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스레인이 랜턴까지 들어 준 덕분에 맨땅을 구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심히 가까이서 느껴지는 온기와 등을 감싼 손 때문에 급기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무서워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게 그리워질 정도였다.
힘을 잘 쓰지 못하는 점이나, 마법에 대해 얘기할 때는 은근히 놀리면서 어째서 예상치 못하게 다정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꼭 무방비한 상태일 때 갑자기 다가오니 속절없이 침범당하고 만다.
지금도 진지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아스레인과 달리 나는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태오. 뭔가 보이나?”
“…예? 아, 아뇨.”
“이상한 일이군. 잘못 들은 건가….”
본분을 잊지 않으려 뺨을 가볍게 툭 치고는 앞을 주시했다. 아스레인의 말대로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사이 학생들도 전부 볼일을 마쳐 떠난 것인지, 넓은 도서관은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그래. 역시 소문을 낸 학생이 잘못 본 거야. 우연히 비슷한 일이 겹쳐 너무 예민해졌었던 것뿐이다. 안심하고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아스레인이 우뚝 멈춰 섰다.
“저건… 뭐지?”
아스레인이 자그마한 열람실 향해 랜턴을 들었다. 은은한 불빛이 열람실을 비추자 무덤처럼 둥그런 그림자가 생겼다. 창문 아래에 각양각색 책들이 이상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장이 흔들려 쏟아졌다 하기엔 위치가 부자연스러웠다.
“누가… 일부러 쌓아 둔 것일까요?”
“…글쎄.”
그러고 보니 그 학생은 도서관 밖에서 창문을 통해 거대한 실루엣을 봤더랬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장소는 제 2섹터를 지나 열람실로 향하는 길목의 창가였다. 여기서 몇 걸음만 더 가면 밖에서도 충분히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이 본 실루엣의 정체가 바로 쌓인 책이란 말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스레인이 먼저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랜턴을 받아들고 앞을 비추자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육안으로 봐도 특이한 점은 없었으나, 아스레인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지는군.”
“마력이요?”
“그래. 하지만 종종 책을 정리하는데 마법을 쓰는 사서가 있으니 무슨 목적에서인진 장담할 수 없네.”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아스레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 문제가 생길까 엎어진 책을 그대로 두고 나오면서 마음 한구석 찝찝한 기분은 애써 무시했다. 별일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
그 후로 도서관에서 정체불명의 실루엣을 봤다는 설은 한낱 괴담처럼 서서히 사그라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소문은 예상보다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을 맞닥뜨린 건 빈 강의실을 지나갈 때였다.
“어쩌면 마물일지도 몰라요.”
“에이, …설마.”
도서관 마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학생의 어깨 사이로 보랏빛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다름 아닌 아이리스였다. 그는 아직 실루엣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마치 사실처럼 묘사했다. 살짝 겁에 질린 학생들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이리스를 불러 세웠다.
“어째서 확실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거예요?”
책을 들고 나가던 아이리스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돌아보았다.
“제가 봤으니까 딱히… 허황된 소문은 아니지 않나요?”
“형체를 직접 보셨다고요?”
“그럼요. 마치 뱀 같기도, 거대한 지네 같기도 한 기다란 몸체를 가졌더군요.”
허공을 바라보는 회색 눈동자에 일순 서슬 퍼런 안광이 서렸다.
“아마 파이톤일 거예요.”
“…파이톤이요?”
“거대한 뱀을 닮은 마물이에요. 워낙 지능이 높기 때문에 책을 삼켜서 인간의 지식을 습득한다는 설도 있어요. 게다가 야밤에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죠. 움직임에 상당히 민감하니 시각적인 자극만 주지 않으면 피하는 것도 문제없어요.”
당당한 목소리는 도서관 속 실루엣을 완전히 파이톤으로 확신하는 듯 들렸다.
“하지만 제가 늦은 저녁 아스레인 교수님과 도서관에 갔을 땐 마물은커녕 아무것도 없었어요.”
“밤이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파이톤은 야행성이니 저녁 즈음엔 모습을 안 드러낼 수도 있어요.”
반론은 먹히지 않았다. 우선 일파만파 퍼지는 소문부터 막으려는데, 아이리스가 한발 먼저 말문을 막았다.
“그래서 파이톤을 목격한 시간대에 직접 들어가려고요.”
“아니, 혼자서요?”
“네. 의도치 않게 소문이 퍼져 불안감을 조성했으니 제가 해결해야죠.”
마물이라고 확신해 놓고 홀로 도서관에 가는 건 터무니없이 무모한 짓이었다. 서둘러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말마따나 정말 파이톤이 있는 거라면… 혼자는 위험해요.”
“그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어요.”
“아이리스.”
이름을 불러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내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혹시 제가 사건을 해결하면, 당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불안하신가요?”
“…예?”
“아니, 되찾는 건가.”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뇌리에 날카롭게 꽂혔다.
전부터 아이리스는 내게 적의를 보이곤 했다. ‘자신을 힘들게 한 당사자는 정작 모른다.’고 내 앞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아이리스는 마치 내가 먼저 그의 자리를 뺏은 것처럼 말했다.
여태껏 그에게서 느껴지던 날카로운 감정은 전부 무언가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나? 이상한 일이다. 난 안겔루스 대학에서 그를 처음 봤다. 그의 것을 탐낼 새도 없이 내 밥그릇과 목숨 줄을 챙기기 바빴단 말이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전 단순히 아이리스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런 거라면 됐어요. 미안하지만, 불필요한 걱정이에요.”
한쪽 입꼬리를 파들거린 아이리스는 나를 지나쳐 문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정 궁금하시면 구경이라도 하러 오세요. 오늘 밤에 소문을 없앨 테니까요.”
자신만만한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그 후 연구실로 돌아오니 아스레인은 외부 회의를 가고 없었다. 아직 학생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이 교수진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 평소보다 일찍 기숙사에 들어왔지만, 도무지 발 뻗고 쉴 수 없었다.
“시스템.”
- 네. 태오 님.
“파이톤이란 마물에 대해 검색해 줘.”
- 요청하신 ‘파이톤’에 대한 검색 결과 1건 있습니다.
곧바로 도감을 실재화하여 파이톤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아이리스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꾸며진 이야기나 허황된 마물이 아니었다.
아이리스의 말처럼 정말 3급 위험 마물 파이톤이 도서관 안에 간헐적으로 출몰하는 거라면, 물론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하지만… 단지 소문에 불과한 일이었다면? 괜히 일을 키워 주변인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녘이 되었다. 기숙사 방 안을 빙빙 돌다가 책상 위에 올려 둔 랜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차피 학교 안이다. 게다가 내가 알기론 매일 밤 경비병이 도서관을 순찰한다. 그러니 여차하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괴담에 휘둘렸다고 웃음거리가 되어도 좋다. 하지만 진정 마물이 나타나 누군가를 해친 후라면, 되돌릴 수 없다.
“…안 가서 후회하느니 가서 후회하자.”
아이리스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랜턴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쌀쌀한 바람이 부니 아름다운 정원마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벌어진 옷깃을 여미며 도서관 계단을 올라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괴상한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문이 열렸다.
“…아이리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우선 랜턴을 든 손을 내밀어 안을 비췄으나 아스레인과 왔을 때처럼 도서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게다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아이리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순찰을 시작한 건가? 의아함을 끌어안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바람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우선 아이리스를 찾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창가에 놓인 화분에 데이지 꽃이 활짝 펴 있었다. 설마 여기서 처음으로 도감의 능력을 시험해 볼 줄은 몰랐다. 새하얀 데이지 꽃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히페리온.”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도서관 안에서 데이지 꽃잎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여기야. 나의 소중한 친구.”
부름에 응답하듯 파들거린 꽃잎이 끝에서부터 서서히 말라 갔다. 마치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완전히 생기를 잃은 꽃부리가 흙 위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푸른 불빛이 피어오르더니 마법처럼 네 쌍의 나뭇잎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나타났다.
“…된 건가?”
작게 중얼거리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씨앗이 코앞으로 날아와 소리를 빽 질렀다.
[너어. 감히 어르신과 낮잠 자는 걸 방해해?!]
“하하,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잘 지내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망쳤어!]
“미안해. 하지만 나 혼자로는 힘들어서.”
오랜만에 보는 히페리온의 씨앗은 여전히 기운 넘쳤다.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이니 씨앗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뭔데?]
“도서관 안에서 사람을 찾아 줘. 두 명씩 붙어 다니지 않고, 혼자 있어. …가능해?”
씨앗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이 넓은 도서관을 씨앗 혼자서 찾기엔 무리일지도 모른다. 두렵지만, 히페리온이 준 팔찌의 힘을 이용해야 할 것 같아 손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씨앗이 잽싸게 날아와 나뭇잎 날개로 내 뺨을 가볍게 쳤다.
[안 된다고 하면 어르신을 불러낼 심산이지? 웃기지 마. 그분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해.]
“그럼 부탁을 들어줄 거야?”
[흥. 소원을 들어줄 때까진 나도 못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지.]
씨앗은 꽃을 찾아 헤매는 나비처럼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마치 춤추는 숲의 요정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으로 푸른빛을 좇았다. 이윽고 짧은 날갯짓으로 제자리에 멈춘 씨앗이 말했다.
[나를 따라와.]
“어? 벌써 찾았어?”
[폐쇄된 공간에서 생명의 빛을 찾는 것쯤은 날갯짓만큼 쉬운 일이야.]
“역시 대단해…!”
[당연하지. 따라오기나 해.]
퉁명스러우면서도 순순히 도와주는 씨앗에게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씨앗을 따라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위층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렸다. 귀를 찢는 목소리에 놀라 딱딱하게 굳은 나와 달리 씨앗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기 있네.]
“…뭐?”
[너 말고 다른 인간을 찾아 달라며. 그리고 방금, 들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그건 아이리스의 목소리였다. 곧바로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씨앗이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해?]
“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어. 아이리스가 위험한 게 분명해.”
[그래. 네 말대로 위험해. 그런데 가는 이유가 뭐야?]
“…모른 척할 순 없잖아.”
마른침을 삼키자 씨앗이 까르륵 웃었다.
[오지랖만 넓은 바보 같은 것.]
“나도 고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게 안 돼서 포기하려던 차야.”
[뭐~ 예상은 했어. 이 정도로 미련해야 어르신이 아끼는 인간답지.]
앞서가는 씨앗을 길잡이 삼아 2층으로 올라갔다. 목소리가 크게 울렸으니 아이리스가 있을 법한 장소는 단 하나. 이 도서관에서 가장 넓은 제5 섹터였다.
팻말을 확인하고 문 앞에 서서 손으로 살짝 밀었다. 원래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아무 저항 없이 열렸다.
“아이리스…?”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광경에 숨을 멈췄다.
“…….”
커다란 똬리를 튼 뱀이 천장을 향해 머리를 꼿꼿이 들었다. 랜턴의 불빛이 닿지 않았으나 어둑한 곳에서 봐도 그 크기가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끝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던 뱀은 스윽- 스윽- 소리를 내며 책장 사이로 기어 갔다. 그러자 똬리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아이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