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54/305)

#54

아이리스의 계획은 일단락되었으나 어두운 예감이 말했다. 그것은 단지 커다란 음모의 일각일 뿐이라고. 분명 카르사 제국의 평화를 좀먹는 벌레가 그의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대담하게 배후를 찾겠다고 말하니 줄곧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난 이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아.”

목에 두른 가죽끈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타인이 목숨을 쥔 탓에 불안한 마음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알아요.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요.”

체스로 치면 아이리스는 폰이다. 고작 폰 하나 잃는다고 게임이 끝나진 않으나 타격은 확실하다. 어쩔 땐 방벽이 되기도, 가능하다면 직접 킹을 치기도 하는 게 폰이니까.

아마 배후는 당분간 의심을 피하기 위해 커다란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조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목적이 마물에 있다면, 언젠간 반드시 부딪치게 된다.

“그러니 그쪽에서 먼저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뭐…?”

“일단 아이리스는 전처럼 안겔루스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요. 학생 기숙사엔 보는 눈이 많으니 웬만해서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적어도 아이리스가 안겔루스 대학 내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안심할 수 있다. 문제는 아직도 아이리스의 후견인으로 남아 있는 클라우스 자작과 접점을 최대한 없애야 한다는 점이다.

입술을 뜯으며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코앞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네. 기왕이면 그 목줄에 얽힌 계약을 푸는 방법도 알아봐야겠어요.”

제법 진지한 태도였으나 아이리스는 내 진심을 비꼬아 들은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내겐 네가 도와줄 만큼 이용 가치가 없어. 난 이미 버려졌다고. 알아?”

“그럼 다행이고요. 아예 그쪽이랑 연을 끊을 수 있으면 더 좋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꼬리가 이상하게 비틀렸다.

“이거… 생각보다 단단히 미친놈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이리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는 듯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아이리스.”

“또 뭔데?”

“전 당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 안 해요.”

아이리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고해성사하듯 그의 등에 대고 진심을 전했다.

“저도 간절했거든요. 그때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전 이미 죽고 없을 거예요. 그게 마지막 기회였어요. 그러니 죄책감은 못 느끼겠네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당신이 부러워요. 아이리스.”

“…뭐?”

“그때 만약 교수님께서 당신을 먼저 봤다면, 당연히 제자로 들이셨을 거란 그 자신감이 부러워요. 그만큼 능력 있단 거겠죠. 전… 아직도 확신이 없거든요.”

아이리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지로 감추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간 먹구름 낀 하늘처럼 우중충했던 회색 눈동자에 드디어 폭풍우라도 치려는 것일까.

“하지만 어떤 연유든지 그분이 저를 선택하셨으니, 저도 순순히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그 자리는 지금 제 자리예요. 교수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믿겠다고 하셨거든요.”

“…….”

“그러니 뺏으려거든 뺏어 봐요. 단, 이번엔 실력으로 붙어 보죠.”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곳은 오직 능력만이 중요한 안겔루스 대학이니까요.”

아이리스라면 자작이 만들어 낸 그림자에서 벗어나 오롯이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아이리스는 유품이자 증거인 마석을 받아들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진 그는 이내 시원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됐어. 너같이 곱게 미친놈이랑은 붙기 싫거든.”

“곱게 미친놈이라뇨.”

“하아…. 죽을 각오로 왔건만, 괜히 기운만 뺐네.”

아이리스는 어깨에 짊어진 짐을 모두 내려놓은 듯 가볍게 걸음을 돌렸다. 대화가 일단락되는 것 같아 귀걸이로 보내던 마력을 끊었다. 그 후 문을 열고 나가는 그를 마중하려 뒤따르는데, 아이리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래도 빚을 졌으니 한 가지 말해 주지.”

옆으로 돌아선 아이리스는 장난기 없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스레인 교수가 나를 선택했으리란 건 단순히 자신감 때문이 아니야.”

“…예?”

“신탁이었어.”

예상치 못한 고백에 눈을 부릅떴다. 신탁이라니…?

“물론 우리 같은 평민은 감히 신탁을 접하지 못하지. 하지만 자작님께서 말씀해 주셨어. 신께서 나를 그의 제자로 점지했다고.”

일부러 혼란을 안겨 주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아이리스는 오히려 진실의 일면을 말해 주어 후련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널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신탁이 뭔 대수냐고.”

말을 마친 아이리스는 유유히 연구실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이리스에게 얽힌 비밀이 하나 풀리자마자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웬 신탁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면서도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상상을 밀쳐 내지 못했다. 만약 신께서 주인공인 아이리스를 위해 올바른 길을 안내해 주었다면? 그리고 갑자기 소설 속으로 들어온 내가 그 자리를 ‘뺏은’ 거라면….

“아니야…. 아니겠지….”

문틀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클라우스 자작이 적당히 지어낸 얘기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정말 나로 인해 시간선이 뒤틀린 거라면… 나는 이 죄책감을 끌어안을 자신이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침몰하던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아, …교수님.”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걱정에 잠긴 눈빛을 보니 저절로 웃음으로 흘러나왔다.

“아하하, 잠깐 현기증이 나서요.”

“설마 마력 소모 때문인가?”

“아뇨. 아이리스를 만나서 너무 긴장했나 봐요.”

신기한 일이다. 단지 아스레인이 나타났을 뿐인데 소란스러운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걸 전부 내려놓고 아스레인에게 안기고 싶다 생각해 버렸다. 저 따스한 품에서 아무 걱정 없이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면 얼마나 좋을까.

“안색이 안 좋으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게.”

“너무… 그렇게 잘해 주지 마세요.”

“뭐?”

“자꾸 착각하게 되니까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요한 시선이 따라왔으나 애써 모르는 척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이리스랑 나눈 대화는 다 들으셨죠?”

“그래. 설마 내 선택으로 인해 자네에게 앙금을 품었을 줄은 몰랐네.”

“교수님 때문이 아니에요. …상황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뿐이에요.”

오늘 마주한 아이리스는 생각보다 훨씬 삶을 향한 의지가 뚜렷했다. 평범하게 사랑받았다면 장난기 많은 학생으로 자랐겠지. 그런 그를 증오로 망가뜨린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흐트러진 커튼을 정리하다 말고 아스레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이리스의 신변은….”

“걱정 말게. 아무리 후견인이라 해 봤자 일단 외부인이니 대학에 출입이 자유롭진 못할 걸세.”

“…다행이네요.”

의도가 무엇이었든 아이리스가 안겔루스 대학에 들어와 다행이다. 비록 치를 떨며 싫어하겠지만,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아이리스를 보러 가야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기대어 물었다.

“계약을 끊을 방법은 없을까요?”

“마법으로 이루어진 계약을 억지로 끊으려 하면 도리어 아이리스가 위험해질 수 있네. 계약 조건을 무사히 완수하거나… 한쪽이 없어지는 방법뿐이지.”

한쪽이 없어진다. 단순하고도 살벌한 방법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말씀은 수틀리면 그가 아이리스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아마 그러진 않을 걸세. 소중한 방패를 왜 제 손으로 없애겠나.”

“소중한 방패라뇨?”

“일이 커지면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건 계약대로 아이리스지. 또한, 이쪽에서 억지로 배후를 끌어내려고 해도 계약이 어긋나 아이리스가 죽게 되네.”

“…인질이군요.”

“그래. 교묘한 술수지.”

비겁하게 꼬리를 자른 것도 모자라 감히 사건을 헤집지 못하게 아이리스를 방패 삼았다. 결국 아이리스가 인질로 잡혀 있는 한 제약은 사라지지 않는다. 체스에서 폰을 잃어 형세가 이쪽으로 기운 줄 알았건만, 결국 동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삭이려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리스를 지키고 싶다면 자네 말대로 그쪽에서 먼저 행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네.”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차라리 대놓고 경멸하는 백작을 상대하는 쪽이 훨씬 속 편했다. 이번엔 섣불리 행동했다간 복잡한 계략에 휘둘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구인지 모를 상대와의 체스에서 이기기 위해서 한 수 한 수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

문득 변덕을 부리고 싶어져 편지를 썼다.

“좋은 점심이에요. 다들.”

신기하게도 쪽지 한 장에 무려 세 명이 레스토랑으로 모였다.

“저만… 받은 게 아니었군요.”

“뭐야. 세잔 경에 교수님도 오셨네요?”

“갑자기 갈 곳이 있다고 하니 뭐 어쩌겠나.”

세잔과 진. 그리고 내 손에 끌려 나온 아스레인.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한 명이 오지 않았다. 설마 아직 익숙하지 않은 대학 부지에서 길을 잃은 걸까.

“잠시만요.”

실례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 문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앞을 기웃거리는 보라색 머리가 보였다. 초조한 모습을 들킨 청년은 뒤늦게 태연한 척 팔짱을 꼈다.

“또 무슨 꿍꿍이냐?”

마치 대단한 속셈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그냥 다 같이 밥 한 끼 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뭐?”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얼굴들이니까요.”

여전히 어리둥절한 청년을 데리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로 다가가니 가장 먼저 우리를 발견한 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엥?”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세잔과 아스레인도 제법 당황한 기색이었다. 오히려 뻔뻔할 줄 알았던 청년은 내 등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치만 살피던 청년은 나직하게 이를 갈며 속삭였다.

“뭐야. 미쳤어? 이런 자리라곤 말 안 했잖아.”

“말했으면 안 나올 거였잖아요.”

“하… 씨, 이런 건 영 안 맞는데.”

정곡을 제대로 찔렸는지 비죽 튀어나온 입술이 딱 붙었다. 네 쌍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청년은 답지 않게 어색해했다. 손수 의자를 빼 청년을 앉혀 놓고 만족스럽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요.”

처음으로 둥근 테이블의 다섯 자리가 꽉 찼다. 한곳에 모인 것이 신기할 정도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황실의 명령으로 교수직에 앉은 아스레인, 가문이 몰락하여 약초학을 선택한 진, 어머니를 위해 마법을 공부하는 세잔.

전부 조연이었다.

“실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불렀어요.”

그 사이에서도 나는 가장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 1’이다. 영웅이 마을에 행차하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나타나 박수를 치는 배경에 속하는 사람. 그래서 처음 소설로 넘어왔을 때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진과 교수님은 당연히 아는 얼굴일 테고, 세잔은 처음 봤겠죠.”

하지만 스토리가 달라졌다. 이제 이 세계에는 이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주인공은 없다. 오직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조연들만 존재할 뿐. 

“자, 어서 소개해요.”

그리고 지금 새로운 조연이 막 탄생했다. 

“뭐…? 나?”

“네. 직접 소개해야 좋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회색 눈동자가 시계추처럼 휘청거렸다. 갑자기 머리를 만지나 싶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헛기침했다. 그 후 풋풋한 신입생처럼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아이리스 딜런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제 스토리가 어찌 바뀔지는 소설을 읽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주인공마저 조연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주인공의 부재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안겔루스 대학에 온 걸 다시 한 번 환영해요. 아이리스.”

그러니 적어도 내 주변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지식을 얻어 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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