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44/305)

#44

며칠 후, 연구실에 독수리 문장이 찍힌 서신이 날아왔다. 드디어 레톤 신전 일대의 조사가 끝난 모양이다. 조사 보고서에는 이해를 방해하려는 듯 장황한 문장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날 카르 신관이 본 그림자는 마물의 것이 아니다.

숲을 전부 돌아보았지만 마물의 흔적은 물론, 근처에 서식지도 없었다고 한다. 황실 조사대가 공식적으로 마물이 아니라고 단정지어 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끝까지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 조사대 중 누군가는 마법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력과 관련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심지어 보고서 끝줄에는 명확하지 않은 추측을 삼가고, 만일 소문이 돌아다닐 경우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되어 있었다. 저 세계나 이 세계나 논란이 될 만한 일은 일단 묻고 보는 구나. 무작정 덮는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닌데.

조사대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날아오는 동안, 나는 마침내 첫 과제를 마무리했다.

“다 됐나?”

“아, 네! 정리만 해서 바로 보여 드릴게요.”

종이 뭉텅이를 겹쳐 들고 책상에 툭툭 내리쳐 높이를 맞췄다. 가지런히 내려놓으니 맨 앞장에 ‘비브린트 숲의 사이누르’라고 적힌 깔끔한 글씨가 눈에 띠었다. 이 세계에서 대학원생이 되고 처음으로 쓰는 보고서였다.

“…좋았어.”

얇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마지막으로 오탈자를 확인했다. 학회 발표용이나, 커리어와 직관된 보고서만큼 중요한 문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레인에게 보여 준다 하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 초고를 건네주는 행동조차 신입생 시절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음.”

과제를 건네받은 아스레인은 곧바로 다른 일을 뒤로 미루고 보고서에 집중했다. 그냥 읽는 것만 아니라 이따금씩 펜으로 메모하기도 했다. 무슨 내용을 쓰는지가 보이지 않아 공손히 모은 두 손에 순간 식은땀이 배었다.

초조함에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아스레인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손 봐야 할 부분이 몇몇 보이지만, 일단은 깔끔해서 보기 좋군. 보고서는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하…. 어깨너머로 본 게 있어서 그런가 봐요.”

이 세계에서는 처음이지만, 전생에서는 질릴 만큼 다양한 보고서를 썼다. 실험, 인턴, 답사는 물론이고 전혀 연이 없는 교양 수업까지- 보고서를 쓰기 위해 대학을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생 건반을 누르는 피아니스트처럼 타자만 치다가 죽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전부 지금을 위한 기초 공사였나 보다.

“수고했네. 다시 읽어 보고 수정할 부분을 정리해서 돌려주도록 하지.”

아스레인의 반응이 생각보다 긍정적이라 기쁘기도 잠시, 뒤이은 말에 기함할 뻔했다.

“어느 정도 다듬은 후, 온실에 있는 연구원들에게도 보여 줘도 되겠나.”

“…예?”

형편없는 내 보고서를 남한테 보여 준다고? 학생이나 원생도 아니고, 버젓이 전문가로 일하는 연구원들한테?! 당황스러운 제안에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했다.

“하, 하지만 교수님. 고작 대학원생인 제가 쓴 보고서잖아요. 그들은 저보다 훨씬 사이누르에 대해 잘 알 텐데요….”

“당연히 그들이 자네보다 사이누르에 대해 잘 알겠지.”

“그럼 대체 왜 보여 주시려는 거예요?”

제 불쌍한 보고서를 게시판에 걸어서 공개 처형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경악하면서 벌어진 입을 살짝 틀어막자 아스레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태오. 다른 개체도 아닌, ‘그날 비브린트 숲에서 구조한’ 사이누르의 특성에 대해서는 자네가 제일 잘 알 테지. 그러니 온실에서 연구하는 그들에게도 이만한 보고서가 없을 걸세.”

“그…런가요?”

확실히 연구를 진행한 사람의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단 건 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얼떨떨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적이자 아스레인이 말했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자신을 너무 낮추지 말게.”

“…예. 교수님.”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껏 대학원을 다니며 보고서로 칭찬받은 적은 없었다. 잘 썼다거나 부족하다거나하는 평가조차 받지 못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지도 교수는 바쁘다는 이유로 논문 초고 피드백을 미뤘고, 심할 때는 열심히 쓴 보고서를 파쇄기 앞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모든 노력을 무시당하면서도 오직 졸업만 바라보고 버텨 왔다.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이리도 달콤한지 몰랐다.

“감사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 가감 없이 지적해 주세요.”

“그럼 내가 봐줄 거라고 생각했나.”

얇은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혹독한 피드백을 해 주리란 말이 반갑게 느껴진다 하면 조금 변태 같을까. 다시 한 번 아스레인을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감격에 젖어 있는 사이, 시간을 확인한 그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강의할 시간이 됐군. 이따가 마저 읽도록 하마.”

“아, 그럼요. 다녀오세요!”

칼같이 시간 약속을 지키는 아스레인을 배웅하고 문을 닫았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 연구실 한가운데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교수님이… 읽어 주신대. 내 보고서를…. 헤헤….”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혹시 밖에까지 들릴까 봐 겨우 참았다. 바보 같은 웃음을 실실 흘리던 그때였다.

쿠당탕! 갑자기 연구실 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깨가 절로 움찔거릴 만한 굉음이었기에 곧바로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바닥에 쏟아진 책 사이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진을 발견했다.

“진! 괜찮아요?”

“네…. 저는 안 다쳤는데 책들이 꽤 아프겠네요.”

하, 하. 딱딱하게 끊기는 웃음 속에는 책을 주울 의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친 곳은 없다니 다행이지만, 어째 진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마치 시험을 앞둔 고시생 같다고 할까…. 프로젝트 마감을 앞둔 기획팀 같다고 할까….

서둘러 소매를 걷고 나서서 책을 주워 주며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논문 소재 찾기 겸, 교수님 심부름이요.”

“역시… 논문 주제를 정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죠.”

공감하며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진은 기다렸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말도 마요. 괜찮은 소재를 발견했다 하면… 무조건 누군가가 먼저 연구했다니까요? 선행 연구와 겹치는 것도 정도껏이죠. 이미 결론이 나왔는데, 거기서 뭘 더 어떻게 빨아먹으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요.”

어느 세계나 논문을 앞둔 사람의 생각은 다 똑같나 보다. 주제를 정하는 데만 몇 달을 쏟아부은 과거의 모습이 떠올라 착잡해졌다. 부쩍 굽은 등을 토닥여 주니 진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태오는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아… 왜요?”

“아까부터 왠지 웃는 상이길래요.”

아무래도 얼굴에 전부 티가 나나 보다. 묘하게 상기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실은… 교수님께서 제 보고서를 엄하게 평가해 주신다고 하셔서요.”

사실대로 불자마자 진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자, 잠깐만요. 그게… 기쁜 일이에요?”

“네? 당연하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도 내 진심을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책을 품에 안고 일어난 진은 입꼬리를 부자연스럽게 씰룩거렸다.

“뭐, 태오가 기쁘다면 그걸로 된 거죠. 아무튼 안겔루스 대학에 많이 적응한 것 같아 저도 좋네요.”

적응한 건가? 하지만 나는 연구실 안에서 편안함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그래. 이 묘한 감정을 정확히 짚어 주는 표현이 떠올랐다.

“벌써 정이 들었나 봐요.”

“다 정으로 해먹고 사는 거죠. 정 들면 힘들어도 버티게 되잖아요?”

“맞아요. 솔직히 아멜리 백작가에서 일할 때는 충성심 같은 건 추호도 안 생겼는데.”

“비교 대상이 영 잘못됐잖아요.”

“하하, 그러네요. 정말 그때는 제 몸 하나 건사하면 그걸로 만족했어요.”

책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멜리 백작가에 팔려 가듯 도착했다. 나를 무시하는 고용주, 그걸 쉬쉬하는 주변인. 그리고 점점 익숙해지는 나. 전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안겔루스 대학은…. 아니, 아스레인이 있는 이 연구실은 다르다.

“그런데 이곳에 온 후부터… 사소한 일상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종종 공감대를 나눌 수 있는 진과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봐 주는 세잔. 온실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따스한 공기와 나를 반겨 주는 단델과 누르. 그림자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그누스. 그리고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아스레인까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한 내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단지 이따금씩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할 뿐이다.

“가끔 열심히 하는 태오를 보면 저까지 힘이 난다니까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진은 바인하르 교수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손이 부족한 그를 위해 책을 함께 옮겨 주곤 물었다.

“이제 다시 연구하는 건가요?”

“아뇨. 갈 곳이 있어요.”

“또 어딜 가시는 거예요?”

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편입생이 와서 길 안내를 하러 가야 하거든요.”

“이 시기에 편입생이요?”

“네에. 그 대단하신 바인하르 교수님께서 직접 추천하셨대요. 평민이라던데요?”

교수의 추천으로 들어온 평범한 출신의 학생. 나와 접점이 꽤 많다. 마침 과제도 제출했겠다, 아스레인의 강의가 끝날 때까지 여유로우니 편입생을 보러 가고 싶어졌다.

“혹시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진짜요? 하…. 다행이다. 둘이서 대체 뭔 얘기를 하나 걱정이었거든요.”

오히려 진은 내 동행을 반가워했다. 연구실 문을 닫고 본관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나마 태오 때는 같은 원생 처지이니 말이라도 통했죠. 접점도 없는 학생이랑 뭘 어떻게 친하게 지내라는 건지. 나 원 참.”

허공에서 손을 휘휘 저은 진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게다가 전에 교수님이랑 셋이서 대면한 적이 있는데, …뭔가 싸했어요.”

“뭐 때문에요?”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사람을 무시하는 느낌?”

불친절한 설명에도 대강 무슨 느낌인지 감이 잡혀 신기했다. 쓴웃음을 흘리며 본관에 도착하니 진은 시계탑을 가리키며 저곳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창 강의 시간인지라 복도를 활보하는 학생이 몇 없는 덕분에 시계탑 아래 서 있는 학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 저기 있네요.”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진한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진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인기척을 느낀 청년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먹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운 회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자마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많이 기다렸어요? 교수님 심부름 좀 하고 오느라 늦었네요.”

“아니에요. 저도 수업이 막 끝난 참이었어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그들과 달리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이 박힌 것처럼 답답해져 살짝 벌어진 입으로 숨만 내쉬는 게 전부였다.

“이쪽은 태오라고 해요. 아스레인 교수님 아래서 공부하고 있죠.”

몇 번을 보고, 또 세세하게 뜯어봐도 틀림없었다.

“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뒷목을 살짝 덮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꼭 붓꽃을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안녕하세요. 전 아이리스 딜런이라고 해요.”

그는 내가 들어온 소설 <저주란 축복> 표지를 장식한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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