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53/305)

#53

혹시 잘못 봤나 싶어 창틀을 잡고 아이리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셔츠로도 가려지지 않는 멍과 피딱지가 앉은 입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저절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뭐. 예상하던 일 아닌가?”

“무슨…. 아니, 잠시 기다려요.”

서랍장에서 연고를 꺼내어 급히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코앞에서 마주하니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얇은 소매 아래로 팔을 감은 붕대가 비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게 뭐예요? 분명 의원은 가벼운 타박상이라고 했는데….”

“그거 때문은 아니야. 그냥 좀, 굴렀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아이리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러웠다. 하지만 태연한 행동이 오히려 의심을 불렀다. 상처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학대당했다고 말하는데, 그는 그 사실을 애써 감추려고 했다.

“아이리스.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요?”

“어. 지금까지도 날 걱정하는 걸 보면 썩 똑똑하진 않은데?”

냉소적인 웃음소리가 짧게 울렸다. 이제 돌려 말하는 건 포기한 모양이다. 차라리 이게 낫다. 괜히 저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보다야 직설적인 쪽이 훨씬 편하다.

“일단 약부터 바르죠.”

“싫은데?”

여전히 조소로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신, 돌려받을 물건이 있지 않았나요?”

비릿한 미소가 일순 일그러졌다. 그대로 연구실로 돌아가니 아이리스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머핀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던 그 자리에 아이리스를 앉혔다. 테이블을 의자 삼아 마주보고 앉으니 새하얀 피부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보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몰라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일단 입술에만 연고를 바를게요.”

연고를 찍어 바른 새끼손가락을 입술에 대려고 하자 아이리스가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도서관에서 나한테 죽을 뻔했던 거 까먹었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됐네. 이딴 착한 척 연기할 필요 없어. 난 마석을 돌려받으려고 왔고, 넌 진실만 들으면 되잖아.”

반박할 여지없는 말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아이리스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주인공인 그에게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내가 단순한 위선자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상하게도 그가 밉지 않았다.

“아이리스 말대로 착한 척하고 싶으니까 일단 얼굴만 좀 바를게요.”

또 어떤 말로 치료를 방해할까 봐 곧바로 상처 위에 연고를 발랐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아이리스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성질을 부렸다.

“아파…! 아프다고, 이 자식아!”

“그 말을 당신 때린 사람이 들으면 좋을 텐데요.”

“거 참. …맞은 거 아니래도.”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리는 게 영락없는 어린애다. 불평을 전부 받아 주며 연고를 골고루 펴 바른 후 손을 거두었다. 대충 치료를 끝냈으니 이제 본론으로 돌아갈 차례다.

“자, 이제 말해 봐요.”

자리에서 일어나 잊지 않고 귀걸이에 마력을 주입했다. 이윽고 귀걸이가 공명하듯 우웅- 작게 진동 소리를 냈다. 부디 아스레인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귀걸이를 눈치 채지 못한 아이리스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글쎄. 뭐부터 말해야 순순히 마석을 돌려주려나.”

팔짱을 낀 아이리스는 한쪽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말했다.

“일단 레톤 신전에서 마물의 그림자를 보이게 한 건 내가 맞아.”

“헤카테요?”

“벌써 거기까지 알아낸 거야? 대단하네.”

“대단한 건 아이리스의 마법 실력이죠. 헤카테를 부리는 마법은 어디서 배운 거죠?”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기세가 등등하던 아이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꾹 닫힌 입술에서 조금씩 핏기가 사라졌다. 그건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억지로 끌어냈다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니 일단은 화제를 돌렸다.

“어째서 사람들에게 수상한 실루엣을 보여 준 거죠?”

“의무실에서 네가 말한 추측이 맞아. 마물이 사람 사는 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려고.”

“어째서요?”

“그건 나도 몰라. 나 같은 말단이 뭘 알겠어.”

“누가 시킨 건데요.”

아이리스는 또 다시 말을 삼갔다. 그의 몸 구석구석에 난 흔적만 봐도 어렵지 않게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상부라 불리는 이에게 입막음을 당한 것이다. …클라우스 자작인가? 추궁을 멈추고 고민하는데, 난데없이 아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제일 궁금한 게 있지 않아?”

“뭐가요.”

“왜 너를 없애려 들었는지 궁금하잖아.”

저절로 눈가가 떨렸다. 어느 정도 예상하는 이유는 있었다. 긴장감에 두 손을 꽉 맞잡으며 물었다.

“제가 당신에게서 뭔가를 뺏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래~ 맞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아이리스가 오른손을 제 가슴 위에 올리며 말했다.

“원래 그의 제자가 됐어야하는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회색 눈동자에 서슬 퍼런 안광이 서렸다가 촛불 꺼지듯 쉽게 사라졌다.

“너도 알겠지만, 아스레인 교수의 제자는 공석이었어. 그걸 안 자작님께서 내가 반드시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난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자작님께서 몇 번이나 서신을 보내어 겨우 만날 기회를 얻었지. …얼마나 기대를 하셨는지 몰라.”

아이리스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고작 나를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자존심까지 버린 분을 어떻게 실망시킬 수 있겠어. 그래서 난 밤낮을 새며 끊임없이 공부했지. 오직 아스레인 교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 날. 아니, 정확히 약속한 날 하루 전이었어. 갑자기 아스레인 교수에게서 서신이 왔어. 뭔가 불안했지. 낌새가 아주 이상했어.”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알아?”

“…….”

“쓸 만한 아이를 찾았으니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처절한 목소리 끝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얼굴을 구기면서도 환하게 웃는 아이리스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난 아직도 잊지 못해. 서서히 일그러지는 자작님의 얼굴을…. 그때부터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지. 혹 눈엣가시가 될까 봐 쥐죽은 듯 조용히 살았어. 내 무능을 탓하며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 하지만 자작님은 쓸모를 잃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어.”

어느새 빨갛게 충혈된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도 알잖아? 버려지지 않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인상을 찌푸리자 아이리스는 냉랭한 조소를 입가에 띠었다.

“내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 끝내… 유품으로 받은 마석을 사용했어. 코어가 점차 망가지는 걸 느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 능력으로 자작님께 다시 인정받았지.”

마치 세례를 받은 것처럼 그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찼다. 하지만 기쁨으로 물든 눈동자가 증오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고 나니 문득 너에 대해서 궁금해지더라. 얼마나 난놈이기에 아스레인 교수의 눈에 단번에 든 걸까.”

하. 짧은 웃음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수소문 끝에 알아냈지. 애초에 알아냈다 할 만큼 가치 있는 정보도 아니었어. 특출한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간. 심지어 아멜리 백작의 하인으로 살다가 죽을 뻔했던 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띵하고 울리더라.”

아이리스는 붕대가 감긴 팔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내가 고작 저딴 놈에게 밀린 거라니!”

쉴 새 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자릴 뺏으려고 안겔루스 대학에 편입했어. 우연히 본 네 첫인상은 역시나 평범하기 짝이 없었지. 아니, 차라리 평범하기만 하면 좋을 뻔했어. 넌 처음부터 쓸데없이 위선만 차리는 놈이었지. 자기가 꿰찬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시시덕거리는 게… 참을 수 없이 짜증 났어.”

언성을 높이자 입가에 난 상처가 찢어져 아랫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내가… 내가 저 자리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고, 또! …상상했어.”

하지만 아이리스는 아랑곳 않고 분노를 토했다.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은 걸 겨우 참았어. …난 할 일이 있으니까. 일단 계획대로 도서관에서 헤카테를 움직여 새벽마다 소문이 퍼지게 만들었어. 원래는 거기까지였지. 하지만 그 와중에 나를 걱정하는 널 보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어.”

“…아이리스.”

“대체 저놈은 뭐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방해하는 걸까. 내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언젠가 그림자 사건의 진상까지 알아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결단을 내렸지.”

그날을 떠올리듯 눈을 질끈 감은 아이리스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 없애야겠다. 그래야 내가 살겠구나.”

줄곧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비틀린 호선을 그렸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함정에 걸려들었지. 설마 네가 마물을 부릴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너를 얕본 내가 멍청했어.”

아이리스는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그 결과로 난 완전히 쓸모를 잃어버렸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코어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거든. 무리하게 마석을 쓴 대가지.”

힘없이 어깨를 으쓱인 아이리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말했다.

“이게 전부야. 이젠 네 마음대로 해.”

“전부라뇨. 아직 말을 안 한 게 있잖아요.”

“뭐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자, 모든 계획을 꾸린 당사자요.”

연구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차분히 안색을 살피다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협박… 당했어요?”

“눈치 하난 빠르네. 정확히는 협박이 아니고 계약이야.”

긴 손가락이 피딱지가 앉은 입술 위에 닿았다.

“진실에 대해 함구하고, 모든 일은 내가 단독으로 계획한 짓이라 증언할 것.”

“그런….”

“이를 어길 시 목이 날아간다. 단, 약속을 지키는 한 나를 더는 위협하지 않는다.”

그제야 그의 목을 두른 가죽끈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장신구인 줄 알았건만, 그건 말 안 듣는 개에게 다는 목줄이었다. 목숨마저 내려놓은 아이리스는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허공에 손짓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똑같으니 네 편한 대로 마음껏 복수해.”

응어리를 전부 토해 낸 아이리스는 퍽 후련해 보였다. 어쩌면 비참한 마지막을 예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이리스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복수는 안 해요.”

“…뭐?”

“당신이 그토록 숨기려 하는 그분의 꼬리 자르기에 놀아나긴 싫거든요.”

이대로 아이리스가 사라지면, 진정한 흑막은 깔끔하게 손을 털게 된다. 힘없는 그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만들려 하다니…. 더러운 백작이나 치졸한 지도교수와 하는 짓이 똑같다.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자 사뭇 당황한 아이리스가 말했다.

“날 믿는 거야? 다 거짓말이면 어떡하려고.”

“거짓말이어도 어쩔 수 없죠.”

“너 진짜 바보냐?”

“바보라서가 아니라, 저도 당신처럼 누군갈 모신 적 있어서 알아요.”

내가 왜 그를 미워할 수 없는지 알겠다. 아이리스는 무서울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다. 처지도, 상황도 완벽한 주인공이 되지 못한 그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산들바람에도 휩쓸리는 메마른 나뭇잎처럼 작고 약한 사람.

“그분들의 대의 앞에서 우리는 먼지보다 가볍죠. 결국 아이리스도 살기 위해 한 짓이잖아요?”

아이리스가 내게 악의를 품게 된 것은 비단 기회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분명 곁에서 그의 질투를 증오로 키운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지금 예상되는 이는 클라우스 자작이지만, 그보다 더 큰 존재가 등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리스는 아이리스 나름대로 목숨을 지켜요. 저도 살기 위해서 아이리스를 이용해야겠어요.”

“…나를 이용한다고?”

최악의 경우 아이리스가 증언해도 능력 있는 자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빠져나갈 것이다. 오히려 아이리스는 주인을 무시한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매도당하겠지.

“전 제 머리로 돌을 던진 사람이 아니라, 그 돌을 던지도록 시킨 배후를 알아야겠어요.”

그러니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긴 꼬리를 완전히 묶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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