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작중 아이리스는 마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남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특수한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마물과 사람간의 갈등을 없애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그는 능력을 애써 감추려고 했다. 정말 능력 없이 감이 좋은 걸까. 아니면, 능력을 숨기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진상을 아는 이는 오직 아이리스 딜런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뒤로하고 누르와의 약속을 지키려 시장에 다녀왔다. 세 가지 종류의 열매가 담긴 자루를 품에 가득 안고 온실로 향했다. 깜짝 놀래 주려고 했건만, 누르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함없이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보니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마중 나온 반려 동물을 현관에서 마주친 주인처럼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말했다.
“에구, 우리 누르 많이 기다렸어?”
하지만 누르는 가차 없었다.
[됐고, 약속한 열매나 내놔.]
“으응… 많이 먹어….”
새콤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열매를 한 주먹씩 들어 널찍한 바위에 내려놓았다. 느긋하게 열매를 맛보던 누르가 대뜸 물었다.
[그래서 도움이 되긴 했어?]
“당연하지. 네 덕분에 알았어. 역시 그도 나처럼 마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아.”
[그래? 내가 느끼기엔 좀 다르던데.]
“다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르는 그날을 회상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놈과 마주쳤을 때 마력의 흐름이 강하게 변했어.]
“마력의 흐름이라고?”
[엉. 놈이 나를 만지지 않은 이유는 너처럼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 너희 인간들이 소위 말하는 마법 덕분일 거야.]
예상치 못한 가설이었다. 게다가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누르의 주장인 만큼 신빙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법으로 속내를 읽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으니 누르가 아예 쐐기를 박았다.
[텅 빈 너와 달리 상당한 실력자 같더라.]
“…왜 갑자기 뼈를 때리고 그래.”
[웬만해서 마법으로 상대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는 충고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
그르릉,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는 누르에게 열매를 양껏 주고는 온실 밖으로 나왔다.
아이리스가 수준급 마법 실력을 갖췄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더 이상 아이리스를 작중 주인공과 비교하는 자체가 소용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어느 기점에서 완벽하게 설계된 주인공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결국 몸만 같은 다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리스가 달라진 이유가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아냐. 포기하긴 이르다. 이 세계는 반드시 멸망을 막을 영웅이 필요하고, 그건 주인공인 아이리스 딜런을 제외하고 아무도 될 수 없다.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서둘러 연구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뭐?! 너… 거짓말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저 멀리서 난데없이 높은 언성이 들렸다. 꽤나 살벌한 말투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적이 드문 본관 건물 뒤편에 학생이 다섯 명씩이나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글쎄 진짜라니까.”
“똑바로 다시 얘기해 봐.”
여럿에게 추궁당한 학생은 두 손을 크게 움직이며 설명했다.
“간밤에 잠이 너무 안 와서 산책하다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도서관 복도를 유유히 지나가는… 거대한 실루엣을.”
실루엣? 익숙한 이야기의 흐름에 저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살짝 겁에 질린 표정을 본 나머지 학생들은 팔짱을 끼며 저마다 생각을 얘기했다.
“하아, 뭐야. 진짜 유령이라도 있는 거야?”
“그래 봤자 실루엣을 본 거잖아. 그게 사서가 옮기는 수레인지 뭔지 어떻게 알아?”
“가능성을 넓게 보자는 거지. 만약… 마물이라면?”
“제발 소설 좀 적당히 봐라. 도서관에 마물이 왜 사냐?”
“내 말이. 지어내는 것도 작작해라.”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이 답답했는지, 궁지에 몰린 학생은 가슴을 세게 두드리며 주장했다.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니까! 게다가 …나만 본 게 아니야.”
“또 누가 봤는데?”
“그, 있잖아. 마물학과 편입생.”
“아이리스 딜런?”
“그래! 나랑 같은 걸 봤다고 했어.”
대체 왜 그 이름은 잊으려고 하면 또 들리는 걸까. 하필이면 새벽녘 도서관 복도를 지나가는 실루엣을 아이리스도 봤단다. 혼자 본 게 아니라고 하니 꿈이라고 치부했던 학생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걸음 물러서 있던 학생이 퍽 한심하게 여기는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니들은 뭐가 문제냐? 그냥 조사해 달라고 하면 되지.”
“교수님께?”
“미쳤어? 당연히 경비병한테 말해야지. 교수님께 말했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 그래?”
“그건… 그러네.”
“아무튼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야. 딴 데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
그들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곤 본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그림자 진 벽 뒤에 숨어 있다가 그들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미안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커서 비밀을 원치 않게 알게 된 사람이 한 명 추가됐다.
마을 외곽과 레톤 신전도 모자라 이젠 안겔루스 대학이라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증언에 피곤함까지 느껴졌다. 이번만큼은 학생의 말처럼 단순히 착각이기를 바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람이 이리도 많은 대학에 마물이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무거운 걸음을 돌려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태오. 보고서는 수정할 부분을 체크해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네.”
“아, 감사합니다. 바로 고쳐서 오늘 중으로 드릴게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스레인을 보니 뒤숭숭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숨을 길게 내쉬며 책상에 앉아 그가 첨삭해 준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락, 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를 따라 불안정하게 뛰던 심장이 점차 평온을 찾아갔다.
이런 게 내가 바라는 대학원 생활이었는데…. 해결할 능력도 없는 내게 자꾸만 무시하지 못할 일들이 생겨난다.
지금도 그랬다. 정갈한 글씨 위로 그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스레인에게 도서관에서 맴도는 소문에 대해 말해야 할까? 아니야. 다른 학생의 말마따나 대학 내 문제는 경비병이 나서야 할 일이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대신 조사해 줄 것이다. 신경 끄자. 신경 꺼야 돼….
“태오.”
“네, 네.”
고개를 번쩍 들자 아스레인이 나갈 준비를 하는 듯 재킷을 입으며 물었다.
“오늘 퇴근 후에 시간 있나?”
“물론이죠! 시키실 일 있으세요?”
“도서관에 내가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더군. 리스트와 비교해야 하는데, 자네가 도와줬으면 하네.”
“도서관…이요?”
“음. 기왕이면 학생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밤에 작업하려고 하는데 괜찮은가.”
“하하, …그럼요.”
“보고서 수정이 끝나는 대로 기증서가 모인 제 2섹터 옆 창고로 오게나.”
아스레인이 연구실을 나가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밤의 도서관. 신께선 꼭 내 두 눈으로 소문의 진상을 보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지.
첨삭 받은 보고서를 수정하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첫 과제를 완벽하게 끝마쳤다. 다시금 표지까지 깔끔하게 덮어 아스레인의 책상 한가운데 놓았다.
창밖을 보니 벌써 어스름이 깔려 오고 있었다. 슬슬 겨울이 다가와 해가 짧아진 모양이다. 출근하며 벗어 둔 재킷을 챙겨 입으며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따스한 햇볕이 가득한 낮과는 달리 밤이 되자 도서관은 퍽 으슬으슬한 분위기를 풍겼다. 벽 곳곳에 걸린 촛대가 은은하게 복도를 비췄지만, 이마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엔 쓸모없어질 것 같았다.
서둘러 아스레인이 말한 제 2섹터 옆 창고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랜턴만 덩그러니 보였다. 자연스럽게 랜턴을 향해 걸어가니 책장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군.”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아스레인을 보고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교, 교수님. 그렇게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시면 어떡해요.”
“자네가 둔한 거겠지.”
슬쩍 올라가는 눈썹이 왠지 얄미웠다. 이윽고 종이를 훑어보는 아스레인을 향해 물었다.
“뭘 하면 될까요? 책을 일단 옮길까요?”
기세등등하게 소매를 걷자 아스레인은 내 팔을 한 번 흘겨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저건 무슨 의미지? 물론 근육 없는 비실비실한 팔이긴 해도 일단 힘은 쓰는 남자인데. 대놓고 웃음을 사니 왠지 발끈해서 말했다.
“저도 나름 힘써요. 교수님.”
“누가 뭐라 했나. 괜히 힘 빼지 말고, 이쪽 책장에 꽂힌 책과 리스트 속 제목을 대조해 주게.”
“…넵.”
멋쩍게 소매를 내리고 조용히 리스트를 받아들었다. 사다리로 올라가 위에서부터 책 제목을 대조해 나가는데, 랜턴 불빛이 약한 탓에 서서히 눈이 침침해졌다. 사다리에 랜턴을 올려놓고 눈가를 비비는 순간이었다. 복도에서 스윽- 스윽-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어요?”
“흐음.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 몇 있더군.”
“아, 그래요?”
학생이 지나가면서 난 발소리인가. 낮에 들은 소문 때문인지 쉽게 안심할 수 없었다. 리스트를 든 채로 살짝 열린 문틈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흔들리는 커튼 그림자까지 수상해 보여 눈을 떼지 못했다.
“태오.”
“…….”
“태오?”
“아, 네! 왜 그러세요?”
뒤늦게 고개를 숙이자 사다리 근처에 서 있는 아스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소리네. 계속 정신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군.”
“…예?”
“달리 할 일이 있으면 그만 가 봐도 되네.”
“그런 거 아니에요.”
서둘러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에게 체크한 리스트를 보여 주었다.
“여기 있는 이 책 말인데요….”
랜턴이 하나뿐인지라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간 그때였다. 쿵! 복도에서 무언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우왁!”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려 책장으로 달려들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마치 귀에서 뛰는 것처럼 온몸에서 박동이 느껴졌다. 진정하기 위해 책장에 댄 두 손 위로 이마를 얹었다. 내 반응에 덩달아 놀란 아스레인이 다가와 차분하게 물었다.
“괜찮나?”
“네…. 죄송해요. 조금 놀랐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스레인이 서 있었다. 어두운 창고에서 랜턴 하나에 의지해야 한다지만… 이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웠다.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는데, 그가 불쑥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잠깐.”
검지를 입가에 댄 아스레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리가 나는군.”
예리한 금색 눈동자가 문밖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밖에 집중한 나머지 지금 자세가 어떤지 모르는 모양이다. 책장에 걸려 더 이상 뒤로 가지 못하는 나는 거의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탓에 복도에서 나는 소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코끝을 은은하게 스치는 창포 꽃 향기가 그의 체취려니 생각했다.
“확인하고 오겠네.”
“…예? 혼자서 다녀오시게요?”
“그래. 금방 돌아오지.”
잠깐 멍해졌던 정신이 바로 돌아왔다. 아무리 잠시뿐이라지만, 랜턴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창고에 혼자 있기 어려웠다. 다 큰 어른이라도 칠흑 같은 어둠은 본연의 공포였다.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나를 보지 못한 아스레인이 랜턴을 들고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시야에서 빛이 사라져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뒤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혼자 있기 무서워요.’ 같은 말을 하기엔 민망하니 애써 돌려 말했다.
“아하하, 딱히… 무서운 건 아닌데요. 저도 왜 소리가 났는지 궁금해져서요….”
이미 파리해진 안색에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아닌 척하는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다짜고짜 놀릴 거란 생각과 달리 아스레인은 랜턴을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손을 뒤로 빼어 내 등 위에 부드럽게 얹으며 속삭였다.
“제법 어두우니 발밑을 조심하게.”
자연스럽게 왼쪽 어깨가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어쩐지 창포 꽃향기가 숨쉬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짙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