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46/305)

#46

흐지부지 끝날 뻔했던 사건의 꼬리를 드디어 잡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 한 모금에 평정을 되찾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말이 잘못 나왔네요.”

“잘못…나왔다고요?”

“사건을 조사하러 가면 보통은 목격자를 찾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못 봤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유는 아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표정을 샅샅이 훑어봐도 아이리스는 태연할 뿐이었다. 어쩌면 정말 억울한 사람을 의심한 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사건이 일어난 당시 상황을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그럼….”

“아, 딜런 군!”

감기에 걸린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풍채 좋은 중년 남성이 어깨를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리스는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중년을 반갑게 맞이했다.

“강의 끝나셨어요? 바인하르 교수님.”

진의 지도 교수이자 소문으로만 듣던 바인하르 교수였다. 언덕처럼 포물선을 그린 배와 둥글둥글한 몸, 턱과 인중을 가득 채운 새하얀 수염이 꼭 산타클로스 같았다. 바인하르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

“어째서 수업이 끝나고도 연구실로 오지 않았나 했더니, 식사를 하고 있었나?”

학부생이 제 발로 연구실에 찾아오길 기대하다니… 평범한 경우는 아니었다. 좋게 이해하면 그만큼 아이리스를 아낀다는 표현이겠지만, 오랜 대학원생 경험에 따라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마침 태오 씨가 먼저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해 줬어요.”

“…태오?”

바인하르가 그제야 맞은편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에서부터 발끝으로 흘러가는 시선이 꽤나 노골적이었다. 이젠 대놓고 관찰하는 시선에 익숙해져 의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인하르 교수님. 아스레인 교수님 아래서 배우고 있는 태오입니다.”

“아~ 이번에 들어왔다는 그 제자?”

“알아봐 주시니 기쁩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약초학 기초 이론은 정말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워낙 읽기 쉽게 써 주신 덕분에 어려운 내용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입에 발린 말을 하니 바인하르 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왠지 그의 제자가 오래도록 안 바뀐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먼.”

그 말을 들으니 꼭 아스레인이 나를 곁에 둔 이유가 비위를 잘 맞춰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정작 아스레인은 지금처럼 아부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뭘 잘못 먹었냐고 비아냥댈 텐데. 속내를 알 리 없는 바인하르 교수는 퉁퉁 부어오른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어떻게 적응을 하나 했더니만, 딜런 군에게 좋은 선배가 생긴 것 같아 다행이야.”

“그럼요. 저도 태오 씨 같이 원생이 되고 싶으니 많이 보고 배워야죠.”

“아하하! 내가 참 좋은 인재를 데려왔어. 안 그런가?”

분위기에 맞춰 억지로 웃자 바인하르 교수가 눈치 없이 제안했다.

“아, 기왕 이렇게 됐으니 다음에 딜런 군을 데리고 온실을 견학하는 건 어떤가?”

“온실이요…?”

“태오 군이라면 출입이 가능하니까 수고 좀 해 주지.”

학생이 안겔루스 대학 내 온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출입증을 가진 사람과 동행해야만 한다. 따라서 분명 바인하르 교수도 본인이 아이리스를 데려갈 여건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일을 내게 맡겼다.

“왜….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나?”

그래. 어느 교수가 자기 일을 직접 하나. 웬만해선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하도 부지런한 아스레인의 곁에 있다 보니 교수들은 일 떠넘기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을 보곤 곧바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저야 좋습니다. 마물학과 학생이라면 한 번쯤 온실에 가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그래. 서로 돕고 지내야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바인하르 교수는 이내 걸음을 돌렸다.

“식사가 끝났으면 딜런 군은 나와 함께 가지.”

“예. 교수님.”

아이리스는 지체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빌려다 준 책을 잊은 것 같아 급한 마음에 책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책을 한 번 흘겨볼 뿐, 손을 내밀지 않았다.

“책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저도 여기 오기 전에 적지 않게 읽었거든요.”

부드러운 거절이 돌아와 무어라 더할 말이 없었다. 아이리스는 책을 들고 덩그러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바인하르를 따라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썩 반갑지 않은 호의였나 보다. 애초에 은근히 의심해 놓고 좋은 대접이 돌아올 리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바인하르 교수가 튀어나오지만 않았어도 뭔가 알아낼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일었다.

“어쩔 수 없지….”

이번 일로 나를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르는 아이리스에게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남았다.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비록 이야기는 뒤틀렸지만 ‘그 능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서둘러 레스토랑을 나와 오랜만에 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익숙한 길을 따라가자 이끼 앉은 바위가 보였다. “누르?” 하고 부르니 동그란 귀가 수풀 사이로 불쑥 튀어나왔다. 퉁퉁 부은 얼굴로 비척거리며 바위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자고 있었어?”

[그래. 누가 감히 단잠을 깨우나 했네.]

못 본 사이 어쩐지 몸집이 커진 것 같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표면에 붙은 따개비 같던 누르가 이젠 커다란 바위를 침대처럼 쓰고 있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동그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잘 지냈어?”

[당연하지.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였냐?]

“미안해. 일 좀 하느라.”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니 누르가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 태도는 까칠해도 역시나 나를 많이 기다린 모양이다. 두툼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슬쩍 본론을 꺼내었다.

“누르야.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갑자기 뭔데? 너 또 이상한 일에 휘말렸지.]

“아니야~ 그냥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안 될까?”

[귀찮은데….]

심드렁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검지를 곧게 펴며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면 시장에서 열매 한 자루를 사다 줄게.”

[…흥. 자비로운 내가 한 번 들어 봐주지. 뭔데 그래?]

공허한 눈동자가 일순 초점이 잡힌 것처럼 말똥말똥하게 빛났다. 부디 그 흥미가 오래가길 바라며 누르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

사정 끝에 누르의 협의는 얻어 냈다만, 곧바로 다음 문제가 이어졌다. 이미 나를 경계하고 있을 아이리스를 어떻게 만나러 가느냔 거였다. 전처럼 먼저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부담스럽게 느낄지도 모른다. 족히 이틀간 고뇌해도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도 평범한 낮을 맞이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연구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읽던 책을 덮고 문을 열자 보랏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태오 씨.”

“…아이리스?”

보통은 자신을 의심한 상대를 꺼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일전엔 갑자기 자리를 뜨게 돼서 죄송해요. 아시다시피 사정이 사정이어서….”

설마 나를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떨떠름하게 쳐다보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괜찮아요. 교수님께서 부르시니 당연히 가야죠.”

“그럼 온실에 데려가주시겠다는 말… 여전히 유효한가요?”

“당연하죠. 전 지금도 괜찮은데, 어떠세요?”

“저야 좋죠!”

풀 죽어 있던 아이리스는 놀이공원에 놀러 가기로 약속한 아이처럼 금세 행복해했다. 그대로 연구실 문을 닫고 나와 그와 함께 온실로 향했다. 서서히 인적이 드문 숲길로 들어가자 아이리스는 눈에 띄게 말수를 잃었다. 정적을 참지 못하고 먼저 가벼운 일상을 물었다.

“바인하르 교수님은 어때요?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겨우 원하던 곳에 들어왔으니 힘들어도 버텨야죠.”

본받을 만한 마음가짐이라 생각하던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일에 비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죠.”

“그 일이… 뭔데요? 편하게 말해 봐요.”

잠시 고민하던 아이리스가 조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정작 절 힘들게 만든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거?”

스산한 바람처럼 등줄기가 싸해지는 목소리였다. 문맥만 봐서는 교수나 자작을 겨냥한 말 같지만, 어째 그의 시선은 나를 똑바로 향했다. 흐린 하늘 같은 회색 눈동자 안에 왠지 모를 적의가 느껴져 저절로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뭐…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요.”

하하. 짧은 웃음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공기를 맴돌았다. 때마침 나무 사이로 빛나는 유리 온실이 모습을 드러내 다행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표정을 되찾은 아이리스가 온실을 가리켰다.

“여기가 온실인가요?”

“네. 구조한 마물들이 쉬고 있는 곳이죠. 따라오세요.”

계획한대로 자연스럽게 누르의 보금자리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이리스는 별 의심 없이 뒤를 따라왔다. 이윽고 수풀을 지나자 인기척을 느낀 누르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와 친한 마물이 바로 이 아이예요.”

“…사이누르는 처음 봐요.”

“귀엽죠? 무리에서 떨어진 아이를 구조했어요.”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누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리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지 말고 아이리스도 만져 봐요. 손길을 좋아하는 아이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긴 꼬리가 와이퍼처럼 바닥을 쓸었다. 이론상 사이누르는 호기심을 드러낼 때 꼬리를 살랑거린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리스는 용기 내어 누르에게 손을 뻗었다.

낯선 손이 누르에게 닿기 직전, 그르릉-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은 또 뭐야?]

누르가 말하자마자 아이리스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이유는 예상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그게….”

“아, 혹시 마물을 무서워하세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내가 누르에게 부탁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겉으로는 호의적인 척 행동하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다행히 누르는 내 의도대로 마음 편히 적개심을 드러냈다.

[날 만지기만 해 봐. 그 손가락 하나쯤 없애는 건 일도 아니니까.]

살갑게 혀까지 내밀고 하는 말은 제법 살벌했다. 경고가 이어지자마자 아이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호락호락하게 손길을 허락할 것 같진 않아요.”

“아니에요. 아이리스가 반가워서 이렇게 혀까지 내밀었는걸요? 마물 행동학에서 배웠잖아요. 이론대로 완벽하게 호의적인 태도예요.”

“그건 알지만….”

아이리스의 말꼬리가 끊임없이 길어졌다. 이윽고 그는 손을 거두고 단호하게 말했다.

“태오 씨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마냥 귀여운 마물 같지는 않네요.”

“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얼마나 반겨 주는데요.”

연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자 누르의 욕지거리가 이어졌다. 이따금씩 물어 버린다든가 뜯어 버린다는 말이 진심처럼 들려 모르는 척하기 애먹었다. 다행히 아이리스는 내 이마에 벤 식은땀을 눈치채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너무 자만하시는 것 같은데요?”

“…네?”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잖아요.”

“그래요? 전 모르겠는데…. 뭔가 아이리스만 아는 게 있나 봐요.”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내자 아이리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단순한 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확신했다.

아, 단지 숨기고 있을 뿐- 마물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은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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