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59/305)

#59

그동안 마물과 인간의 공생이 가능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아이리스의 질문에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몇백 년간 이어진 종족 간 대립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단 사실을 알면서도 바보같이 이상적인 꿈을 꿨다.

현실은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았다. 마치 유토피아에 살다가 처음으로 벽 너머를 본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만들어 낸 우물에 유토피아란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나 자신을 가둔 걸지도 모르겠다.

밤새 생각이 끊이지 않아 잠들지 못했다.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아 차라리 느긋하게 숲길이라도 산책하고자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때 숙소 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어…? 교수님.”

이른 새벽부터 추운 바닷가를 돌아다녔는지, 그에게서 찬 기운이 물씬 풍겼다.

“깨우려던 참인데, 마침 잘됐군.”

“무슨 일이세요?”

“갈 곳이 있어 마차를 준비해 두었네. 당장 출발할 수 있겠나.”

“지, 지금요? 잠시만요…!”

일찍 일어나길 다행이었다.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 아이리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짐만 들고나왔다. 곧바로 멀미약을 챙겨 먹고 아스레인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가 출발했다.

오늘은 조별로 오케아노스 연안의 서식지를 살펴본 후 간단히 브리핑을 나눌 예정이었다. 여럿이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먼저 이동하는 건가…. 그러나 행선지를 묻기에 앞서 아스레인에게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저, 윈터 씨에게 들었어요.”

“음?”

“오케아노스 바다에 폭풍우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요.”

사실을 들은 아스레인의 반응이 두려웠다. 가늠하지 못할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오르겠지.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잔뜩 긴장해 있는데, 놀랍게도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포타모이 섬에 신전을 세우려 했기 때문 아닌가.”

예상치 못한 흐름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교수님, 알고 계셨어요?”

“어제 보호소장에게 들었네. 그래서 자세한 내막을 듣기 위해 영주를 만나기로 했지. 다행히 그쪽에서도 나를 만나길 바란다더군.”

“언제 가시나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지금.”

“…네?”

아스레인은 차분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가고 있네.”

뒤늦게 그를 따라 바깥을 보았다. 마차는 답사가 진행될 해안가가 아닌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행선지는 이 항구 도시를 다스리는 페르가몬 저택이었다.

어쩐지 어제보다 피곤해 보이는 아스레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호소장은 뭐라고 하던가요?”

“…필요악이라더군.”

“하, 말도 안 돼요. 지금껏 보호소를 후원하신 분이 과거에 쓰던 방법으로 마물을 억누르려 하다니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으니, 일단은 그쪽 말도 들어 보기로 했네.”

분노할 거란 생각과 달리 아스레인은 침착했다. 아니, 모난 구석 없이 둥그스름한 감정을 침착이라 뭉뚱그려 말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저건 체념이었다. 먼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에 아스레인에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고 위로한 적이 있다. 마물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여러 보호소에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보니 그게 얼마나 무신경한 위로였는지 깨달았다.

이 세상에 환멸을 느낀 아스레인은 진즉 기대를 저버렸다. 비슷한 사건을 수도 없이 겪어 파도에 무참히 깎이는 바위처럼 서서히 무뎌진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마차 안에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아스레인을 따라 내렸다. 거대한 저택 앞에 서 있는 남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청년은 아스레인을 보자마자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아스레인 백작님…. 아니, 교수님이라 부르는 편이 좋을까요?”

“편한 쪽으로 부르게. 그보다 자네는?”

“페르가몬 가의 장남 베제프입니다. 오늘은 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나왔습니다.”

어쩐지 젊어 보인다 했더니 백작이 아니라 그의 자제였다. 아스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갑군. 베제프 경. 내막을 알고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네.”

“깊은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제법 직설적인 말에도 베제프는 동요하지 않고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넓은 저택은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했지만, 어쩐지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주인 페르가몬 백작의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일까. 내내 먹구름 낀 하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복도 끝에 있는 접견실로 들어가자 숙련된 시종이 차를 내어 주었다. 잔을 들어 살짝 숨을 들이쉬니 향기로운 풀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이 지역에서 직접 재배한 허브티입니다. 추운 몸을 녹이기에 좋을 겁니다.”

베제프의 말대로 고된 바닷바람을 씻어 주는 따뜻한 차였다. 아스레인은 차를 홀짝이며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페르가몬 백작의 상태는 어떠한가.”

“최근 잠을 잘 못 주무십니다. 오늘은 다행히 의원이 지어 준 약 덕분에 사흘 만에 겨우 잠드셨습니다. 입맛이 없다며 끼니도 거르시고…. 주변에선 당연한 세월의 흐름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신 것 같습니다.”

“죄책감…이라.”

단풍잎이 새겨진 찻잔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비틀린 입꼬리와 찌푸린 미간이 아스레인의 감정을 십분 드러냈다. 선명한 불쾌감에 잠시 고민하던 베제프가 말했다.

“바쁘신 분이시니 긴말하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포타모이 섬에 신전을 지으라고 명하신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베제프는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원래는 지금쯤이면 항만에 끊임없이 배가 오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오케아노스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져 점점 페르가몬 항구로 들어오는 발걸음이 줄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도시는 항구와 운명을 함께합니다. 뱃일하지 않는 백성들도 관광객이나 잠시 쉬다 가는 선원들을 상대로 먹고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대로는 더 이상 배가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차분한 안색이 서서히 일그러져 숨어 있던 진심이 드러났다.

“게다가 오케아노스의 화를 억누르기 위해 매년 바다로 던지는 보석의 양도 꽤 됩니다. 다음 해 개국기념일에 폐하께서 친히 행차하시는데, 그 모습을 보셨다간…. 아니, 폐하께서 타신 배가 오케아노스의 장난에 휘말린다면….”

떨리는 숨과 함께 말을 멈춘 베제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도시뿐만 아니라 페르가몬 가문까지 위험해집니다.”

허벅지 위에 올린 베제프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가 느끼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 주던 아스레인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심정인지는 잘 아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고 생각하지 않나.”

“…압니다. 아버지께서도 잘못을 깊이 통감하고 계십니다. 천벌을 받은 거라며 가벼운 치료조차 거부하시니까요.”

후회하듯 미간을 찌푸린 베제프는 곧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다만, 교수님. 아버지는… 아니, 페르가몬 백작은 지금껏 보호소에 끊임없이 후원하신 분입니다. 테티스 보호소를 지금껏 보셨다면, 교수님께서도 아버지가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따가운 눈길이 아스레인을 향했지만, 정작 그는 말이 없었다. 베제프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부탁했다.

“그러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뭘, 어찌 해 달라는 건가.”

“오케아노스는 그 힘이 강하여 인간과도 의지로 대화가 가능한 마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만.”

“부디 그에게 전해 주세요. 다신 영역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부디 화를 거둬 달라고….”

몸져누운 백작에 발길이 끊긴 항구. 점점 기울어 가는 가세를 느낀 장남, 베제프는 기꺼이 머리를 숙였다. 대저택에 드리운 먹구름을 아스레인이라면 치워 줄 수 있으리라 믿은 모양이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아스레인이 두 손을 깍지 끼며 읊조렸다.

“이번이 마지막일세.”

“…교수님…!”

“단, 나는 전하기만 할 걸세. 용서를 할지 안 할지는 오케아노스의 마음이네.”

“그래도 감사합니다….”

베제프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번엔 당사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 이전에는 얼마나 황당한 일이 많았을까.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스레인을 보며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쪽은 아스레인이었다.

“괜찮다면, 잠시 페르가몬 백작을 보고 싶네만.”

“…아버지는 어쩐 일로….”

“의원이 오진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상태를 봐주겠네.”

아스레인의 호의를 눈치챈 베제프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베제프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 페르가몬 백작의 방에 도착했다. 아스레인은 시종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동안 나는 베제프와 문 앞에서 기다렸다.

“저택이 정말 고급스럽네요.”

“감사합니다. 경황이 없어 소개를 못 들었네요.”

“아, 저는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봤자 평민이니 편하게 대해 주심이….”

“아닙니다. 제자 분께서도 이 페르가몬을 위해 오셨으니 소중한 손님이죠.”

베제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중한 대접을 받아 기쁘다만, 미안하게도 이 저택은 너무도 황량했다. 사람이 사는데도 살가운 온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발소리만 울리는 저택 안을 둘러보다가 유독 겉도는 꽃을 발견했다.

“…저 꽃은….”

“보라색이 참 예쁘지 않습니까? 선물 받은 꽃다발인데 어머니께서 좋아하셔서 꽂아 두었습니다.”

꽃잎 끝이 바깥으로 말린 보랏빛 꽃- 데히드였다. 비브린트 숲 사건에서 향낭을 발견한 후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꽃이었다. 흔히 창가를 장식할 만한 꽃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베제프가 친절히 설명했다.

“연회 초대장과 함께 왔습니다.”

“…연회요?”

“예. 마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영주들을 모아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께서도 참석을 고민하시던데…. 이젠 됐습니다. 페르가몬은 그 유명한 아스레인 교수님께서 도와주겠다고 하시니, 굳이 먼 길을 갈 필요가 없지요.”

베제프는 접견실에서보다 훨씬 안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내 안색은 보라색 꽃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한 예감에 물들어 점점 어두워졌다.

“누가 보낸 거죠?”

“제가 기억하기론, 남동쪽 작은 도시를 관리하는 클라우스 자작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꽃잎을 어루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뚝, 손톱으로 인해 꽃잎 끝이 우악스레 뜯겨 나갔다. 클라우스 자작….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목적마저 수상한 연회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베제프에게 말했다.

“혹시 그 초대장을 대신 받을 수 있을까요?”

“…페르가몬으로 온 초대장 말인가요?”

“네. 저희 교수님께서 대단히 관심을 가지실 것 같아서요.”

베제프는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관련 없는 남의 연회 초대장을 다짜고짜 달라고 했으니. 하지만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교묘하게 빠져나가던 뱀의 꼬리를 붙잡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어려운 부탁일까요?”

“아뇨. 선뜻 도와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다행히 베제프는 별다른 의심 없이 걸음을 돌렸다. 얌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문득 데히드 꽃 너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파란 하늘이 오케아노스 바다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보였다.

“아, 베제프 경.”

수평선 너머로 몰려오는 먹구름이.

“무슨 일이죠?”

“오늘은 웬만해서 나가지 마세요.”

“오랜만에 날씨가 좋은 것 같은데… 왜죠?”

베제프는 걸음을 멈추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곧 폭풍우가 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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