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종종 강연실로 쓰이는 제5 섹터 중심엔 커다란 원형 모양 단상이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 자리에 무대의 주인공처럼 싸늘하게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 묻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살아있는… 거겠지?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무래도 그의 생사부터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다. 혹여 뱀이 불빛을 알아챌까 봐 랜턴을 문밖에 두고 제5 섹터 안으로 들어갔다. 매끈한 실루엣이 나를 등진 틈을 타 조심스럽게 단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때마침 창밖에서 흘러들어온 달빛이 하이라이트처럼 단상 위 아이리스를 비췄다. 새액, 새액. 다행히 그의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숨을 확인하자마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책장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단순히 기절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뱀은 쓰러진 아이리스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긴 몸을 이끌고 끊임없이 주변을 배회했다. 이대로 무사히 아이리스를 데리고 나가려면, 반드시 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한다.
그때 내 어깨에 앉은 씨앗이 속삭이듯 물었다.
[설마 상대할 생각이야?]
“…아니.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야 돼.”
[시선을?]
“저 뱀은 움직임에 민감해. 심지어 밤에도 잘 보이고, 길쭉한 머리 양옆에 눈이 달려 시야까지 넓어. 그러니 아이리스를 구하고 나가는 동안, 완전히 시선을 떼어놓아야 돼.”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니 곳곳에 일렬로 쌓인 낡은 서적이 눈에 띄었다. 여차하면 숨을 곳이 많은 만큼 장애물도 많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책을 쏟아 뱀에게 내 위치를 알리고 말 것이다.
책을 던져 이목을 끌어 볼까? …아니. 그건 너무 일시적이다. 곧바로 튀어 나간다고 해도 아이리스를 옮기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초조하게 손끝을 물어뜯는 사이, 씨앗이 코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내가 할게.]
“응?”
[시선을 끌 미끼가 필요한 거 아니야?]
“괘, 괜찮겠어?”
[흥. 날 뭐로 보는 거야. 절대 잡히지 않고 얄밉게 돌아다녀 주지.]
천천히 날아오른 씨앗의 날개에서 찬란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라면 파이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충분할 것이다. 역시 씨앗이 시야에 나타나자마자 뱀은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곧장 책장 밖으로 튀어 나간 그때였다.
[야!!]
씨앗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허공을 울렸다.
[네가 말한 거랑 전혀 다르잖아!!]
“뭐…?”
[이거, 눈이 없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옆 책장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뱀의 모습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이건….”
몸은 파충류의 비늘이 아니라 책으로 이루어졌고, 이빨은 낱장이었으며, 혀는 책갈피로 쓰이는 붉은 끈이었다. 이게 정녕 마물 파이톤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그에게서 생명은 느껴지지 않았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
귀를 찌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쉬었다. 씨앗의 말마따나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도감에서 본 대로 자극을 주지 않으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효과가 있는 걸까. 뱀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붉은 실로 엮인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대로 지나가 주길 바랐으나, 착각이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먹잇감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판단이 끝난 뱀은 위협적으로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쳐서 피하자 이번엔 책으로 이루어진 꼬리를 휘둘렀다.
“우왁!”
다급히 몸을 숙여 옆 책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목표를 잃은 꼬리는 커다란 책장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쿵, 쿵.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책장이 하나씩 무너져갔다.
[이쪽이야!]
씨앗의 도움으로 서둘러 서랍장 뒤로 몸을 숨겼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5 섹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책장이 여럿 무너지긴 했으나 그 덕분에 뱀은 나를 쉽게 찾지 못했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는데, 옆에서 기가 찬 목소리가 들렸다.
[저게 대체 뭐야.]
“나도…. 나도 모르겠어.”
[누가 봐도 마물은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방금 뱀과 마주했는데도 도감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그누스처럼 몸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역시… 마물이 아니다. 레톤 신전에서 카르 신관이 봤다던 그림자도 분명 매끈한 뱀과 같았다고 했다.
만약 마석을 중심으로 주변 물건이 합쳐져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한다면…. 서서히 퍼즐이 맞춰졌다.
[머리 숙여!]
무자비한 뱀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기다란 꼬리를 보고 기겁하자마자, 쾅! 바로 옆에 있던 책장이 무너져 한쪽 퇴로가 막혔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곧바로 이름을 외쳤다.
“아그누스!”
부름을 받은 그림자가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이윽고 털이 풍성한 늑대가 튀어나와 뱀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마력을 양껏 흡수한 맹수는 곧바로 뱀의 목을 노렸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목덜미는 힘없이 뜯겨 나갔다. 후드득. 바닥으로 낱장이 뜯긴 책이 떨어졌다.
그러나 뱀은 잠시 휘청거릴 뿐 다시 몸을 세웠다. 심지어 바닥에 떨어진 책이 저절로 공중에 떠올라 뜯겨 나간 목을 메꿨다.
“…저렇게 치료를 한다고?”
이곳은 도서관. 그의 몸을 구성한 책은 무한히 공급된다. 이대로라면 아그누스의 몸을 이룬 내 마력과 이름 모를 뱀의 소모전이 계속될 뿐이다. 반드시 코어를 찾아 부숴야 한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생각 중이야.”
아그누스가 뱀을 상대하는 동안 씨앗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불러와 줘.”
[내가?]
“응. 부탁할게.”
[너 바보야?! 아무도 내 목소리를 못 듣는다고!]
“괜찮아. 지금 네 모습이라면 누구든 따라올 거야.”
[그럼 너는?]
“아그누스랑 어떻게든 해 볼게.”
반신반의하던 씨앗은 내 굳은 의지를 보곤 힘찬 날갯짓으로 제5 섹터를 벗어났다.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도박에 가까웠다. 부디 누구든 신비한 모습을 보고 따라와 주길 바랐다.
“이제… 어떡하지.”
정찰병 역할을 해 주던 씨앗이 사라진 지금, 뱀을 상대할 이는 나와 아그누스다. 하지만 아그누스가 아무리 공격해도 뱀은 책장에서 책을 끌어와 상처를 메꿨다. 그러니 내가 먼저 코어를 찾아서 일격에 부숴 달라는 명령을 해야 한다.
잔뜩 긴장한 터라 코어를 찾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비스듬히 꽂혀 있던 책 한 권이 내 앞으로 쏟아졌다. 본능적으로 두 팔로 머리를 가렸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래.”
최소한 생각이 가능한 물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해서 지키는 법. 책이 내게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팔로 머리를 가린 나처럼 그 또한 코어를 지키란 명령이 입력되었을 테다.
아그누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바닥에 있는 책을 들었다. 먼저 뱀의 꼬리를 향해 던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꼬리에서부터 점점 윗부분을 노렸다. 그리고 배를 향해 책을 던진 순간이었다.
“……!”
다른 곳을 건드릴 때 뱀은 아그누스와 대적하기 바빠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런데 배를 노리자마자 긴 꼬리가 퍼뜩 위로 올라가 직선으로 날아가는 책을 단숨에 쳐 냈다. 저기다. 꼬리가 가린 부위를 가리키며 아그누스에게 명령했다.
“배를 관통해! 아그누스!!”
우렁차게 포효한 아그누스는 뱀의 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일렁이는 그림자가 정확히 뱀을 관통해 바닥에 착지했다. 제5 섹터를 난장판으로 만든 괴물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뱀의 형상을 이루고 있던 책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무너졌다.
“헉, 허억.”
곧장 바닥에 주저앉아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뭐지?”
갑자기 책 사이에서 빛이 흘러나와 제5 섹터 안을 가득 채웠다. 그 후 빛을 따라 쏟아진 책과 무너진 책장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찰나에 아수라장이었던 공간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완벽한 증거 인멸이었다.
오직 뱀의 형상을 이뤘던 책만이 아이리스 곁에 무덤처럼 쌓여 있을 뿐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아이리스를 향해 걸어가는데,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아그누스가 앞길을 막아섰다.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양 꼬리가 바람개비처럼 돌아갔다.
“응. 정말 고마워. 네가 최고야. 아그누스.”
무릎을 꿇고 앉아서 턱을 쓰다듬어 주니, 아그누스가 기다렸다는 듯 검은색 혀를 길게 뺐다. 그리고 그의 입 안에는-
“이게 뭐…뭐야?!”
난데없이 제5 섹터 문이 벌컥 열렸다. 씨앗이 부탁한 대로 병사를 데려온 것이다. 발 빠른 아그누스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당황하지 않고 병사를 향해 손짓했다.
“도와주세요! 책장이 넘어져서 사람이 다쳤어요!”
“바로 의무실로 옮기겠습니다. 위험하니 비키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물러서니 두 병사가 허리를 숙여 책을 옮겼다.
“어이, 일단 책부터 걷어 내!”
“알겠어!”
순찰병 둘이서 낑낑거리며 책을 옮기는 사이 나는 서랍장에 기대어 겨우 숨을 돌렸다. 당장 바닥에 누우면 그곳이 어디든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골골거리는 동안, 병사의 어깨에 붙어 있던 씨앗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너 안색이 죽을상이야.]
“하하…. 아그누스를 유지하는데 생각보다 마력을 너무 많이 썼나 봐.”
히페리온의 팔찌가 없었더라면 진즉에 탈진해서 쓰러졌을 것이다. 식은땀 범벅이 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힘없이 고개를 젓자 씨앗이 날개로 이마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산통을 깨서 미안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어.]
“…응?”
[너도 알겠지만, 저건 마석이 만들어 낸 인형이야. 그러니까 움직이도록 명령한 쪽은 따로 있어.]
씨앗이 웬일로 말하기를 망설이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응. 아이리스잖아.”
[뭐야. 너… 알고 있었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누스가 다시 그림자로 돌아가기 전에… 내게 이런 걸 줬거든.”
세게 쥔 주먹을 펼치자 손바닥 안에 숨긴 마석이 드러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범인이었다. 같은 공간에 두 사람이 있는데, 책으로 만들어진 뱀은 오직 나만 노리고 있었다. 모두 아이리스의 함정이었다.
“전부 그였어.”
빙의한 소설의 주인공에게 살해당할 뻔하다니. 정말 소설 같은 일이었다. 아이리스는 오지랖 넓은 내가 그를 걱정해서 반드시 오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에서 마석으로 만들어진 뱀을 파이톤이라 끝까지 믿게 만들었다. 그 후 책장이나 책에 깔려 사고로 위장해 없애려고 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실수하고 말았다.
“…내가 저항하리라곤 생각 못 했겠지.”
[괜찮겠어? 네 능력까지 전부 들켜 버렸을 텐데.]
책을 정리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온몸을 지배했다. 열심히 움직이는 병사들의 팔 사이로 아직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리스가 보였다. 그 또한 만만찮은 마력을 소모해 움직일 힘조차 없겠지.
손 안에 든 마석, 도망칠 기력을 잃은 아이리스.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뭐야. 왜 웃어? 배신당한 충격으로 드디어 미쳐 버린 거야?]
며칠간 골머리를 썩인 실험을 마침내 성공한 기분이었다.
“그냥…. 후련해서.”
그토록 찾던 증거를 잡았으니 이젠 사건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