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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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꽤 직설적인 질문에 헛기침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스레인에게 닿아서 좋았냐고? 당연히 좋았지! 줄곧 상상해 왔던 일이 실현되니 꿈만 같았다. 그렇지만 꿈은 꿈으로 남았어야 했다. 아스레인을 마음껏 만지고 나서도 후환이 전혀 두렵지 않은 상상과 달리, 현실은 수습의 연속이다.

아무리 오필리아에게 현혹되었다지만, 애초에 그런 욕망을 품었다는 자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깊은 후회를 한숨에 녹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어머. 정말?]

“…오히려 서먹해질 것 같아.”

역시 상상은 상상일 때가 제일 좋다. 아스레인을 찾으러 온실에 온 지금도 아무 생각이 없다. 다짜고짜 당신을 만지고 싶어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할까? 하하…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자 오필리아가 촉수로 수조 벽을 툭툭 건드렸다.

[뒤늦게 변명을 해 보자면, 너를 현혹하려던 의도는 없었단다. 그냥 심심해서 노래를 불렀는데… 설마 거기에 빠져들 인간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니.]

“그래… 약한 내 잘못이지.”

[후후, 때론 우리와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이 독이 되기도 하지.]

나긋한 목소리가 물결처럼 서서히 퍼져 갔다. 그러고 보니 아스레인도 일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아무래도 나는 기가 약해서 귀신이 자주 들락날락거리는 몸처럼 마력이 극도로 부족하여 마물과 쉽게 공명하는 모양이다. 이 체질을 내가 어찌 손쓸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점점 착잡해지기만 해서 수조를 쓰다듬으며 인사했다.

“이만 가볼게. 푹 쉬어.”

그때 오필리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

“왜?”

[부탁 하나만 들어줘.]

다른 누구도 아닌 오필리아의 부탁이라 미심쩍은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부탁…?”

[오케아노스 님께서 불순물을 처리하려 폭풍우를 만들어 내셨는데, 그만 내가 휘말렸지 뭐니. 분명 나를 걱정하고 계실 거야.]

“그렇겠지. 너희들의 왕이니까.”

[말이 잘 통하네. 그러니 나를 오케아노스 님께 데려가 줘.]

예상치 못한 부탁에 눈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뭐? 안 돼. 넌 아직 다친 몸이야.”

[단호하긴. 그럼 오케아노스 님께 내 안부를 전해 주겠니? 난 무사하다고.]

“내가 무슨 수로 그분을 만나.”

[왜 못 만나? 두 다리가 있는 너는 가려거든 어디든 갈 수 있잖니.]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라 혼자 힘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필리아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전설에 등장하는 마물 오케아노스를 만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왕국은 바닷속. 어쩌다 만나더라도 멀쩡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다.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자 오필리아가 매혹적인 몸짓을 지으며 말했다.

[보답으로 또 힘을 빌려줄게. 네 안에 잠든 욕망을 깨울….]

“아니. 아니야. 됐어. 그건 이제 정말 됐어.”

다급히 양손을 내저으며 오필리아를 말렸다. 한 번 더 현혹되었다가 무슨 꼴을 볼지 모른다. 그보다 더한 욕망은…. 아냐. 생각하지 말자. 살짝 상기된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에 오케아노스 바다에 가니까 기회가 된다면 전해 줄게. 하지만 장담은 못 하겠어.”

[정말 고마워. 이 은혜 잊지 않을게.]

“만날지 안 만날지 모른다니까, 참.”

열심히 정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필리아는 이미 내가 오케아노스를 만나기 위한 모험 길에 올랐다고 믿었다. 날파리를 쫓듯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며 걸음을 돌렸다. 서서히 수풀에 수조가 가려질 즈음, 등 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반드시 그분을 만나게 될 거란다.]

확신에 찬 예언을 들으니 괜히 불안해졌다. 물론 나 혼자라면 전설의 마물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바다로 뛰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현지 관찰이 아니라 단체 답사다. 자칫 나로 인해 답사 인원 전체가 오케아노스의 장난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온실 중심부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책을 들고 오는 아스레인과 딱 마주쳤다. 마치 메두사의 눈을 본 듯 제자리에 멈춰 서서 눈만 끔뻑였다.

“…교, 교, 교수님….”

“어찌 더 쉬지 않고, 여긴 웬일인가.”

아스레인은 매번 재킷을 입고 다니는 평소와 달리 오늘은 비교적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다. 게다가 첫 번째 단추는 고맙게도 풀려 있었다. 벌어진 셔츠 자락을 멍하니 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그때 교수님께서 주신 약초 덕분에 상태가 좋아졌어요.”

“그럼 다행이네만, 답사 전까진 무리하지 말게.”

“네네. …당연하죠.”

흘끔 올려다보니 내 안색을 살피는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고요한 눈동자가 어둑한 조제실에서 마치 나를 꿰뚫을 듯 강렬해졌다는 것이.

이윽고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아스레인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눈을 떴으나 금안은 여전히 나를 비추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속을 알 리 없는 아스레인은 매끈한 입술로 미소를 그렸다.

“연구실로 가지.”

끝내 아스레인은 조제실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배려였겠지만, 오히려 신경 쓰였다. 마치 내가 기억하고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연구실로 돌아와서도 연신 눈치만 살피니 아스레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최근 오케아노스 바다에 폭풍우가 자주 쳤다더군.”

“지난해에도 이랬나요?”

“아니, 기록을 찾아봐도 확연한 차이가 있네. 아직 자세한 상황은 듣지 못했지만… 일대 날씨를 바꾸는 것이 오케아노스의 능력이니 연관성을 지울 순 없지.”

“단순한 장난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아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 폭풍우가 잦아진 이유가 오케아노스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면, 달리 원인이 있을까. 문득 오필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오케아노스가 불순물을 처리하기 위해 폭풍우를 일으켰다’고 표현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일단 해안에 도착하면 인근 보호소에 들러 상황을 파악할 걸세.”

“역시 오케아노스에 대해 미리 공부하는 쪽이 좋겠네요. 전 도서관에 다녀올게요.”

“그쪽이 자네 마음에 편하다면야 그렇게 하게.”

곧바로 메모지를 챙겨 문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아스레인이 눈에 밟혀 우뚝 멈춰 섰다. 아무래도 조제실에서 저질렀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온실에서 들고 온 책을 살펴보는 아스레인을 용기 내어 불렀다.

“저… 교수님.”

아스레인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다짜고짜 머리부터 숙였다.

“조제실에서 의도치 않게 실수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현혹된 상태였으니 자네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오필리아는 그저 장작에 불씨를 던졌을 뿐이다. 욕망이란 이름의 장작을 내내 가슴에 품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부디 아스레인이 그 사실만큼은 모르길 바랐다. 하지만 단 하나, 충동으로 물들지 않은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메모지가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손에 힘을 꽉 쥐며 말했다.

“…같이 바다로 가자는 말은 진심이었어요.”

얼굴 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바닥을 쓸듯 눈을 굴렸다.

“교수님께선 항상 바쁘시잖아요? 그래서 한 번쯤 일하는 모습이 아니라 쉬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하하… 물론 이번에도 결국은 일이지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을 여는 순간 머리가 백지장처럼 변해 횡설수설했다.

“바쁜 와중에도 매번 절 챙겨 주셔서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봐요. 제가 교수님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실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가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아스레인이 부담스럽다고 했으면 좋겠다. 같잖은 걱정을 하는 내게 무례하다고, 그런 배려 필요 없으니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딱 잘라 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모진 말도 전부 됐으니까….

“내가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자네가 곤란해지는 건가.”

부디 착각할 만한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드디어 답사 날이 되었다. 이번 답사는 나와 아스레인 말고도 두 명의 교수와 여덟 명의 학생이 함께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었으나 오케아노스의 장난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안겔루스 대학에서 오케아노스 해안까지 마차로 달려 꼬박 반나절이 지났다. 슬슬 멀미약의 효과가 사라져 곤죽이 되어 가던 차였다. 창밖으로 지겨운 말발굽 소리가 아닌, 끼룩끼룩- 반가운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 보니 높이 올라선 돛대 위에서 깃을 고르는 갈매기가 보였다.

“…바다다…!”

마부의 힘찬 기합과 함께 해안가에 마차가 줄지어 멈췄다. 곧바로 마차에서 내려 속 시원하게 기지개를 폈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짭조름한 내음이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아, 살았다….”

드디어 오케아노스 연안이라 불리는 도시, 페르가몬에 도착했다. 거대한 항구도시답게 자로 그은 듯 일직선인 항만에 배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어디부터 바다인지 헷갈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차에서 짐을 내리다 말고 맑은 하늘을 보며 감탄했다.

“와,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갑자기 폭풍우가 친다고…?”

그때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혼잣말에 친절히 답해 주었다.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짐을 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아보니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성이 서 있었다.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니 남성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인근 보호소 ‘테티스’에서 일하는 연구원 윈터입니다. 오늘 안겔루스 대학 여러분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연구원 윈터는 소개를 마치자마자 능숙하게 답사 팀을 이끌고 보호소로 향했다. 해안가와 제법 가까운 탓에 보호소는 길쭉한 편백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자칫 어두운 밤에 길을 잃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바다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마물이 거처하는 본관을 중심으로 양옆에 별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답사 기간 동안 머물 숙소는 오른쪽 별관이니 부디 편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아, 관계자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반대편 별관으로 찾아와 주세요.”

간단한 안내를 마친 윈터는 가장 큰 본관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중요한 온실과 달리 창문이 거의 없는 이곳은 거대한 아쿠아리움 같았다. 구역별로 수조의 크기가 달랐고, 마물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날씨가 변덕스럽기로 소문난 오케아노스 바다 근처이기에 당연히 수생 마물 위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몇 마리 정도가 폭풍우에 휘말리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여 벌써 수십 마리가 넘어갑니다.”

그 탓에 수조가 부족해져 오필리아가 불가피하게 대학 내 온실로 온 거였다. 폭풍우가 멈추지 않으면 앞으로도 해안가로 쓸려 오는 마물이 늘어날 것이다. 설상가상 기절한 마물들을 누군가 고의로든 실수로든 포획해 갈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 내에 폭풍우가 치는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보호소 안을 돌아다니던 윈터가 책장 두 개를 붙여 놓은 듯 커다란 수조 앞에 멈춰 섰다.

“곧 이 보호소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갈 아이들을 보여드리는 게 좋겠군요.”

수조가 넓은 만큼 가림막을 거두는 것도 일이었다. 윈터가 커튼 끝자락을 잡고 족히 열댓 걸음을 가자 서서히 수조 안에 있는 마물이 드러났다. 몇몇은 아치 모양 바위 아래 몸을 숨기고 자고 있었고, 또 몇몇은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지느러미 끝이 빛나는 마물이 데네브입니다. 위에서 보면 꼭 별자리 같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죠.”

윈터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홀로 수조 옆면으로 향했다. 바닥에 쪼그려 앉자 산호 아래 숨어 있던 마물 ‘데네브’가 보였다. 등과 가슴에 난 지느러미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나고, 머리에는 뭉뚝한 뿔이 달린 어류 마물이었다. 지느러미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 같았다.

데네브가 이쪽을 돌아볼 때까지 숨죽여 기다렸다. 이윽고 제자리에 멈춰 있던 데네브가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반가운 시스템의 음성이 들렸다.

- 새로운 마물과의 교감을 확인했습니다.

“응. 바로 보여 줘.”

- NO. 24 ‘데네브’의 정보가 포함된 페이지를 펼치겠습니다.

수조 옆에 도감을 실재화시켜 놓고 특징을 눈으로 훑었다. 작은 물고기나 유충을 빛으로 유인하여 뿔에 있는 독으로 마비시킨단다. 속으로 감탄하며 데네브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때였다.

갑자기 데네브가 쏜살같이 다가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너, 무사했구나!]

“…어?”

[여기 온 애들도 네 소식을 모른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관계 평가는 여전히 경계인데, 어째서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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