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58/305)

#58

길 가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도 놀라겠지만, 수조 안에서 난생처음 보는 마물이 알은척하니 말문이 막혔다. 다시 확인해도 데네브와의 관계 평가는 ‘경계’였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를 알아?”

데네브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느러미를 퍼드덕 흔들며 놀랐다.

[너 못 보던 사이 인간의 말을 배웠구나.]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어?”

[이상하네. 그 아름답던 촉수도 없어지고…. 설마 인간이 뜯어 갔나?!]

도감 능력을 사용할 땐 마물의 언어를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원활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방적이었다. 나는 데네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데네브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유를 알지 못해 서로 눈싸움만 하던 그때였다. 말미잘 사이에서 또 다른 데네브가 튀어나와 내 앞을 서성이던 데네브를 들이박았다.

[야! 잘 봐. 누가 봐도 지느러미 없는 게 딱 인간이잖아.]

[어라…? 그러네. 이 인간한테서 오필리아의 마력이 느껴져서 착각했어.]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마자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난 오필리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

하지만 새로 튀어나온 데네브마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진짜 이상한 말을 하는 놈이야.]

[하지만 어쩐지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아.]

[그런가? …어이.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다면 네 볼품없는 지느러미를 움직여 봐.]

난 지느러미가 없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두 마리의 데네브는 화들짝 놀라 내게서 등을 돌리고 뿔을 맞대었다. 내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소곤소곤 얘기하는 모습이 마치 작전 회의하듯 보였다.

이윽고 밀담을 마친 데네브들이 말했다.

[네가 어떻게 우리말을 이해하는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됐어.]

[너희들의 왕에게 가서 전해. 그분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속에 쌓인 분노를 표출하듯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감히 그분의 터전을 침범했어. 파렴치한 놈들.]

[오케아노스 님께서 그걸 막기 위해 힘을 쓰신 거야.]

[그래서 우리들이 폭풍우에 쓸려 왔지. 하지만 억울하지 않아.]

[맞아. 그걸로 왕국을 지켜 낼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데네브들의 격렬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역시 오케아노스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친 이유는 인간의 개입 때문이었다. 아직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영역 침범이겠지.

[어서 바다로 돌아가야만 해.]

[가서 오케아노스 님을 도와야 해.]

두 데네브는 전장에 선 병사처럼 결의를 다졌다. 그러곤 화려하게 빛나는 지느러미를 펼치며 말했다.

[마물과 인간 사이에 선 자여. 이 인연을 소중히 여겨 충고해 주지.]

“…충고?”

[조심해. 또다시 폭풍우가 친다.]

의미심장한 경고를 끝으로 두 마리는 산호 속으로 사라졌다. 수조 벽에 이마를 대고 그들의 대화를 되짚어 보던 중이었다. 때마침 아이리스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야, 여기서 뭐하냐? 이동이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갑자기 아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너, 왼쪽 눈이….”

“네?”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곤 다시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내 왼쪽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잘못 봤나 봐. 얼른 나가자.”

앞서 걸어가는 아이리스를 따라가다 말고 문득 수조를 돌아보았다. 깨끗한 수조 벽에 어렴풋이 장밋빛으로 물든 홍채가 비쳤다. 조제실에서 아스레인과 거울을 봤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그새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불안하게 떨리는 손으로 왼쪽 눈을 가렸다. 그러자 희미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또다시 폭풍우가 친다.’

***

간단한 보호소 견학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갔다. 교수는 1인 1실로, 학생은 2인 1실로 배정되었다. 발 빠르게 먼저 의견을 내어 아이리스와 한 방에 머물게 됐다. 물론 아이리스는 귀찮은 놈과 같은 방을 쓰게 됐다며 짜증을 냈다. 그래 놓곤 은근슬쩍 내 짐을 대신 옮겨 주었다. 참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짐 정리가 끝나자 윈터는 각방을 돌아다니며 소박한 만찬을 준비해 두었다고 알려 주었다. 단순한 저녁 식사인 줄 알고 부담 없이 갔다가 아이리스와 동시에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어디가 소박한 거야….”

말만 만찬이지, 연회나 다름없었다. 자그마한 홀 가운데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처음 보는 음식들이 즐비해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슬그머니 구석으로 빠져 와인을 홀짝였다. 이런 자리가 껄끄러운 건 아이리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이리스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연회장 안을 둘러보며 비아냥댔다.

“있는 자식들은 틈만 나면 파티하려고 한다니까. 안 그러냐?”

“하하… 그보다 이 많은 요리를 준비하고 옮기느라 꽤 힘들었겠다, 싶네요.”

“역시 너도 그 생각할 줄 알았다.”

초라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이, 이곳저곳에 인사를 다니는 윈터가 보였다. 직접 안내를 나온 것도 모자라 연회장을 활보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보호소 말단인 모양이다.

아무도 못 보는 줄 알고 한숨을 쉬던 윈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윈터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우리가 있는 구석으로 슬슬 다가왔다.

“마음에 드시나요?”

의례적인 질문에 아이리스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대답했다.

“제가 전에 다녀온 항구는 꼭두새벽까지 선원들이 술을 마시는 통에 시끄러워서 짜증 났는데, 여긴 조용해서 좋네요.”

그러고 보니 나름 큰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창밖엔 불빛 하나 없었다. 윈터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페르가몬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였죠.”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

“아시다시피 오케아노스 때문입니다.”

윈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최근 들어 폭풍우가 자주 치는 바람에 서서히 배가 끊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새벽녘이 되면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죠.”

“오케아노스는 원체 변덕스러웠잖아요.”

“그래도 가끔이었습니다. 찬가를 부르며 지나가거나, 보석 같은 귀중한 물건을 바다로 던지면 전설대로 잠잠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바다로 그 무엇도 지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윈터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문득 제각기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떠올랐다.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오필리아의 말, 터전을 침범했다는 데네브의 대화. 그리고… 레톤 신전에서 아스레인에게 들은 이야기.

“혹시 오케아노스의 영역을 침범하셨나요?”

“…예?”

“바다에 무언가를 지은 건 아닐까 싶어서요.”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던 윈터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찰나에 스친 동요를 놓치지 않고 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이를테면… 신전이라든가.”

말이 끝나자마자 윈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다 알고 오신 건가요?”

“아뇨. 단지 추측이었어요. 마물들이 날뛰는 이유는 보통 영역 침범이니까요.”

선뜻 말하길 망설이며 움찔거리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실은… 몇 달 전에 영주님께서 오케아노스 바다에 신전을 짓기 위해 인력을 모으셨습니다.”

“바다에 신전을 지을 곳이 있나요?”

“오케아노스 바다가 워낙 넓기에 몇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커다란 포타모이라는 섬에 짓기로 계획했죠.”

이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나,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아 일부러 콕 집어 물었다.

“애초에 섬이라면 신도들이 자주 가지도 못할 텐데, 왜 굳이 그곳이에요?”

“꽤 예전부터 마물의 힘이 강한 곳에 신전을 지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차차 줄어들고 있지만, 이미 지어진 신전은 여전히 허물어지지 않았죠.”

역시 그 이유였다. 수상한 그림자를 조사하기 위해 레톤 신전에 갔을 때, 아스레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마물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잦은 지역에 일부러 신전을 지었다고. 신전이 내뿜는 신력으로 마물의 힘을 억누르는 단순하고도 무식한 방법이었다.

“갑자기 신전을 짓기로 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게….”

갑자기 곁눈질로 주변을 살핀 윈터가 목소리를 낮췄다.

“다음 해 건국 기념일에 황제 폐하께서 이곳, 페르가몬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바다를 향해 보석을 뿌리고 찬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신다면….”

대륙의 유일한 주인이라 생각하는 황제로선 당연히 불쾌하겠지.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자 윈터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계획은 전부 무산되었습니다. 정확히는 포타모이 섬 가까이에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설마….”

“예. 신전 건축을 위한 재료를 운반하던 배가 돌연 태풍으로 침몰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그 배에 탄 이들 대부분이 다리를 잃거나 더는 앞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 탓에 인부들과 선원들은 전부 이 일에서 손을 뗐습니다. 이젠 오케아노스란 이름만 들어도 기겁하죠.”

도저히 제정신으론 들을 수 없는 일화에 들고 있던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바짝 타들어 가는 것이 와인 때문인지, 어리석은 선택 때문인지 모르겠다. 윈터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시도 때도 없이 폭풍우가 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거의 알 겁니다. 다만, 화가 엄한 곳으로 튈까 봐 감히 입에 담지 않는 거죠.”

“분명 방법이 잘못된 걸 알았을 텐데, 왜 막지 않으신 거죠?”

“처음엔 소장님과 저희도 당연히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행동은 할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요.”

“지금껏 보호소 테티스에 구조되어 자연으로 무사히 돌아간 마물만 수백 마리가 넘어갑니다. 그 중엔 약초나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는 마물도 있죠. 그 모든 걸 가능케 한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윈터는 연회장 벽에 걸린 초상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영주님이십니다. 아낌없는 후원 덕분에 이곳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께 더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림 속 중년은 일반적인 귀족의 초상화처럼 부를 드러내지 않고, 소박한 옷차림으로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그가 오케아노스 연안을 다스리는 백작일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초상화를 바라보던 윈터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부디 영주님을 너무 탓하지 말아 주세요.”

그 후 윈터는 걸음을 돌려 보호소장에게 갔다. 텅 빈 와인 잔을 든 채 멍하니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개국 기념일에 황제가 직접 도시에 행차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진 알고 있다. 그러니 보호소에 아낌없이 후원하던 영주마저 혹여 트집 잡힐까 마물의 서식지를 침범하고 만 것이다. 그 잘못으로 인부와 선원들은 심하게 다쳤고 바닷길은 닫혔다. 심지어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오케아노스 바다는 쉬지 않고 몰아치고 있다.

이해관계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를 짚으니 아이리스가 넌지시 물었다.

“왜 죽상이야? 이제 와 다친 사람들이 안타까워?”

“안타깝지만, 그보다 문제는 죄 없는 마물들까지 피해를 봤다는 거예요.”

한숨을 내쉬며 와인 잔을 내려놓는데, 아이리스가 내 손목을 턱 붙잡았다.

“넌 가끔 보면 인간보다 마물을 우선하는 것 같다?”

“굳이 제가 아니어도 인간의 편에 선 사람들은 많거든요. 하지만 마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는 없죠.”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니 그의 손이 스르르 떨어졌다.

“그래. 뭐… 너 같은 놈도 있어야 균형이 지켜지지.”

오늘은 왠지 술이 좀 들어가야겠다. 둥근 잔에 와인을 채우고 텁텁한 입 안을 헹궜다.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아이리스는… 마물과 공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아이리스는 당황한 기색 없이 즉답했다.

“공생? 말이야 쉽지.”

아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다들 겉으로는 공생을 바라지만, 막상 진심은 다를걸? 여기만 해도 그렇잖아. 마물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길 바라지.”

“…….”

“꼭 마물만 그런 게 아냐. 모든 관계에서 칼을 쥔 쪽이 오히려 불안해하지. 지금은 얌전한 저놈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몰라 전전긍긍하거든.”

어깨를 으쓱인 아이리스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난 그래서 널 보면서 좀 신기했어. 너만은 진심으로 마물을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

나도 모르게 와인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리스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런데 지금 그 표정을 보니 애매하네.”

아이리스는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야말로 진심으로 마물과 공생이 가능하다 생각하냐?”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말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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