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아이리스 딜런. 이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딜런 군.”
“아하하, 군은 무슨 군이에요. 그냥 아이리스라고 불러 주세요.”
한 번쯤 생각했다. 어딘가에 주인공이 살고 있을 거라고. 애초에 소설 속 세계는 그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토록 갑작스러운 만남은 결코 예상치 못했다. 대체 왜 그가 안겔루스 대학에 있는 걸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정말 내가 아는 ‘아이리스 딜런’일까?
아무 말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도서관부터 보여 드릴게요.”
“좋아요. 워낙 규모가 큰 학교라고 들어서 엄청 기대했거든요.”
진은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기대감에 부푼 아이리스를 데리고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눈으로만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아이리스를 보니 설렘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에서 아이리스는 안겔루스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다. 모험하던 그가 아스레인을 만나 조언을 구할지언정 대학생이 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버젓이 바인하르 교수의 추천을 받아 대학에 편입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들을 따라가지 않자 앞서 걸어가던 진이 허전함을 느끼곤 뒤를 돌아보았다.
“…태오?”
“아, 네.”
혹여 진에게 당황한 기색을 들킬까 봐 급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지만 작위적인 미소가 오히려 파리한 안색을 부각시킨 모양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진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왜 그래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그게….”
진의 행동에 아이리스까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깨 너머 무심한 시선이 내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훑어 올라갔다. 처음 인사할 때 보여 준 미소가 거짓이었다는 듯 아이리스의 눈동자에는 묘한 경계심이 서렸다. 왠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아이리스는 뒤늦게 내 시선을 눈치채고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종이 뒤집듯 달라지는 태도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먼저 눈길을 피했다. 그러곤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진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요.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봐요.”
“아니,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어차피 길 안내는 제 몫이었으니까요.”
거짓말이 미안해질 정도로 진은 진심을 다해 내 몸을 걱정해 주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이리스까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얹었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야죠. 진 씨의 말대로 안색도 안 좋은데.”
“미안해요. 다음에 꼭 …인사하러 갈게요.”
“정말요?”
그가 환하게 웃으니 가지런한 치열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나를 탐색하듯 훑어본 것만 아니었어도 참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텐데. 가슴 한구석에 찜찜함을 안은 채로 가려 하니 아이리스가 먼저 악수를 권했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맞잡자 눈매가 곡선으로 휘어졌다.
웃는 얼굴 속 진심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손을 놓으려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악력이 나를 붙잡았다. 이윽고 초점 없는 회색 눈동자가 소매로 가려진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예쁜 팔찌네요.”
가까이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갑자기 히페리온의 팔찌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황급히 잡힌 손을 빼내며 옷소매를 끌어내렸다.
“…고마워요.”
그 후로 도망치듯 뒤도 안 돌아보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운 없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그와 맞닿았던 손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아이리스와 너무도 달랐다. 겉껍데기만 똑같을 뿐, 마치 다른 사람이 빙의된 것 같았다. 그래서 종이와 펜을 들었다. 다시 한 번 소설 속 아이리스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약초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주인공과 달리 지극히 평범했다. 평범하게 배 속에서 열 달을 꽉 채우고, 그 시대 평균 체중으로 태어났으며, 딱히 빼어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다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힘을 쥐고 세상 밖에 나온다.
그것은 바로 마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마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안타깝게 여겨 공생을 위한 모험 길에 올랐으니- 그 누가 아이리스 딜런을 영웅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면, 황실의 관리하에 마물 대학살을 위한 도구로 쓰였을지도 모른다.
자칫 그가 위험한 야망을 가졌더라면, 마물을 이용해 제국을 위협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작가는 아이리스 딜런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영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완벽한 환경과 성정을 설계한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하지만 오늘 마주친 아이리스는 상상과 전혀 달랐다. 특히 나를 붙잡은 손길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표면상으로는 초면인 그에게 미움을 산 이유를 모르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복잡하게 정리된 신상 정보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종이를 구겼다.
“제대로 확인해야겠어.”
다시 만나러 가는 날, 내가 아는 아이리스의 정보와 하나부터 열까지 대조해 봐야겠다.
***
진은 아이리스가 마물학과에 편입했다고 말했다. 약초학을 가르치는 바인하르 교수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오고도 교수의 전공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는 아이리스 본인의 의사 때문이었다. 꼭 마물학을 배워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고집 센 바인하르 교수까지도 설득했단다.
아무튼 진의 도움으로 아이리스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도서관에서 마물학을 시작할 때 도움이 되었던 책을 빌려다가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이 끝나자 뒷문으로 피곤한 학생들이 줄지어 나왔다. 살짝 비켜서 있다가 보랏빛 머리카락이 보이자마자 친숙하게 이름을 불렀다.
“아이리스?”
혼자 책을 들고 나오던 청년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얼핏 스친 감정은 당혹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표정을 숨기기에 능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는데, 태오 씨였네요.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네. 그래서 오늘은 책을 추천할 겸, 같이 식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왔어요.”
“저야 좋죠! 마침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남네요.”
아이리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어려움 없이 그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벌써 점심을 먹으러 온 몇몇 학생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긴 항상 메뉴가 정해져 있더라고요. 못 먹는 거 있어요?”
소설에서 아이리스는 바다에 사는 마물을 만나러 가기 위해 어부의 배를 얻어 타게 된다. 그때 어부가 호의로 내민 조개를 먹었다가 기관지가 부어 하루 내내 누워 있었다.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은근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리스는 선뜻 대답했다.
“아, 조개류는 못 먹어요. 어렸을 적에 멋모르고 먹었다가 거의 죽을 뻔했거든요.”
체질은 똑같지만, 알레르기를 알게 된 사건이 달라 의아함만 남았다. 일단 오늘의 메뉴에 조개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빌린 책을 올려놓으니 아이리스가 눈짓으로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게 추천해 주고 싶다는 책이 이거예요?”
“네. 마물학과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게 도움이 됐던 책을 빌려 왔죠.”
“고마워라….”
입은 환하게 웃고 있었으나, 미처 눈까진 신경 쓰지 못했나 보다. 폭풍우가 다가올 하늘처럼 침울한 빛을 띤 회색 눈동자는 무감각하기 짝이 없었다. 지적했다간 더욱 표정을 숨길 게 확실했기에 마주 웃으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쩌다 마물학과에 온 거예요?”
“부모님의 영향이 컸죠.”
“두 분이 마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약초꾼이셔서 산이나 외진 숲에 자주 가셨어요.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마물에 대해 접하게 됐죠.”
부모의 직업도 소설과 같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여전히 약초꾼이신 거예요?”
“지금은 불의의 사고로 두 분 안 계세요.”
“저런…. 죄송해요.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에요~ 오래 전 일인 걸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차 물은 거지만, 마치 처음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양 눈가를 찡그렸다. 이로써 부모의 직업과 현재 행방까지 모두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러면 결국 주인공 아이리스가 잘못된 루트로 빠져들었다는 결론밖에 낼 수 없다.
때마침 나온 수프를 떠먹으며 일상적인 화제를 끄집어 냈다.
“바인하르 교수님과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모두 클라우스 자작님 덕분이죠.”
“…클라우스 자작이요?”
“네. 자작님께서 저를 후견해 주시거든요.”
잠깐.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가 했더니…. 카르 신관이 그림자를 본 날에 대해 설명할 때 분명 언급했다. 당시 레톤 신전에 왔었던 신도가 클라우스 자작이 데리고 다니는 아이였다고.
“그분께서 힘써 주신 덕분에 바인하르 교수님을 뵈었고, 다행히 좋은 이미지를 남겼네요.”
물론 클라우스 자작은 부유한 귀족으로 보이니 꼭 한 명의 아이만 후견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동일 인물인지 확인해야 했다. 짧은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휘 젓다가 아! 하고 탄성을 뱉으며 말했다.
“최근에 레톤 신전에 갔다가 카르 신관님께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이야기요?”
“종종 신전에 와서 도와주니 고맙다고 얼마나 칭찬하시던지….”
지금껏 유하게 꼬리를 내리고 있던 눈썹 끝이 비죽 올라갔다. 분명 반응이 있다. 능청스럽게 팔짱을 끼며 테이블에 상체를 기대고 말을 이었다.
“일전엔 유리컵을 깼는데 신관님께서 다칠까 봐 직접 치운다고 했다면서요?”
“…….”
“그거… 아이리스 맞죠?”
아이리스는 선선히 대답하지 못하고 찬물로 목을 축였다. 식기가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만 울리는 레스토랑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팔짱을 껴 숨긴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신관님도 참…. 별걸 다 얘기하셨네요.”
너구나. 사건 당일에 왔던 신도가.
멋쩍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에 다시금 당혹감이 서렸다. 찾길 포기했던 사람을 절묘하게 만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그가 주인공이자 영웅인 아이리스 딜런이라니. 참으로 기구한 우연이었다.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자 아이리스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그런데 거긴 왜 갔어요? 태오씨도 신도인가요?”
“아뇨. 저는 다른 의뢰를 받고 조사하러 갔었어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표정 변화를 보기 위해 일부러 뜸을 들이며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내 의도를 알아챈 듯 자의적인 미소로 일관했다.
“그날 기도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갑작스런 질문을 들은 아이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날을 회상하는지, 아니면 적당한 변명을 만들고 있는지는 애석하게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흔들림 없는 회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딱히… 아무것도 못 봤네요.”
아이리스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에 순간 의심을 저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고맙게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는 아이리스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 뭘 봤는지는 안 물어봤는데….”
이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아이리스는 제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서 일부러 천연덕스럽게 수프를 떠먹으며 물었다.
“뭔가 볼 게 있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