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순간 귀를 의심했다. 못 미더운 존재라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도리어 어이가 없어졌다. 다른 손으로 그의 팔목을 잡으며 답답한 마음에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못 미더운 존재라뇨.”
“음?”
“제가 얼마나 당신을 믿고 따르는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마주한 금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 같아 말을 더 얹으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존경이라 포장한 애매한 감정은 어떤 말로도 전해지지 않겠지. 착잡한 마음을 한숨으로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언제나 그랬듯 모든 일을 끝내고 중요한 점만 정리해서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이라도 성질 더러운 상사를 모셔 봤다면 누구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버릇이었다. 아스레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
“전부 설명해드릴게요. …단지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말해 보게.”
“이번 사안만큼은 제게 맡겨 주시겠다고.”
지금껏 일어난 사건들은 어느 순간부터 내 손을 떠나갔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벌어진 일은 전과 달리 아이리스와 나의 사적인 문제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당사자에게 직접 사정을 듣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그러쥔 턱을 부드럽게 놓으며 말했다.
“사안을 들어 보고 판단해야겠지만, 자네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네.”
기대하던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정리하는 사이, 아스레인은 걸음을 돌려 창가에 멈춰 섰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톤 신전에서 카르 신관이 그림자를 본 사건 당일, 한 아이가 왔었다고 했죠.”
그의 이름은 아이리스 딜런. 얼굴도, 출신도 똑같은데- 그 외의 모든 것이 ‘주인공’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다.
게다가 조력자로 만났다면 좋았으련만, 처음부터 나와 아이리스는 어긋난 채 시작했다. 나는 그를 의심했고, 그는 나를 적대했다. 어쩌면 둘 중 하나가 궁지에 몰려야 끝나는 것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으로 가면서도 설마 함정이라곤 생각 못했어요. …정확히는 안 하고 싶었죠.”
아직 아이리스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어 확신할 수 있는 일만 설명했다. 제5 섹터 안에서 마주친 헤카테에 대해 묘사하는 내내 아스레인은 조용했다. 그 후 헤카테를 없앤 방법을 설명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그때 헤카테가 이쪽으로 달려드는데….”
더 이상 아그누스의 존재를 숨기는 건 무의미했다. 하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까. 어쩌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 마물을 도와줬다가 그림자를 뺏겼다? 어이없지만 사실인지라 절로 헛웃음만 나왔다.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도와줬어요.”
“…누굴 말하는 거지?”
드디어 아스레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동자에 경계심이 잔뜩 서려 있어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황급히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림자를 노크하듯 두드렸다.
“아그누스. 나와 줘.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
“…아그누스라고?”
조용하던 그림자가 아스레인의 부름에 대답하듯 크게 요동쳤다. 곧 그림자에서 익숙한 늑대의 형상이 불쑥 튀어나왔다. 탄탄한 네 발로 착지하자마자, 아그누스는 냉큼 아스레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에 뺨을 비비는 행동이 영락없이 주인에게 애교부리는 개처럼 보였다. 게다가 아스레인이 반응하지 않자 새끼처럼 끼잉끼잉- 울기까지 했다.
“아, 아그누스. 왜 그래. 교수님이 곤란해하시잖아.”
서둘러 팔을 뻗어 아그누스의 가슴을 밀었지만 끄떡없었다. 얘가 왜 이러지? 혹 아스레인이 불쾌할까 봐 흘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고운 얼굴에 서린 감정은 전혀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아니, 어째서 자네가 이 아이를…?”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아하니 아그누스를 원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대체 무슨 사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우선 물음에 답했다.
“연구실 책장 사이에 있는 걸 봤거든요. 아, 물론 그때는 토끼 모습이었어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만… 그림자를 내줘 버렸어요.”
곧바로 짧은 탄식이 날아와 모르는 척 헛기침했다. 그사이 마냥 행복한지 아그누스는 꼬리를 시계추처럼 격하게 흔들며 새까만 혀를 내밀었다. 아스레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아그누스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껏 안 그래도 없는 마력이 바닥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하하, 네. …계속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요.”
“그래도 다행이군. 아그누스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본디 길잡이로 큰 아이니 자네를 도와줄 걸세.”
누가 봐도 예사 관계는 아닌 것 같아 은근슬쩍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아는 마물이에요?”
“예전에 구해 준 적 있는 마물이네. 물론 못 만난 지 꽤 되었지만.”
아…. 아그누스의 은인이었구나. 이제야 내게 무슨 일만 생기면 상습적으로 아스레인 곁에 데리고 가는 이유를 알겠다.
“왠지 예전부터 어디론가 달려간다 싶으면, 그쪽엔 항상 교수님이 계셨거든요. 교수님 곁이 안전하다고 느끼나 봐요.”
아스레인은 말이 없었다. 그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그누스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어두운 아지랑이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끼어들 틈을 기다리다가 아그누스가 완전히 바닥에 엎드리자마자 말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무사히 나왔어요. 오히려 다친 쪽은 아이리스죠. 아마 아직도 의무실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그때 아그누스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오랜만에 옛 인연을 만났다는 반가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나를 향한 금안에는 오직 싸늘한 기운만이 서렸다.
“아무리 그를 믿는다지만, 자신이 위험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나.”
“하지만 경비병이 내내 순찰하고 있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했어요. 심지어 학교 안이었고요.”
“만약 아그누스를 부르지 못할 상황이었다면 어쩌려고 그랬나.”
“그건 제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결과이니 …감수해야죠.”
단순한 업보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폐만 끼치지 않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예전부터 내가 겪는 피해쯤은 감수하고 살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나는.”
“예?”
“자네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접한 나는 어찌 되나.”
“…그건….”
“애초에 자네의 선택에 나는 안중에도 없었군. 안 그런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침묵을 긍정이라 받아들였는지,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이 퍽 신경질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아스레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생각해서 문제였다.
아스레인은 항상 주변이 온갖 문제로 둘러싸인 사람이다. 사안이 급한 서류가 아스레인의 넓은 책상이 모자랄 정도로 쌓여 있다. 그날만 해도 그는 외부 회의가 있어 제시간에 퇴근하지도 못하고 급히 나갔다.
그런데 어찌 그에게 나라는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얹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건….”
모두 당신을 위한 배려였어요. 그리 말해 봤자 상황만 악화되겠지.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아뇨. 교수님 말씀이 맞아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한동안 조용하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걱정에 저절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곧바로 따라가려다가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를 찧은 것쯤은 아프지 않았다. 오로지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만들자마자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네, 네?”
뭘 만들고, 뭘 쓴다는 거지? 당황한 사이 넓은 보폭으로 다가온 그가 거리를 바짝 좁혔다. 단숨에 코앞에 다가온 가슴팍에 놀라기도 잠시, 아스레인이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 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 아플지도 모르네.”
다짜고짜 아프단 경고에 지레 겁부터 먹었다.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손에 쥔 물건을 확인하지도 않고 눈부터 질끈 감았다. 눈꺼풀을 부들부들 떨자 코앞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무서워하는 자가 무슨 배포로 헤카테를 상대했는지 모르겠군.”
대답할 틈도 없었다. 이내 귓불에서 가시에 찔린 듯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읏.”
“많이 아픈가?”
“…아뇨. 조금 따끔했어요.”
짧은 신음이 민망할 정도로 따끔한 게 전부였다. 천천히 눈을 뜨니 귀에서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아스레인은 묘하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의아함을 느끼며 귓가에 손을 갖다 대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
창문을 돌아보자 생애 처음으로 귀걸이를 한 내 모습이 비쳤다. 얇은 체인 끝에 엄지손톱만 한 금색 판이 달려 꽤 비싼 장신구처럼 보였다. 살짝 움직일 때마다 민감한 목에 딱딱한 것이 닿아 간지러웠다.
“이게 뭐예요?”
“일정 마력을 주입하면 내게 연락을 취할 수 있네.”
“저를 위해 만드신 거예요…?”
“그래. 비브린트 숲에서의 일이 끝날 무렵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왜 무모한 짓을 벌였냐며 혼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화는커녕 나를 위해 만든 통신 장치를 건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감사하기보다 얼떨떨했다.
“저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실 줄 몰랐어요.”
멍하니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왜?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겐 과분한 관심이었다. 의아한 혼잣말을 들은 아스레인은 느긋하게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눈치는 누구보다 많이 보면서 정작 자신은 아끼지 않으니,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지.”
“그건….”
“어디 그뿐이겠나.”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아스레인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안색은 나아지지 않는지. 왜 마력은 계속해서 바닥나는지. 대체 끼니는 챙기면서 일하는 건지. 또 어디서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진 않는지도 궁금하네.”
창백하게 그늘진 눈 아래에 그의 손가락이 살포시 닿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네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지.”
“…….”
“다들 내게 기대려고만 하는데, 자네는 점점 홀로 서려고 하니… 도리어 더 관심이 가는 걸지도 모르겠군.”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토끼 눈을 뜬 채로 굳어 버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겠지. 아니면, 아직도 꿈을 꾸는 건…. 당혹스러움에 뺨을 어루만지면서도 자연스럽게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바보처럼 실실 웃기만 하자 아스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나.”
“예, 예?”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는 겐가.”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부담스럽기만 했을 관심이, 그라서. 오직 그이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기뻐서 그랬어요.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누구도 저를 신경써 준 적 없었거든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조심할게요. 앞으로 무리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당찬 목소리로 대답하니 아스레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하나뿐인 제자가 간밤은 무사해서 다행이네.”
아…. 제자.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길이 하도 다정하여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다. 아스레인은 단지 제자인 나를 아낄 뿐이다. 그러니 나도 성심성의껏 그를 보필하면 된다. 좋은 스승을 만난 건 기쁜 일인데, 어째서 마음 한편이 이토록 따끔거리는지 모르겠다.
“위험할 때 아그누스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마력 소모에 대한 부담을 항상 유념하게.”
“그럴게요.”
허리를 숙인 아스레인은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보다 무리하지 않는 방법이 이제 자네 앞에 있잖나.”
마치 움푹 파인 땅에 물이 채워지듯 서서히 차오른 감정이 발목을 스쳤다. 그 안에 빠져 속절없이 허우적거리기 전에 어서 발을 빼내야 하는데…. 차가운 현실에 비해 이곳은 너무도 따스해서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든 부르게. 어디에 있든 가도록 하마.”
그래서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도 모르고 그에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