스는 손수 베일을 걷었다. 완벽한 비율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메마른 석고처럼 이마에서부터 코를 가로지르는 금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게도 그 틈으로 붉은 해조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죽은 나무 위를 뒤덮은 이끼처럼.

[마물과 인간 사이에 선 어리석은 자여. 짐은 이 전쟁의 결말을 알고 있다만, 당분간 네 무모한 계획에 놀아나 주마.]

뱀처럼 휘어진 눈매 사이로 물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짧은 시간 유흥으로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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