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50/305)

#50

경비병은 쓰러진 아이리스를 의무실로 옮기기 위해 들것에 실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나는 보호자로서 아이리스를 따라갔다.

의무실로 향하는 동안 아이리스는 곱게 감은 눈을 결코 뜨지 않았다. 정말 과도한 마력 소모로 혼절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책임을 회피하려 연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늦은 새벽. 의무실에 도착하니 쪽잠을 자던 의원이 황급히 튀어나왔다. 경비병이 아이리스를 침대에 옮기자 의원은 얇은 커튼을 치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사이 들것을 정리하던 경비병 중 하나가 내게 말했다.

“무단으로 도서관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죄송해요. 꼭 찾고 싶은 책이 있어서….”

순순히 사과할 줄은 몰랐는지, 할 말을 잃은 두 경비병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어쩌면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보란 듯이 양손을 모으고 반성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크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사정이 있었다니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 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네…. 조심할게요.”

“넘어진 책장은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저, 정말요? 늦은 새벽인데 너무 감사해요.”

과장되게 인사하니 오히려 경비병은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대로라면 뒷말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싹싹한 태도로 그들을 배웅하고 의무실 문을 닫았다. 안심하며 침대로 다가가니 의원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책장이 무너졌다고 했나요?”

“네. 아이리스가 그 아래 있었어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이마와 손에 난 타박상도 미약하고요. 하지만….”

의원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말을 멈췄다. 의사의 망설임만큼 두려운 것도 없었기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표현을 고르던 의원은 아이리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체내 코어가 망가져서 지금 당장은 휴식이 최선이에요.”

“…코어요?”

“보통 마석을 과용하면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 지경까지 몰릴 일이 있었나요?”

불현듯 ‘마석을 쓸 땐 반드시 부작용을 감안해야 한다’는 세잔의 경고가 떠올랐다. 마석에 담긴 마력과 자신이 가진 마력이 충돌할 경우, 체내 장기까지 손상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이리스는 하필이면 마력을 축적하는 코어가 망가진 모양이다. 대체 왜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 가면서까지 무리하게 마법을 쓴 것일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깨어나면 직접 듣는 게 좋겠어요.”

“그렇군요. 일단 저는 마력 흐름을 돕는 약을 지어 올게요.”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제실이란 문패가 달린 창고로 들어갔다.

이제 의무실엔 나와 아이리스만이 남았다. 창틈에서 바람이 불어와 탁상에 놓인 촛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때문일까.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아이리스의 머리맡에 불길한 그림자가 졌다.

“아이리스.”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를 등진 아이리스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단둘만 남은 덕분에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잠들지 않았다. 그저 현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고 싶을 뿐.

“…잠들어 있다 생각하고 편히 말할게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제5 섹터에서 마주했던 뱀을 떠올렸다.

“당신이 말한 파이톤에 대한 정보는 단지 눈속임이었죠? 설마 환각이 아니라 마력으로 움직이는 모형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날 신전에서 카르 신관이 본 그림자도, 마을 사람들이 본 그림자도… 전부 당신의 소행이었다니.”

주변 물체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어 냈으니 굳이 증거를 인멸할 필요도 없이 마석만 회수하면 된다. 출중한 마법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그 탓에 그림자를 본 사람들은 과거 마을을 습격한 마물들을 떠올리고 있어요. 그게 당신의 목적인가요? 기껏 평화를 되찾은 사람들에게 마물에 대한 적개심을 일깨워 주려고?”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촛불의 그림자는 마치 아이리스를 나타내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레스토랑에서 그랬죠. 정작 자신을 힘들게 한 당사자는 아무것도 몰라서 분하다고. 그리고… 이 자리는 원래 당신의 것이었다고.”

짧게 숨을 들이쉬고 말 없는 등을 향해 진심을 털어놓았다.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 누구의 것도 빼앗은 적 없어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기 바빴다. 소설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목숨을 위협받았고, 우연한 기회로 아스레인을 만났으며, 기적처럼 그에게 스카우트되어 지옥에서 빠져나왔다. 이 중 하나라도 틀어졌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걸 누구에게서 빼앗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노력하여 쟁취했을 뿐이다.

“하지만 정 응어리를 풀 대상이 필요하다면… 저에게 하세요.”

마을에서 신전으로, 그리고 신전에서 학교로. 단순히 커다란 계략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소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니 한편으로 불안해졌다. 지금은 오직 나를 향한 적의지만 이것이 주변으로 퍼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아니, 제게만 하세요. 저를 향한 감정을 빌미로 제 소중한 것을 망치려 들지 마세요.”

더는 평범한 일상을 위협받고 싶지 않다. 내가 위험해질지언정 어렵게 얻어 낸 현재를 반드시 지켜 내고 말 것이다. 아이리스 또한 코어가 망가질 때까지 마법을 쓴 이유가 있을 테다. 그건 아마도….

“물론 당신에게도 지키고 싶은 대상이 있겠죠. 그러니 당장은 이번 일을 떠벌리진 않을게요. 하지만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마요.”

조용히 손을 들어 가슴께를 꾹 눌렀다.

“마지막 증거는 내 손 안에 있으니까.”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단단한 마석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진실로 향하는 열쇠일지, 그저 시작을 알리는 종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부디 아이리스가 순순히 입을 열어 주길 바랐다.

“그러니 마석을 돌려받고 싶다면, 모든 사실을 말할 준비를 마치고 절 찾아오세요.”

살짝 내려온 이불을 목까지 올려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전 도망치지 않고 연구실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아이리스.”

말이 끝나자마자 조제실 문이 열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 일부러 의원에게 보여 주듯 아이리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의원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가 좋은 친구를 둬서 다행이에요.”

좋은 친구라…. 저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와 입가를 어루만졌다. 의원의 말과 달리 지금 아이리스는 내가 의무실에서 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그에게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이만 물러나기로 했다. 걸음을 돌리자 약병을 꺼낸 의원이 넌지시 물었다.

“가시는 건가요?”

“네. 이만 기숙사로 돌아가야죠. 모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선생님.”

“걱정 말아요. 약을 먹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다행이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그 후 얇은 커튼을 쳐주며 그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깨어났으면 좋겠어요. 아이리스.”

그때가 되면, 꾸며진 주인공이 아닌 진정한 당신과 마주할 수 있겠죠.

***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을 기어가 겨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얼마나 뱀에게 살벌하게 쫓겼는지는 종아리와 발에 나타난 경련이 보여 주었다.

도서관에서 무리한 건 비단 아이리스뿐만이 아니었다. 비브린트 숲 이후로 장시간 동안 아그누스를 꺼내 놓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벽 내내 열이 끓어올랐고 온몸이 근육통으로 시달렸다. 죽을 뻔했다는 두려움과 살아있지 않은 것을 마주한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뒤에 나타난 감정은 기쁨이었다. 얻어맞은 것같이 아프고, 마력은 바닥까지 말랐으나, 이상하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내 몸 하나 간수했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나 가능성을 보았다.

조금만 더 강해지면,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나를 도와주는 마물들까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거면 충분했다. 내게 필요한 건 주인공의 힘도, 세계를 구할 대단한 능력도 아니었으니까.

때아닌 열병이 지나 서서히 잠에서 깨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오른 후였다. 식은땀을 따뜻한 물로 씻어 내리고 한결 개운한 얼굴로 연구실에 출근했다. 문을 여니 아스레인이 곧장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오. 웬일로 늦었군.”

“죄송해요. 간밤에 잠이 안 와서 늦게 자 버렸거든요.”

“…그런가.”

선뜻 튀어나온 대답과 달리 아스레인의 눈길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어제 소식을 들은 건 아니겠지. 예리한 감각에서 벗어나려 화제를 돌렸다.

“줄곧 신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요.”

“음?”

“혹시… 카르 신관은 환각에 당한 게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진 모형을 본 게 아닐까요?”

“마법으로 만들어진 모형?”

“네. 마력으로 움직인다면 충분히 마물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마법에도 능한 아스레인이라면 분명 뭔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듣고 확신했다.

“이론상 가능한 마법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불가능해야만 하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역시 아스레인은 사건의 진상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자네, 헤카테에 대해 알고 있나?”

헤카테? 처음 듣는 마법에 고개를 젓자 아스레인이 설명을 이었다.

“과거 금지된 마법 중 하나지. 한창 카르사 제국이 몸집을 불리던 시기에는 변방의 초라한 병사들도 전부 전쟁에 투입되었네. 설상가상 서식지를 잃은 마물이 마을에 내려왔으나 대부분 전쟁터로 나가 마을을 지킬 이가 없었지. 그때 마법사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인공 동물 ‘헤카테’일세.”

“마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법으로 움직이는 모형을 만들었단 말씀이세요?”

“그래. 하지만 지금처럼 살아있는 마물과 헷갈릴 가능성이 있기에 사적인 이유로는 쓸 수 없는 마법이네. 황실 직속 마법사…. 혹은 황실에게 명령받은 이들만 가능하지.”

이제야 그의 모순된 표현을 이해했다. 헤카테를 만드는 것은 마법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황명으로 금지되었기에 역사적으로는 불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리스가 만들어 낸 그 뱀은 정황으로도 외형으로도 헤카테가 맞았다.

“만약 헤카테를 부리는 마법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면요…?”

마지막 가능성을 제시하자 아스레인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네. 그 시절 마법사들은 전부 명을 달리했고, 명맥을 이은 제자들조차 골방에서 늙어 가니… 마법을 빼낼 방법은 분명 존재했을 테지.”

“그럼 역시….”

아이리스가 황명으로 움직이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는 황실과 관련된 사람에게 마법을 배웠을 것이다. 클라우스 자작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

“그런데 태오.”

고민에 빠진 탓에 아스레인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책상에 한 손을 짚은 그가 천천히 내게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언제쯤 사실을 말할 건가.”

“…예?”

“헤카테에 대해 물어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않나.”

고요하게 빛나는 금안과 마주하자마자 말문이 틀어 막혔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혼란스러움을 들킬까 봐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쥐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멜리 백작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행동이었으나, 이번은 훨씬 거칠었다. 고압적인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겨우 그를 바라보았다.

“마력이 완전히 바닥났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 그건…원래 그랬잖아요.”

“변명할 생각 말게.”

이번엔 책상 위에 놓인 손이 붙잡혔다. 손등을 감싼 그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넓은 소매를 끌어올렸다. 여린 살결에 직접 손길이 닿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힉, 짧은 숨을 들이쉬자 아스레인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럼 이 팔찌에 있던 마력의 흐름이 왜 달라졌는지 설명해 보게나.”

아. 짧게 탄식하며 시선을 피하자 나른한 한숨 소리가 가라앉았다.

“…어째서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건가.”

“그게….”

단지 아이리스로부터 모든 설명을 들은 후에 아스레인에게 보고하려고 했다. 정리된 쪽을 듣는 것이 그에게도 편하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내가 자네에게 그리 못 미더운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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