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52/305)

#52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연구실에 오지 않았다. 도서관이나 본관을 지날 때도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것일까? 너무도 조용한 것이 이상해 의무실로 가니 의원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이리스는 사흘 내내 약 처방을 받았지만 도저히 코어가 원상태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회복을 위해 클라우스 저택으로 돌아갔죠. 한 이틀 지났을 거예요.”

의원은 성질이 다른 마력이 아이리스의 체내에 남아 끊임없이 충돌한다고 설명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기숙사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몸만 갔다고 하니 얌전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사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웬일로 교수님께서 먼저 새로운 실험을 제안하셨다니까요.”

“정말요?”

“네! 이번 실험만 성공적으로 마치면, 졸업 후에 황실 연구원으로 추천받을지도 몰라요.”

오랜만에 한데 모인 자리에서 진이 설렘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잔과 나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해요! 진. 잘될 줄 알았다니까요.”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는군요.”

“아하하~ 이거 되게 쑥스럽네요.”

수줍게 웃은 진은 테이블에 바구니를 올려 이목을 돌렸다. 깨끗한 천을 걷으니 말린 과일을 곁들인 먹음직스러운 머핀이 드러났다. 먹이를 나눠 주는 어미 새처럼 머핀을 건네는 바람에 일단 받아들고 물었다.

“이게 뭐예요?”

“기분 좋을 김에 머핀을 만들었는데, 보다시피 너무 많아서요.”

“아니, 이걸 직접 만들었어요?”

“가문이 몰락한 후에 나름대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제빵을 배웠거든요. 물론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 그만뒀죠.”

“왜 반대하셨어요?”

“남자라면 검이나 잡으라고요.”

“아….”

“물론 반항한답시고 검이 아니라 약초를 잡았지만요~”

진은 블루베리 머핀을 한 입 베어 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남의 가정사에 무어라 말을 얹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세잔이 퍽 덤덤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저희 어머니께서 요새 제빵에 관심을 두시던데, 진을 만나면 반가워하시겠군요.”

“피아트 후작부인이라면… 명궁으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워낙 이것저것 하는 걸 좋아하십니다. 이번엔 제과일 뿐이죠.”

부인께 제과를 가르쳐 주겠냐는 세잔의 제안에 진은 화들짝 놀라며 거절했다. 무려 후작부인이니 그럴 만도 했다. 흥미진진하게 둘의 대화를 듣다가 넌지시 말했다.

“세잔의 검술 솜씨는 어머님을 닮았나 봐요.”

“그런 말은 자주 듣습니다. 물론 어머니께선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시지만요.”

“어, 왜요?”

“제가 아버지의 마법 실력을 물려받길 원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저한테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엷은 미소를 띤 세잔에게서 묘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힘들게 마법을 배우는 거였다. 역시 저마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고 있구나. 그럼 난… 이 자리에 오기 위해 뭘 포기했더라.

깊은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진이 내 귓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귀걸이는 뭐예요?”

“아, 이거요?”

그냥 아스레인에게 받았다고 말하면 되는데, 저절로 그날의 상황이 세세하게 떠올라 말문이 막혔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다정한 손길과 어디에 있든 가겠다고 약속하는 낮은 목소리. 살결이 닿았던 귓불에서부터 뺨으로 홧홧한 열기가 달아올랐다.

갑자기 얼굴을 붉히자 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뭐예요. 설마 영애한테 선물 받았어요?”

“네에?! 영애라뇨. 제가 대학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진이랑 세잔 경뿐이에요.”

두 손을 황급히 내저었으나 그들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영문을 몰라 눈치를 살피니 보다 못한 세잔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카르사 제국에서 귀걸이를 선물하는 건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

“단순한 관심이겠어요? 선황께서 청혼하실 때 귀걸이를 선물하셔서 그때부터 문화로 남았잖아요.”

청혼할 때 반지가 아니라 귀걸이를 선물한다니. 난생 처음 듣는 소리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진은 내가 대학에서 썸이라도 타는 줄 아는지 입꼬리를 연신 씰룩거렸다.

“꽤 대단한 영애 분께 걸렸나 보네요?”

“아니…. 그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탓에 점점 심란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일밖에 모르는 아스레인이 귀걸이에 사사로운 의미를 담아 선물했을 리가 없다. 희망 회로도 정도껏 태워야지.

벌써 비밀 연애까지 내다보는 진이 은근슬쩍 물었다.

“아스레인 교수님도 아세요?”

“그게 그러니까….”

이 귀걸이를 선물한 사람이 아스레인이니 당연히 알겠죠. 오해가 점점 불어나 곤란해지던 때마침 연구실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밝은 황갈색 머리카락이 보이자마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어서 오세요.”

“음? 손님이 많군.”

“죄송해요. 제가 초대한 거예요.”

“뭐, 괜찮네. 자네의 연구실이기도 하니 신경 쓰지 말게.”

배려는 고맙다만, 세잔과 진은 아스레인에게 인사하기 무섭게 나갈 채비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구실의 주인이 돌아왔는데 어떤 학생이 편하게 머핀이나 먹으며 수다를 떨겠나. 어색하게 웃으며 눈짓을 보내자 세잔은 걱정 말라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나갔다면 좋으련만, 결국 진은 참지 못하고 아스레인을 불렀다.

“…그런데 교수님.”

“왜 그러나.”

“태오가 글쎄 귀걸이를 선물 받았나 봐요. 하하, 어떤 분께 받았는지 아세요?”

진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나가려다가 무참히 실패했다. 아스레인을 등진 채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사이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르는 아스레인은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내가 선물했다만.”

“…예?”

“무슨 문제 있나?”

문제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망연자실하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스레인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그는 귀족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선물의 의미를 모르고 준 게 분명하다. 그럼 그렇지. 대체 뭘 기대한 거야.

“교수님…이셨구나….”

예상치도 못한 발언에 연구실은 일순 무거운 침묵으로 휩싸였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아스레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어휴,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은 사회생활 전문가답게 표정 변화 없이 상황을 대처했다. 더 있어 봤자 불편해지기만 할 것 같아 서둘러 진과 세잔을 데리고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무섭게 두 쌍의 시선이 내게 쏘아졌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뭐가 궁금한지 알 것 같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냥 장신구를 이리저리 잘 차고 다니니까 주신 거예요. 자, 이것도 보세요.”

소매를 걷어 히페리온의 팔찌를 보여 주었다. 다행히 납득할 만한 이유였는지,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진은 놀란 가슴을 토닥이는 시늉까지 하며 말했다.

“역시… 그렇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상상이 안 되긴 하더라고요.”

“교수님은 장성한 남성인데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거예요.”

“일단 같은 남자이기 전에 교수라는 게 문제죠.”

그건… 맞지. 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이 마음을 숨겨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할 감정일 게 분명하다. 씁쓸한 기분을 숨기려 괜히 과장되게 웃는데, 얌전히 듣고 있던 세잔이 중얼거렸다.

“장신구를 좋아하신다니 참고하겠습니다.”

“예? 세잔 경은 또 무슨 소리예요.”

진지한 세잔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먼저 걸음을 돌렸다. 뒤따라간 진이 무슨 말을 한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어도 세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인사도 없이 연구실을 떠나갔다. 허무하게 홀로 서 있다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그들과 함께 있으면 학창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조심해야지.”

그러니 너무 편해져서 실수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곤 연구실로 들어갔다. 책장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아스레인이 넌지시 말했다.

“어차피 다시 나가야 하는데, 방해한 건가 모르겠군.”

“아니에요. 다들 일이 있어서 간 거예요.”

책장과 서랍을 바쁘게 오고 가는 아스레인을 조용히 눈으로 좇았다. 그때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난데없이 아그누스가 튀어나왔다. 놀랄 새도 없이 아그누스는 곧바로 아스레인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다녔다. 모습을 유지하려면 마력이 들긴 하다만, 기분 좋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 있자니 어서 그림자로 들어가란 명령은 할 수 없었다.

“그럼 잠시 도서관에 다녀오겠네.”

“전 오랜만에 책 정리하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아그누스도 내 마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긴 아는지, 외출하는 아스레인을 무리하게 따라가려고 하진 않았다. 다만 집에 혼자 남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무시하지 못한 아스레인은 아그누스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금방 다녀온대도.”

나긋한 목소리로 서러운 아그누스를 달래 주며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마치 버튼을 누른 것처럼 울음소리가 그쳤다.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교수님의 손길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그저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아그누스를 뒤로하고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말없이 내려다보기에 나 또한 총명한 눈동자를 한동안 마주 보았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기울인 순간, 커다란 손이 다가와 머리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러곤 아그누스를 달랠 때처럼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스레인은 만족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다녀오마.”

그게 끝이었다. 한차례 폭풍을 일으킨 아스레인은 홀가분하게 연구실을 떠났다. 한참 동안 거센 폭풍에 시달려 허우적거리다가 어렵게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뭐지? 귀걸이를 선물 받은 후로 아스레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은근히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단지 내가 그를 보는 시선이 변한 건가. 아스레인은 마치 내가 여느 학생처럼 어리광부리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건데.

“…이러면 안 되는데….”

차라리 전처럼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존경의 대상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한 걸음만 다가가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위험했다.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지는 아그누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뺨을 툭툭 쳤다. 정신 차려야 한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감정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하아….”

마음에 남은 감정의 잔재를 한숨과 함께 훌훌 털어 버렸다. 환기라도 시키려고 창문을 열자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와 느슨하게 묶어 둔 커튼 끈이 풀렸다. 얇은 커튼이 겨울밤 하늘을 수놓은 오로라처럼 너울너울 흔들렸다.

커튼 자락을 붙잡으려 하면 아슬아슬하게 도망가는 탓에 춤을 추듯 두 손을 휘적거렸다. 우스운 모습이 창문에 비쳐 나도 모르게 헤픈 웃음을 흘리는 그때였다.

“안녕.”

바람을 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높이 뻗은 손을 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얇은 커튼 사이로 어렴풋이 보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것은 겨울에 피어날 리 없는 꽃을 닮아 있었다.

“…아이리스?”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나타났다.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어 정신없이 흔들리던 커튼이 차분하게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아이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오늘도 재수 없게 행복해 보이네.”

마치 붓꽃이 몸 곳곳에 피어난 것처럼 멍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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