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43/305)

#43

“꼭 특별하지 않아도 되니 전부 말씀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간절하게 애원하니 신관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초점을 잃은 분홍색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 허공을 방황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이 선 듯 바짝 마른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정말 별거 아닙니다만…. 그 청년이 고해소로 들어가기 전, 물을 한 잔 달라더군요.”

“물이요?”

“예. 열성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목이 마를 수도 있으니 의심 없이 컵에 물을 담아 줬습니다.”

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신관이 이어서 말했다.

“그 후 기도실에 나온 그에게서 빈 잔을 돌려받았는데, 그만 손이 미끄러져 유리잔을 깨고 말았습니다.”

“다치셨어요?”

“다행히 다치진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치우려고 하니 청년이 나서서 위험하니 물러서 있으라더군요. 그래서 적당히 조각을 담을 만한 천을 가져와 그에게 주었습니다.”

카르 신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쳤다. 뭔가 더 얘기해 보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지만, 신관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설마 끝이야? 눈가를 찡그린 채 실망감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게 전부인가요?”

“예. 그 아이는 이따금씩 클라우스 자작님과 함께 올 때도 잡일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이런 젠장. 하도 뜸을 들이기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을 숨기고 있나 싶었다. 이제부터 엄청난 단서가 속속히 밝혀지리라 확신하고 있었던 나는 허탈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얼핏 들으면 일기장 한구석을 장식하지도 못할 만큼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다. 연구를 할 때도 언제나 사소한 실수에서 문제가 비롯되지 않았나.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떠드는 신관을 가볍게 무시하고 속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목이 마른 청년이 물을 청하고 빈 컵을 돌려받다가 그만 유리를 깨 버린다. 그때 청년은 깨진 유리에 다칠 수도 있으니 자신이 정리를 도맡았다. 여기서 그나마 주목할 만한 정보는 ‘고해소에 물이 담긴 컵을 들고 갔다.’ 와 ‘깨진 유리를 치웠다.’ 정도일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장 가능성 있는 유리 조각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지금 그 유리 조각들은 어디 있나요?”

“쓰레기는 신전에 방문하는 신도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창고에 모아 두는 편입니다.”

창고. 쓰레기. 유리 조각. 세 개의 단어가 머릿속을 유영하다가 한곳에 안착했다.

“그러다 마을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한 번에 치우죠.”

“…그렇군요.”

지금껏 청년이 마법을 썼다는 가설을 믿으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청년이 떠난 후에 시간 차를 두고 마법이 일어난 걸까. 물론 이론상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다. 코어를 신전 안에 남기고 가면 된다. 다만 누군가에 의해 섣불리 제거돼선 안 되고, 일이 모두 끝난 후 증거가 남지 않도록 회수하기도 쉬워야 한다.

내가 가진 히페리온의 팔찌처럼 코어는 여러 형태를 갖고 있으나, 가장 흔히 쓰이는 코어는 마석이다. 세잔 덕분에 처음으로 마석을 봤을 때 떠오른 생각을 기억한다. 무지한 내 눈에는 마석이 유리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고에 있단 말씀이시죠.”

만약 청년이 유리 조각을 치우며 마석을 함께 섞어 놓았다면? 확실히 마석은 마법이 일어난 시점에 신전 내부에 존재한다. 게다가 쓰레기와 함께 뒤섞여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 어쩐지 퍼즐을 완성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짧은 탄성과 함께 신관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쓰레기를 버리러 마을에 갔어야 했는데 일 때문에 깜빡했군요. 아침에 잊지 않도록 모은 쓰레기를 담장 앞에 내다 놓기까지 했는데….”

“담장 앞이요?”

“예. 그 사이 길고양이가 천을 찢어 쓰레기를 헤집어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깨를 으쓱이는 신관이 길고양이의 장난을 걱정하는 동안, 나는 다른 누군가 쓰레기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골머리를 썩였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어 얼른 대화를 마무리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교수님께서 기다리실 테니 이만 나갈까요?”

“그러시죠.”

신관을 따라 고해소를 나오면서 문득 내가 너무 한 사람에게 꽂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혼자 착각했다는 결론이 나올지라도 직접 쓰레기를 뒤져 봐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신전 밖으로 나오니 팔짱을 낀 채 석상을 구경하는 아스레인이 보였다. 이윽고 영롱한 금색 눈동자가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무엇을 알아냈느냐고 묻는 것 같아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날렵한 눈썹이 살짝 올라가나 싶더니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다.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카르 신관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차라도 대접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괜찮네. 그보다 뒤뜰을 둘러봤는데….”

분위기상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다. 지금 아니면 혼자 행동할 기회는 없다. 실례를 무릅쓰고 아스레인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음? 어딜 가려고 그러나.”

“아까 들어오면서 노란 꽃을 봤거든요. 단델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능청스럽게 엄지로 담장 너머를 가리키니 아스레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철없는 아이처럼 잰걸음으로 정문을 통해 나갔다. 활짝 열린 철제문을 지나가니 낮은 담장 앞에 천 보따리가 보였다. 다행히 누군가 가져가지 않았다.

보따리를 풀어 보기 전, 담장 너머로 재빨리 눈치를 살폈다. 재차 그들이 내게 관심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매듭을 풀었다. 보따리를 열어 보니 그 안에 여러 생활 쓰레기가 보였다. 근처에서 짧은 나뭇가지를 구해 이리저리 뭉친 쓰레기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신관은 분명 천 조각에 깨진 유리를 담아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보관했다고 말했다. 그럼 하나뿐인 보따리 안에는 반드시 유리 조각이 담긴 천 주머니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유리 조각은 없었다.

“…어디 갔지…?”

더 정확히는 유리 조각을 담은 천만 사라졌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쓰레기를 건드린 게 분명하다. 신관이 제때 쓰레기를 마을에 버리지 않아 불안해진 건가? 여기서 유리 조각을 보고 가설을 접을지 말지 고민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망할. 이젠 정말 심증뿐이다. 짧게 혀를 차며 보따리를 다시 묶어 담장 아래 두었다.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졌다. 툭, 데구루루. 하염없이 굴러가던 나뭇가지가 낙엽에 가려진 돌부리에 걸려 우뚝 멈췄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숨이 푹 나왔다.

“…하아.”

드디어 도움이 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번에도 코앞에서 놓쳐 버렸다. 아쉽지만 혼자서 일대를 샅샅이 조사할 수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아스레인에게 돌아갔다. 그새 카르 신관과 대화가 끝난 모양인지, 두 쌍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날아왔다.

“꽃은 찾았나?”

“아뇨. 은행잎을 잘못 본 거였어요. 하하….”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모든 볼일이 끝났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아스레인이 먼저 걸음을 돌렸다. 함께 신전을 떠나기 전, 신관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신관님.”

“예. 부디 레톤 신의 창이 당신을 향하지 않길 바랍니다.”

다시 들어도 썩 달갑지 않은 축복이었다.

마땅히 마차를 세워 둘 곳이 없어 조금 걸어가야 한다는 아스레인의 말을 얌전히 따랐다. 조급했던 오전과 달리 그가 내 보폭에 맞춰 준 덕분에 나란히 걸어가며 물었다.

“숲에서 뭔가 찾으셨나요?”

“글쎄. 찾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스레인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네. 보통 숲을 지나갈 때면 뾰족한 돌부리에 걸려 죽은 비늘이 남거나, 거친 나무껍질에 스쳐 털이나 깃이 떨어져 있지.”

“…그런데요?”

“하지만 그곳엔 무언가 지나간 자국은 있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네.”

살아있는 마물이라 보기 어렵다. 그의 소견에 동조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마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따라서 그만 조사대에 사안을 넘기려고 하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내게 아스레인이 물었다. 잠시 표현을 고르다가 고해소로 들어간 후부터 본 것을 묘사했다.

“카르 신관이 마물의 그림자를 목격한 창은 얼굴을 내밀기 어려울 정도로 작을뿐더러 열리지도 않았습니다. 시야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죠. 따라서 방향에 의해 그림자를 겹쳐 마물이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예. 하지만… 수풀뿐인 숲에서 뱀처럼 생긴 곡선 그림자를 만들어 내긴 어렵습니다.”

아스레인은 내 의견을 귀 기울여 들어 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당시 신전에 들렀던 청년을 꼬집으려다가 힘겹게 말을 삼켰다.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정황만으로 의심을 하는 건 나 혼자만으로도 족하다. 다만, 가능성은 제시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저는 마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마법이라….”

그리 놀랍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마 그 또한 마법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매끈한 턱을 어루만지던 아스레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신전 근처에 당분간 기사단을 보내어 정찰을 부탁하기로 했네. 자네의 말대로 마법일 수도 있으니 조사대에게 사안을 넘길 때 귀띔해 두도록 하지.”

마음 같아서는 사이누르 사건처럼 직접 뛰어들고 싶었지만, 나의 치기로 인해 아스레인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조사대가 마법과 관련된 단서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그때 입을 열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순순히 수긍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마물일 확률이 지극히 낮아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마물이 민가로 내려왔다고 오해를 살 뻔했어요.”

“남들도 그리 생각해야할 텐데.”

“…네?”

짧게 숨을 들이쉰 아스레인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문은 널리 퍼질수록 점점 자극적인 형태로 변화하지. 만약 이번 신전에서 일어난 사건이 마을에 퍼졌다면…. 지금쯤 누군가는 반드시 성역이라고 여겼던 신전까지 마물에게 침범 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네.”

“설마요. 아직 확실치 않은 정보잖아요.”

“과거에는 그런 일이 적잖이 있었지. 그래서 마물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잦은 지역에 일부러 신전을 지어 억울한 마물들의 서식지를 빼앗았네. 그게 소문인지 진실인지… 진위 확인조차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

지역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은 신전이 지어진 이유가 실은 마력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는 건 전혀 몰랐다.

아스레인은 지나간 옛일들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힘들어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때와 지금은 달라요. 교수님 덕분에 저처럼 마물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보호소에서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요.”

말뿐이지만,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랐다. 효과가 있는 걸까. 아스레인은 나를 바라보며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래. 자네 말대로 많은 것이 변했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웃는 얼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쓸쓸해 보였다. 가끔씩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띨 때면 심장이 저릿해진다. 내가 위로해 줄 수 없는, 감히 어루만져 줄 수 없는 상처를 들추는 기분이라 이상한 죄책감까지 느껴지곤 한다.

지금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없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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