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오필리아를 만난 후로 하루 종일 바다를 떠도는 기분이다. 현실을 도피하듯 일부러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스스로 침몰한다. 그러면 물방울에 싸인 듯 자극이 느껴지지 않는 아득한 상태에 접어든다. 바로 그때 물속을 헤엄치는 오필리아가 된다.
어젯밤엔 돌연 정원에 있는 연못을 보고 무작정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왠지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물에 비친 얼굴 위에 비늘이 돋아났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단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연못에 손을 담그며 나 자신을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인상을 찌푸린 아스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언제 출근했더라. 연못에 손을 넣은 이후로 기억이 뚝 끊겼다. 창밖을 보니 이미 점심이 지나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내 말 들었나?”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휴일이 끝나고 다음 주에 답사 출발한다고 했네.”
“아아….”
“태오?”
“아,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한 박자씩 느린 대답에 아스레인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어제 온실에 갔었나?”
“온실… 갔었죠.”
“그렇군. 공교롭게도 오필리아가 바로 어제 기운을 차렸다던데.”
오필리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해수면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줄곧 초점 없이 흐릿했던 눈동자가 초롱초롱히 맑아졌다.
“맞아요. 제가 갔을 때도 오필리아는 깨어 있었어요. 수조 안을 유영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당시 모습이 떠올라 두 손을 곱게 모으며 감탄을 흘렸다. 급기야 상상은 환상이 되어 허공에 오필리아의 형상이 그려졌다. 수조 안에서 봤던 모습대로 붉은 촉수를 흔들며 석산처럼 피어났다.
넋 놓고 오필리아의 형상을 눈으로 좇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망상을 방해했다.
“자네 혹시….”
“네?”
“아무것도 아닐세. 일단 온실로 가지.”
오필리아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는 걸까.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온실로 들어가자마자 망설임 없이 수조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어제처럼 힘겹게 길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벌써부터 가녀린 노랫소리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거대한 수조 앞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연구원이 보였다.
“이상하네….”
“무슨 일인가.”
“아, 교수님. 마침 잘 오셨어요.”
연구원은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설명했다.
“오필리아가 어제부터 도통 아무것도 먹질 않아요. 인수받을 땐 분명 작은 물고기라면 가리지 않고 먹는다고 들었거든요.”
여유롭게 움직이던 어제와 달리 오필리아는 산호에 기운 없이 누워 있었다. 수조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촉수 끝에서 붉은 액체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머리를 열어 직접 생각을 욱여넣은 것처럼 오필리아와 관련된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살아있는 게 아니면 안 돼.”
“예?”
“아… 죄송해요. 오필리아는 죽은 생선엔 절대 입을 대지 않아요. 살아있는 것의 피에 식욕을 느끼니까요.”
아차 싶은 연구원은 곧장 먹이가 담긴 양동이를 통째로 가져왔다. 그 후 작은 생선을 전부 수조로 쏟아부으니 오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식사를 시작했다. 빠르게 활력을 되찾아 가는 모습에 연구원은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책에서 봤어요.”
“역시 교수님의 제자는 다르네요~”
멋쩍은 웃음소리가 온실 안에 허망하게 울렸다. 그 사이 배를 채운 오필리아는 어제처럼 넓은 수조를 마음껏 떠돌아다녔다. 모두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오필리아의 몸짓을 구경했다.
“아름답죠? 이런 마물이라면 몇 시간이라도 앉아서 구경할 수 있겠더라고요.”
장난스럽게 웃는 연구원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아름다워요.”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것처럼 갈라진 촉수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우아한 춤사위를 지켜보았다.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 갔다. 이젠 의미를 알 수 없는 속삭임까지 섞여 들려왔다.
저 수조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무의식중에 한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태오.”
“…네.”
“나를 보게.”
한 걸음 뒤에 있던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시야에서 오필리아가 사라져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뺨을 감싸 쥐어 억지로 눈을 맞췄다.
“지금 뭐가 들리나.”
“…교수님의 목소리요.”
“다른 건.”
“없어요.”
짧게 대답하자마자 아스레인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단단히 걸렸군.”
그 후 아스레인은 연구원에게 먼저 실례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내 팔을 붙잡았다. 오필리아로부터 떨어지고 싶지 않아 질질 끌려가다시피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조제실이었다.
아스레인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손짓만으로 커튼까지 쳐 버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던 햇빛이 사라져 주위가 어두워졌다. 불안하게 떨리는 숨소리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바른대로 말하게. 지금도 무언가 들리나?”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에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물소리. 그리고… 나를 찾는 노랫소리.”
깊은 바다에 잠수한 것처럼 불필요한 소음이 점차 멀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내가 태어난 곳은 물이 아닌데도.
“돌아가야 해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아스레인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곤 묵묵히 약초를 꺼내어 유리병에 넣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슬픈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 바다로 돌아가면, 감히 마음에 품을 수 없는 이 사람은 어찌 되나. 다신 못 보겠지. 그것만은 죽어도 싫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가 날개뼈 위에 손을 올렸다. 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을 따라 스르르 손을 내리며 물었다.
“같이 갈래요?”
“…뭐?”
아스레인이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커튼 사이로 흘러 들어온 햇빛이 그의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주저 않고 그의 뺨을 감싸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랑 같이 바다로 돌아가요. 아스레인.”
“…….”
“그곳은 분명 넓고 편안할 거예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그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따라 은근히 목선을 쓸어내리자 아스레인의 눈썹 한쪽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점점 대담해지는 손길을 셔츠 깃 안으로 밀어 넣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당신도 이곳에서 도망치길 바라고 있잖아요. …응?”
검지가 단단한 쇄골에 닿을 즈음, 아스레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네만….”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닐 테니 못 들은 걸로 하지.”
우악스러운 악력에 손목이 잡혀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대로 놓아주는 줄 알았건만, 갑자기 아스레인이 내 손을 끌어당겨 여린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안광이 서린 눈동자는 이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라는 듯 나만을 향했다. 부드러운 감촉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내가 방금 무슨 짓을, 아니. 대체 무슨 일이….
“그….”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군.”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두고 아스레인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램프에 불을 피워 병 안에 담긴 약초로 불을 옮겼다. 연기와 함께 서서히 피어오르는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쾌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아스레인은 일부러 병을 내 얼굴로 들이밀었다.
“예전에 마물이 자네에게 공명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예?”
“태오. 자네는 지금 오필리아에게 현혹된 상태일세.”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전 멀쩡해요.”
“그래?”
작게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이 내게 병을 건네며 말했다.
“그 얼굴을 직접 보여 주는 쪽이 빠르겠군.”
탁상에서 작은 거울을 가져와 내 얼굴을 비쳐 주었다. 왼쪽 눈이 오필리아의 촉수처럼 옅은 붉은색을 띠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치자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이…건….”
“오필리아를 만진 적 있나?”
“아뇨…. 닿진 않았어요.”
“언제부터 이랬는지 말해 주게.”
“…어제 온실에 들어가자마자 노랫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막상 떠올리려 하니 어제부터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죄송해요. 기억이 안 나요. 왜… 이런 거죠?”
“사이누르의 마안처럼 오필리아에겐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네. 하지만 닿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내뿜는 마력만으로도 취하다니….”
아스레인의 목소리와 오필리아의 노랫소리가 이리저리 뒤엉켰다. 게다가 풀냄새를 맡을수록 편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오필리아의 힘이 약해져서 괜찮을 줄 알았건만, 그만큼 자네가 마력에 취약하다는 걸 잊고 있었네.”
“…죄송해요.”
“일단 이 향을 계속 머리맡에 피워 두게.”
부축을 받으며 기숙사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저 등 뒤에서는 끊임없이 노랫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혼자 두고 가지 말라는 애처로운 부름이었다.
***
아스레인의 당부대로 계속 약초를 피운 탓에 풀냄새가 몸에 밸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려도 참고 기다렸다. 반드시 답사 전까지는 제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 내내 이어진 잠에서 깨어나니 평소보다 훨씬 개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물에 잠긴 듯 흐리멍덩하던 의식이 맑아졌다. 다행히 답사에는 참가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동시에 절망이 찾아왔다.
“…으음….”
그날 아스레인과 조제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갑자기 등에 손을 대고 쓸어내리는 것도 모자라 대담하게 얼굴도 만졌다. 그리고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아스레인이라고.
“진짜 미쳤구나….”
학회 뒤풀이에서 소주를 세 병 마시고도 교수님 앞에서는 절대 실수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물에게 현혹되어 아스레인에게 크나큰 실수를 해 버렸다. 게다가 이어진 그의 언행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물론 내게 충격을 주려고 한 행동이겠지만, 굳이 고개를 숙여 내 손바닥에….
“으아아악!”
더는 떠올릴 수 없어 애꿎은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마음처럼 말랑한 솜이 움푹 파였다. 도감에서 노랫소리를 듣는 자는 내면의 욕망이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이거였나. 별거 아니리라 넘긴 내가 미친놈이었지. 게다가 이 몸뚱이는 어째서 다른 사람은 그냥 넘길 현혹을 쉽게 당하느냔 말이다.
“일단 출근하자…. 가서… 사과하든 해야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잡념을 전부 씻어 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연구실 앞에 도착하니 호기롭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슬쩍 문틈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회의인 건가? 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대학원생이 말했다.
“아, 교수님 아까 온실에 계셨어요.”
하필이면 온실이다. 아직 불안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노랫소리에서 벗어났으니 조심스럽게 온실로 향했다. 다행히 온실로 들어간 후에도 머릿속은 조용했다. 다만, 넓은 온실 안에서 아스레인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비상용인 귀걸이로 연락을 할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여……다.]
저 멀리서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따라가자 또다시 수조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춤추는 여인은 없었다. 오필리아는 마치 죽은 것처럼 돌바닥에 널부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싸늘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황급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순간, 선명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안녕. 놀란 얼굴도 제법 귀엽네.]
“……오필리아?”
수조 안을 들여다보니 오필리아는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인사하듯 촉수를 휘둘렀다. 오필리아가 죽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대체 언제 관계 평가가 올라갔지? 처음 인식했을 땐 분명 ‘경계’에 지나지 않았다. 곧바로 도감에서 오필리아와 관련된 페이지를 펼치자 관계 평가에 적힌 두 글자가 굵게 드러났다.
“친밀…이잖아?”
[네 덕분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어.]
“…그거 때문이었구나.”
현혹된 탓에 시스템의 음성조차 듣지 못한 모양이다. 관계 평가가 오른 건 기쁜 일이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봐 선뜻 오필리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이 상황이 마냥 즐거운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기쁨을 드러냈다.
[그래서 나도 보답을 해 줬지. 마음에 드니?]
“보답이라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니 오필리아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평소의 너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을 했잖아? …어때,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