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61/305)

#61

분명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마치 따뜻한 온천에 들어온 것처럼 습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역시 꿈인 걸까. 몽롱한 기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 나른하게 몸을 뒤척였다. 그 순간 허벅지에 무언가가 닿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날수록 감촉은 점점 생생해졌다.

[내가 가져…지?]

누군가가 내 몸을 만지고 있다. 심지어 여러 개의 손이 동시에 살결을 쓸어내렸다. 뒤늦게 꿈이 아니란 걸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곧장 몸을 내려다보니 얇은 천쪼가리 하나만 덮은 나체 상태로 단상에 누워 있었다.

“무… 무슨….”

정체 모를 세 명이 내 몸 구석구석에 축축한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다리를 움찔거리자 긴 머리를 가진 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라, 깨어났네.]

흰자 없이 온통 새까만 눈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람이 아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천쪼가리가 툭, 떨어졌다. 황급히 천을 주워 하반신만 가려 놓고 나를 둘러싼 그들을 흘겨보았다.

“누, 누구세요….”

[아하하, 겁먹은 것 좀 봐.]

[제법 귀엽네.]

가느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지느러미. 흡사 상처처럼 목 위로 길게 찢어진 아가미. 햇볕을 쬐지 못한 탓에 창백한 피부엔 드문드문 진주 광이 나는 비늘이 돋아나 있다. 상반신은 흡사 인간을 닮았으나, 두 다리 없이 어류의 하반신을 가진 마물.

- NO. 74 세이렌과의 교감을 확인했습니다.

“…세이렌?”

무의식중에 시스템의 음성을 따라 하니 세 명의 세이렌이 까르르 웃었다.

[뭐야~ 알고 있었잖아~]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어서 하얗게 변한 산호를 겹겹이 엮은 벽이 눈에 띄었다. 기둥부터 천장까지 전부 새하얀 광경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연상됐다.

“…이곳은 대체….”

중얼거림을 들은 세이렌이 대답했다.

[성스러운 오케아노스 님의 궁전이란다. 아름답지?]

[드넓은 바다에서 유일하게 물로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이지.]

결국 세이렌에게 잡혀 오케아노스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우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그누스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옅은 그림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 희망인 귀걸이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하고 손목을 확인하니 바짝 시들어 버린 필리스 줄기가 보였다. 레톤 신전 안의 기도실처럼 마력을 쓸 수 없었다. 낌새를 눈치챈 세이렌들이 일제히 말했다.

[마력을 못 써서 놀란 모양이구나. 하지만 당연한 일이야.]

[이곳은 오케아노스 님의 순수한 마력으로 가득 차 있지. 그래서 물에 사는 우리도, 땅에 사는 너도 숨 쉴 수 있는 거란다. 대단하지 않니?]

[그분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마력을 쓸 수 없어.]

내 몸을 지켜 줄 아그누스를 소환할 방법도, 아스레인에게 연락할 수단도 전부 막혔다. 궁지에 몰려 할 수 있는 거라곤 세이렌들에게 부탁하는 일밖에 없었다.

“저를 뭍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글쎄~ 널 보낼지 말지는 전하께서 선택하실 거야.]

[일단 우리는 너를 예쁘게 단장해서 전하 앞에 진상할 예정이고.]

[만약 전하께서 네게 관심이 없다 하시면, 넌 우리의 것이 되지.]

까르륵,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이토록 소름 끼칠 수 없었다. 신난 세이렌은 내 주변을 돌며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뺨에 흑요석 같은 조개가 돋아난 세이렌이 기다란 손톱으로 내 눈가를 쿡쿡 찔렀다.

[난 눈을 가질래! 안 그래도 새로운 장식품이 필요했거든.]

[그럼 난 뭘 가지는 게 좋을까.]

마치 전시장에 진열된 물건이 된 것 같았으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 수 없었다. 살결을 쓸어내리는 손톱과 입매 사이로 보이는 이빨들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무장 해제된 나 하나쯤은 가볍게 제압하고도 남을 것이다.

[다 썩고 난 뒤의 백골도 예쁘겠어.]

[디오네, 너무 욕심내는 거 아냐?]

그러니 이런 살벌한 말을 듣고도 애써 침착했다. 세이렌은 멀쩡히 숨이 붙어 있는 날 앞에 두고 열띤 토론을 했다. 이대론 그들의 수집품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또 다른 세이렌이 들어왔다.

[스틱스, 디오네, 칼리로에.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굳게 감은 눈 위로 거북손과 따개비가 붙어 마치 안대를 쓴 것 같았다. 세이렌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보자마자 공손히 인사했다.

[헉, …네일로스 님.]

장난기 많은 세이렌이 예를 갖추는 걸 보니 제법 높은 직위를 가진 모양이다. 네일로스는 돌로 된 지팡이로 바닥을 툭, 두드리며 엄중히 말했다.

[오케아노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장난은 이만하고 서둘러 저 인간의 단장을 마치거라.]

[네! 금방 나갈게요.]

당찬 대답을 들은 네일로스는 군말 없이 걸음을 돌려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세이렌이 내가 입을 옷가지를 들고 왔다.

[자, 일어나 봐. 전하께 잘 보여야지.]

그런데 내가 입고 온 셔츠와 바지는 어디로 가고, 부드러운 실크 천으로 만든 옷만 있었다. 아니, 옷이라 칭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제, 제가 입고 온 옷은요?”

[전하께선 아름답지 못한 건 싫어하셔. 그런 점에서 네 옷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지.]

“그럼 이걸 정말 입으라고 준 거예요?”

[왜? 별로야? 아예 벗고 들어갈래?]

“…아뇨, 감사히 입을게요.”

세이렌들이 착의를 도와준 덕분에 금세 나체 신세는 벗어났다. 하지만 이건 벗은 거나 다름없었다.

소매 없는 상의는 시원하게 명치까지 파였고, 너무 헐렁한 나머지 팔을 들면 갈비뼈가 보였다. 랩처럼 동여매는 형식의 하의는 다행히 길이가 길어 발목까지 덮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이음새가 벌어져 오른쪽 다리가 허벅지부터 전부 드러났다. 곳곳에 진주색 조개로 장식된 것까지 그리스식 여성 복식에 가까웠다.

“전 가슴도 없는데, 이건 좀… 흉하지 않아요?”

자꾸만 벌어지는 이음새를 손으로 꽉 쥐며 물었다. 연신 이상하다며 눈치를 주었건만 세이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끼리 신나서 금속 목걸이와 팔찌를 채워주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볼만하네.]

진심인가…? 세이렌의 미적 감각을 내심 의심했다.

이후 그들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나를 연행하듯 이끌고 나갔다. 행선지는 말해 주지 않았으나 눈치껏 알 수 있었다. 화려하게 자개가 박힌 문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세이렌 족 병사들. 그리고 살갗에 와 닿는 엄숙한 분위기.

[전하, 명하신 대로 인간을 데려왔습니다.]

이 문 너머에 오케아노스가 있다. 긴장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장난기가 싹 사라진 스틱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안엔 널 보러 온 심복들도 잔뜩 있어. 그러니 살고 싶다면 예의는 꼭 지켜.]

“어떤 예의요?”

[오케아노스 전하 앞에선 무조건 머리를 숙여. 설령 전하께서 고개를 들라 명하셔도 감히 용안을 직접 보는 무례한 짓은 하지 마. 또 말을 허락받을 때까지 얌전히 있어. 대답은 길게 끌지 말되, 적당히 진솔한 게 좋아.]

그의 기다란 손톱이 촉촉한 입술 위를 꾸욱 눌렀다.

[너무 솔직했다간 이 혀가 잘릴지도 모른단다.]

곧은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물론 오케아노스를 보고 싶긴 했지만, 이리도 급작스럽게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히페리온이나 사이누르처럼 자연 속에 어우러진 서식지가 아닌 완벽한 궁전을 보니 긴장은 배가 되었다.

[전하께서 들라 하신다.]

네일로스의 목소리에 두 병사가 엑스 자로 교차한 창을 절도 있게 치웠다. 끼이익- 커다란 문이 열리자 웅장한 알현실이 드러났다.

레드카펫 대신 형형색색의 조개가 바닥을 채웠고, 길 끝에 열댓 개의 계단이 이어졌다. 바로 그 단상 위에 새하얀 왕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오케아노스의 발끝까지 시선이 닿았다가 순간 스틱스의 경고가 떠올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듯 발꿈치를 세우고 스틱스를 뒤쫓아 갔다. 작은 손짓과 미약한 숨소리도 조심스러워지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였다. 길 중간에 멈춰 선 스틱스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바다의 주인께 이 스틱스가 인사드리옵니다.]

스틱스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오른손은 가슴에, 왼손은 뒤로 살짝 뻗었다. 곁눈질로 그를 보곤 어설프게 인사를 따라 했다. 그러자 높은 계단 위에서 중성적인 미성이 들렸다.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수고했구나. 스틱스.]

[천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스틱스는 내 어깨를 세게 짓눌러 반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다. 그 후 뱀처럼 꼬리를 흔들며 유유히 옆으로 물러섰다. 길 위에 혼자가 되니 내게 날아오는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스틱스의 말대로 수백 마리에 가까운 오케아노스의 심복들이 오직 나를 보러왔다. 날카로운 눈길이 피라냐였다면, 나는 이미 온 살을 뜯겨 뼈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후우….”

허벅다리 위에 올린 손이 떨려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아직 무사히 돌아갈 희망은 남아 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넓은 장내를 울렸다.

[이곳으로 수많은 인간이 왔지만, 이렇게 ‘살아 있는’ 인간을 본 건 꽤 오랜만이구나.]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오케아노스이기에 중년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건 겨우 100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편협한 시각이었다.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는 청년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라. 특별히 짐의 용안을 보는 걸 허락하마.]

저렇게 말했으니 얼굴을 봐도 괜찮은 거겠지. 계단에서부터 서서히 눈을 올려 발끝에 닿았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발은 마치 대리석으로 조각된 석상 같았다. 그대로 발목을 덮은 튜닉을 지나 끝내 그의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짐은 오케아노스. 이 바다를 다스리는 자이니라.]

오케아노스는 그가 보살피는 바다처럼 투명한 물빛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너울거리는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려 폭포와 같았다. 비록 얇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탓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심해를 꿰뚫는 하늘색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보랏빛 산호로 만들어진 왕관이 하늘 높이 솟아 그의 권위를 나타냈으니- 가히 바다의 주인이라 불릴 고귀한 자태였다.

책에서 마주한 그림보다 훨씬 아름다워 잠시 정신이 팔렸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다시금 예의를 갖췄다.

“존함을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듣자 하니 짐의 아이들이 그대를 적으로 인식하여 데려왔던데, 그게 사실이더냐.]

“송구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절벽에서 파도에 휩쓸릴 뻔했던 친구를 구하다가 그만… 제가 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습니다.”

파도가 치기 직전 세이렌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들은 내게서 적의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탓할 수 없으니 스틱스의 조언대로 적당히 진솔하게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 자칫 영역 침범으로 오인될 뻔했던 사안은 무사히 넘어갔다.

[네일로스 경의 말대로 정말 그대에게서 오필리아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제가 지내는 곳에서 폭풍우에 휘말려 육지로 올라온 오필리아를 구조해 보호하고 있습니다.”

[호오…. 오필리아의 상태는 어떠한가.]

“아직 휴식이 필요하지만 회복 속도가 좋습니다. 상태가 호전되면 곧바로 전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도 오필리아는 혹 전하께서 걱정하실까 봐 제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사하다니 다행이구나. 그렇잖은가. 네일로스 경.]

[물론입니다. 전하.]

오케아노스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대로라면 뭍으로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그때, 오케아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의 말을 전해 준 대가로 원하는 걸 주마. 무엇이든 말해 보거라.]

“무엇이든… 말입니까.”

[그래. 천지를 훤히 비추는 보석이더냐. 아니면, 물에서 숨 쉴 수 있는 아가미더냐. 그 외의 금은보화는 전부 내어주마.]

기회가 찾아왔다. 오필리아의 안부도 전해 줬고, 이제 무사히 육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남아 있다. 오케아노스가 내게 호의를 품은 지금이기에. 아니, 지금이 아니면 감히 내뱉을 수도 없는 부탁이 있다.

“전하. …제가 원하는 건 물질이 아닙니다.”

[말해 보거라. 가능한 들어주도록 하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베일로 가려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폭풍우를 멈춰 주십시오.”

목숨을 건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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