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무사히 연회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새하얀 편지지엔 문장이 찍힌 실링 왁스 대신 말린 보라색 꽃이 붙어 있었다. 조심스레 코를 대어 보니 희미하지만 톡 쏘는 향기가 느껴졌다.
데히드 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들었던 게 언제더라.
예전 비브린트 숲에서 사이누르 종족을 무참히 죽인 마물 밀렵꾼이 향낭을 숨겼었다. 향낭 속에서 데히드 꽃이 발견되었고, 훗날 그것이 사이누르 유인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데히드 향낭이 곧 범인을 붙잡을 단서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향낭에서 시오 왕조를 뜻하는 사자 자수가 나타나 사건은 끝내 내 손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 데히드 꽃을 이렇게 다시 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아이리스를 통해 음모를 꾸민 클라우스 자작이 보낸 물건이라니. 단순히 우연으로 넘겨짚기엔 꺼림칙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간단한 진료를 마친 아스레인과 페르가몬 저택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디 일이 모두 끝나면 다시 이 저택을 찾아와 주세요.”
베제프의 친절한 배웅을 뒤로하고 아스레인을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백작님은 어떠셨어요?”
“별일 아니었네. 말 그대로 피곤해서 병이 든 것이지.”
“다행이네요.”
어째 페르가몬 저택에 오기 전보다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메마른 입술을 꾹 깨물자 눈치 빠른 아스레인이 말했다.
“표정이 왜 그러나.”
“…그게….”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창가에서 데히드 꽃을 봤습니다. 흔한 꽃은 아니기에 베제프 경에게 출처를 물었습니다. 그러니 친절히 말해 주더군요. 클라우스 자작에게서 연회 초대장과 함께 선물로 받았답니다.”
편지지에 장식된 말린 꽃을 본 아스레인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편지를 열어 보니 손바닥만 한 작은 카드가 있었다. 클라우스의 서명이 적힌 평범한 초대장이었다.
“마물에게 피해를 입은 영주들을 모아 방법을 고안해 보겠다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합니다.”
연회의 목적이 결코 범상치 않았다. 아스레인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가지런한 미간이 좁아졌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네.”
“연회에 참가하는 건 어떤가요? 설마 저희가 이 초대장을 가지리라곤 생각 못 했을 겁니다.”
“…생각해 보겠네. 수고했군.”
아스레인은 초대장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불필요한 말을 삼갔다. 마차 안에 알싸한 데히드 꽃향기가 감돌았다. 한 번 맡으면, 절대 잊지 못할 향기였다.
페르가몬 저택에서 봤던 대로 저 멀리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와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마차가 시내로 들어올 즈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빗줄기가 거세졌다. 수조 속 데네브가 전해 준 폭풍우의 시작이었다.
“이 정도 비라면 답사를 멈춰야겠네요.”
“음. 일단 우리도 보호소로 돌아가지.”
창밖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빗발을 뚫고 보호소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건, 숙소 건물 앞을 서성이는 학생들이었다. 왜… 다들 여기 나와 있는 거지? 안 좋은 예감을 뒤로하고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학생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하길 망설이자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대신 대답했다.
“리오… 그러니까 같이 온 학생이 사라졌어요.”
“예?! 어디서요?”
“님프의 숲을 지나던 길이었어요.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져서 답사를 접고 다들 비를 피하기 바빴죠. 그런데 숲을 빠져나오고 확인해 보니… 한 명이 없는 거예요.”
“…사람은 보냈어요?”
“지금 교수님들과 몇몇 학생이 다시 님프 숲으로 찾으러 갔어요.”
상의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아스레인과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빗발이 점점 굵어져 마차는 님프의 숲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아스레인과 함께 님프의 숲으로 들어갔다.
“발밑이 미끄러우니 조심하게.”
“네. 그보다 괜찮은 거겠죠…?”
“일단은 무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네.”
쏴아아- 거센 빗소리에 바로 앞에 있는 그의 목소리조차 묻혔다. 설상가상 바닷바람이 몰아쳐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손으로 작은 챙을 만들고 겨우 아스레인의 뒤를 따라가던 그때였다.
“우왁…!”
무언가 발목에 걸려 앞으로 휘청거렸다. 순간 옆에 있는 나무를 잡지 않았다면, 진흙탕에 그대로 코를 박을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발목에 걸린 장애물을 확인했다. 당연히 바닥에 버려진 나뭇가지나 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발목을 잡은 것은 고인 물웅덩이에서 튀어나온 손이었다.
힉, 짧게 숨을 들이쉬며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더욱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이윽고 투명한 손이 발목에서 종아리로 스르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아스레인을 불렀다.
“교수님! 여기….”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뿌옇게 피어오른 안개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방황하듯 주변을 살폈다. 아스레인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발목을 잡은 정체 모를 손도 물웅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귀걸이로 마력을 주입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스레인? …아그누스?”
혹시나 하고 나직하게 두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새벽마다 나를 괴롭히던 노랫소리였다. 저 멀리서 희미한 선율이 들려오자마자 본능적으로 등을 돌렸다. 만약 오필리아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오케아노스와 만나게 하려 길을 알려 주는 거라면….
“믿어 볼게. 그러니까 나를 안내해 줘.”
눈을 감고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점차 노랫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거친 파도 소리도 함께 커졌다. 그녀가 나를 바다로 안내했다. 돌아가야만 하는 바다로.
거센 빗줄기를 잊을 정도로 오필리아의 노랫소리에 집중한 그때였다.
“…태오!!”
누군가 이름을 부르기에 눈을 번쩍 떴다. 축축하게 젖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이리스!”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저는 아스레인 교수님과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아니, 그보다 아이리스는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사라졌다는 학생을 찾다가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
아이리스를 만나 안심하기도 잠시, 이곳이 바위 절벽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풍우와 함께 성난 파도가 절벽에 제 몸을 들이받으며 철썩 소리를 냈다. 아스레인이 사라진 지금은 학생을 찾기보다 무사히 보호소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다.
당장 아이리스를 데리고 가려는데, 밀려오는 바람에 묻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뇨. 정말로….”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절벽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미끄러지지 않게 몸을 낮춰 절벽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룩 튀어나온 돌부리를 붙잡고 겨우 매달려 있는 학생이 보였다.
“아이리스!! 여기…!”
다급한 부름에 달려온 아이리스가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뻗었다. 서둘러 그를 도와 학생을 절벽 위로 끌어올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쿵쿵 거칠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학생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으으….”
의식은 있었으나 소통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발을 심하게 뼜는지, 바짓단 아래로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이 드러났다.
“일단 옮겨야겠어요.”
“어어, 내가 업을게. 도와줘.”
몸을 숙인 아이리스에게 다친 학생을 업히려던 순간이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우릴 위협하는 불쾌한 냄새가….]
절벽 너머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바글바글 모인 관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것처럼 여러 개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 소리는 당장 숲을 빠져나가야겠단 생각마저 밀어내 버렸다. 멍하니 절벽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학생을 업은 아이리스가 물었다.
“야! 너 또 왜 그래.”
철썩, 절벽으로 부딪치는 파도가 점점 거세졌다. 그때였다. 아이리스의 등 뒤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절벽 아래서부터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놀랄 새도 없이 물기둥은 여러 줄기로 나뉘어 우리를 덮쳐 왔다.
“위험해요!”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려 아이리스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 덕분에 아이리스와 학생은 물줄기를 피했으나, 나는 미처 그 반동을 이기지 못했다. 무게중심이 기울어 휘청거리다가 그만 물줄기에 닿아 버렸다.
“태오!!!”
일그러진 아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대로 절벽에서 떨어졌다.
***
물안개가 짙어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숲을 샅샅이 뒤졌다. 그 이유는 하나, 그의 제자인 태오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스레인은 초조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피며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익숙한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마력이 차단되었거나, 그의 주인인 태오가 의식을 잃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참 동안 님프의 숲을 방황하던 그때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아스레인은 곧바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엔 가파른 절벽을 붙잡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아이리스와 힘없이 쓰러진 학생, 리오가 있었다. 아스레인은 일단 리오의 상태를 살폈다. 가벼운 탈수 증세와 발목 부상이 보이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단 점이었다.
“왜 그러나.”
“태, …태오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절벽에서 떨어졌어요.”
“…뭐?”
순간 아스레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당황과 절망이 한데 모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빚어냈다. 하지만 아이리스를 향한 감정은 또렷했다.
“또 너인가?”
“…예?”
날이 선 분노를 느낀 아이리스는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도서관에서 태오에게 저지른 만행을 알고 있네.”
아스레인은 퍽 신경질적으로 아이리스의 멱살을 쥐었다.
“바른대로 불게.”
단숨에 코앞까지 끌려간 아이리스는 눈앞에 드리운 위압감에 덜덜 떨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살벌한 금색 눈동자엔 여전히 불신이 가득했다. 클라우스 자작이 손찌검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이었다. 수틀리면 죽는다. 그리 생각한 아이리스는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이번만큼은… 제가 아니에요. 갑자기 거센 파도가 치더니 물기둥이 나타났어요. 미처 보지 못한 제가 휩쓸려갈 뻔했는데, 태오 덕분에 살았어요. 하지만… 태오는….”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 아스레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진짜예요!”
때마침 저 멀리서 우르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학생을 찾으러 온 교수와 보호소의 윈터였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스레인 교수. 왜, …왜 그러고 있나.”
보는 눈이 많아져 아스레인은 마지못해 멱살을 놓아주었다. 아이리스가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아스레인은 절벽 아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수십 번의 파도가 치는 동안에도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물체는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들은 다른 교수가 다가와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설마 아이리스가 태오를 밀었겠습니까. 아스레인 교수답지 않게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아스레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아스레인을 보았던 교수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가 도움을 청하는 눈짓을 보내자 윈터가 냉큼 입을 열었다.
“일단 폭풍우가 잠잠해진 후에 수색대를 보내겠습니다. 무리하게 배를 띄웠다간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날카로운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뿐이었다. 아스레인은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윈터에게 지시했다.
“이 일대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하게.”
“물론입니다.”
윈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학생들을 데리고 보호소로 돌아갔다. 곧바로 따라가려던 교수는 절벽 끝에 선 아스레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서 우리도….”
“학생들은 전부 맡기겠습니다.”
“…예? 같이 안 갑니까?”
“전 할 일이 있습니다.”
쏴아아, 굵은 빗줄기 사이로 금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교수는 별말을 얹지 못하고 그대로 걸음을 돌려 숲을 빠져나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마자 아스레인은 젖은 장갑을 벗으며 절벽 끝에 섰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 냈지만, 아스레인은 끄떡없었다.
“이 몸은 영 익숙해지질 않는군.”
낮게 중얼거린 아스레인은 고아한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손길을 따라 긴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물기가 전부 증발했다. 그 후 빗방울은 마치 뜨거운 물건에 닿은 것처럼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기화되었다.
고요한 분노가 담긴 눈동자가 바다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보겠구나. 오케아노스.”
그러자 검푸른 바다가 대답하듯 요란하게 파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