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42/305)

#42

따사로운 햇살이 흘러 들어와 콧등에서부터 뺨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때문일까. 부드러운 미소조차 꿍꿍이를 감추기 위한 도구로 느껴졌다. 분명 카르 신관은 그날 일어난 사건의 일부를 우리에게 숨기고 있다.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낼까 고민하는 사이, 주변 탐색을 마친 아스레인이 물었다.

“마물의 그림자를 목격한 곳은 어디인가.”

“신전 안에서 작은 창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한 걸음 물러선 신관이 소매를 나풀거리며 신전을 가리켰다.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의 정면과 달리 눈길이 닿지 않는 옆과 뒤쪽은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색 바랜 석조 벽을 따라 평범한 사각 창문이 여럿 보였다. 크기는 또 얼마나 작던지, 머리는 내밀지도 못하고 팔 하나 정도만 겨우 움직일 정도였다. 창이 좁은 만큼 밖을 내다볼 시야까지도 꽤나 제한되었을 텐데….

잠시 고민하다가 신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가서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신관은 예상보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정문으로 향하는데, 묵묵히 따라오던 아스레인이 먼발치에서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소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교수님?”

“태오. 혼자 들어갈 수 있겠나. 나는 그 사이 이 일대를 한 번 더 둘러보겠네.”

“예? 아, 네. 그럼 당시 마물을 봤다던 창문 근처로 가 볼게요.”

“부탁하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아스레인은 지체 없이 뒤뜰로 돌아갔다. 평소 그라면 무엇이든 직접 보려고 했을 텐데, 가장 중요한 신전 내부 탐색을 내게 맡기다니 퍽 이상한 일이었다. 말 못 할 이유가 있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저만치 앞서간 카르 신관을 따라잡았다.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신관이 혼자 오는 나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혼자 들어오시는 겁니까?”

“아, 교수님께선 밖을 더 둘러보시겠대요.”

“그렇군요. 안을 직접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죠.”

신관은 못내 아쉬워하며 정문을 열었다. 끼이익- 기괴한 경첩 소리와 함께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높은 천장엔 오랫동안 불이 들어오지 않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가운데 통로를 비우고 양옆으로 긴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신전을 둘러보는 동안, 신관은 의자 위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주로 이곳에서 레톤 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예전엔 신도들이 많아 빈자리 없이 빼곡했다는데… 저도 본 적 없는 광경인지라 자세히 묘사해 드릴 수가 없군요.”

또각. 또각. 텅 빈 기도실에 울리는 구두 소리가 어쩐지 쓸쓸하게 들렸다. 그를 따라 가운뎃길로 들어가니 커다란 제단 아래 두 짝으로 된 나무 문이 보였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문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문틀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했다.

‘그릇된 껍데기를 벗고 진실을 마주하리라.’

의미를 쉽게 알아챌 수 없어 문장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신관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문 너머부터 고해소입니다. 거짓된 모습을 버리고 레톤 님께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신도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죠. 따라서 누군가 기도하는 동안, 방해받지 않도록 제가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신관이 문 앞을 지키고 있다…. 그 말은 즉, 고해소에 들어간다면 잠시나마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자마자 자연스러운 의문이 떠올랐다.

“그때 왔다던 청년도 이곳에 들어갔었나요?”

“예. 고해소에서 기도하고 갔습니다.”

전과 달리 발길이 극히 줄어든 신전이다. 그러니 신관은 신도 한 명 한 명에게 온 관심을 쏟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대한 관심이 고맙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썩 달갑지 않았겠지. 그때 유일하게 신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고해소다.

“그럼 마물의 그림자를 본 곳은 어디인가요?”

“그것도 고해소 안에 있는 창문입니다.”

여러 정황이 의심되는 이상 고해소에 들어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도 들어가도 될까요?”

“지금은 안에서 기도하는 이가 없으니 괜찮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재빠른 손길이 옆에서 튀어나와 한 발 먼저 문고리를 잡았다. 의아하게 옆을 돌아보니 카르 신관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 마력이 끊기면 안 되는 물건을 갖고 있습니까.”

“음,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고해소 안에서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는 이 안에 놓인 성유물이 마력을 밀어냅니다.”

“마력을… 밀어내요?”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신관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피며 대답했다.

“신의 가호를 입은 성유물에서는 대단한 양의 신력이 뿜어져 나옵니다. 그로 인해 성유물을 중심으로 신력이 가득한 성역이 형성되죠. 돔처럼 둥그렇게 만들어진 영역 안에 들어가는 순간 웬만한 마법은 모두 풀립니다.”

이전 세잔에게서 들었던 마법의 기초가 떠올랐다. 성질이 맞지 않은 마력끼리 섞일 수 없듯, 신력 또한 모든 마력을 밀어내는 모양이다.

“신기하네요…. 아, 문제될 물건은 없어요.”

확실하게 대답하자 신관은 고해소 문을 열어 주었다. 15평 정도 되는 좁은 방엔 촛불조차 없었다. 하지만 전혀 어둡지 않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단상에 덩그러니 놓인 잔이 은은하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잔이었으나, 그를 둘러싼 빛무리가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드러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신관은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과거 대신관께서 신탁을 받을 때 성수를 담았던 잔입니다. 비록 시간이 오래되어 그 빛을 많이 잃었지만… 여전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마력을 체감하지 못하는 내가 불편하다 느낄 정도였으니, 이 방 안에 들어찬 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숨이 가빠졌다. 고작 문턱을 지났을 뿐인데, 바깥보다 공기가 무거웠다.

콜록.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잔기침하자 소매가 살짝 흘러내렸다. 그 탓에 옷으로 가려져 있던 히페리온의 팔찌가 드러났다. 하지만 팔찌의 형태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

팔찌의 재료로 쓰인 필리스 넝쿨은 지금껏 한 번도 생기를 잃은 적 없었다. 그런데 고해소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떡잎까지 말라비틀어졌다. 아마 지금껏 마력으로 시들지 않다가 신력에 밀려 본래의 형태를 되찾은 듯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넝쿨이 끊어질 것만 같아 얼른 소매를 내려 팔찌를 가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이목을 끌었다.

“바로 이 자리입니다.”

“예?”

“마물의 그림자를 본 창문 말입니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가락이 작은 창문을 가리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손잡이는커녕 문이 열릴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등으로 창을 툭툭 건드리자 눈치 빠른 신관이 말했다.

“고해소에 있는 창은 전부 열리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를 할 때면 커튼으로 가려 놓죠.”

완벽히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다. 게다가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도 예상대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었다. 혹시 여러 물건의 그림자가 교묘하게 겹쳐 마물처럼 보인 건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보이는 뒤뜰엔 수풀과 나무뿐이었다.

“여기서 지나간 걸 보신 건가요?”

“예.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차분하게 말한 신관은 창가에 나를 두고 성유물 앞으로 걸어갔다. 경건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가능성을 재 보았다.

아스레인의 설명에 따르면 마물은 신전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관이 본 그림자는 착각, 혹은 누군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환각이다.

만약 환각이라면 마법은 어디서 썼을까. 가장 안전한 장소는 당연히 뒤뜰과 이어진 숲이다. 하지만 주로 신전 안에 있는 신관에게 마법을 걸기에는 거리가 멀어 어려움이 따른다.

두 번째로 가능성 있는 장소는 신전 안이다. 달리 시선을 분산시킬 요소가 없는 신전에서 신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 고해소밖에 없다. 그러나 고해소는 성유물이 내뿜는 신력으로 인해 마법을 시전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엇을 가정하든 걸림돌이 존재한다. 그럼 정말… 마물을 본 것인가?

다른 각도에서 밖을 볼 수 있나 싶어 구석에 딱 달라붙었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답답했다. 혹시 커튼으로 가려져 놓친 단서가 있을까 봐 팔을 들어 커튼을 걷었다. 이번에도 소매가 살짝 흘러내려 히페리온의 팔찌가 드러났다. 그런데 팔찌의 모습이 서서히 달라졌다.

“…어?”

겨울을 맞이한 낙엽처럼 바짝 말라 있던 잎사귀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이윽고 예전처럼 푸르른 필리스 넝쿨로 돌아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성유물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곧바로 실험해 보고자 팔은 커튼을 잡은 채로 두고 걸음만 옆으로 옮겼다. 팔찌는 여전히 푸르렀다. 하지만 팔을 천천히 안쪽으로 굽혀 ‘어느 지점’을 지나자 필리스 넝쿨이 끝에서부터 말라 가기 시작했다. 똑같은 속도로 팔을 펴니 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

신관은 성유물을 중심으로 돔처럼 둥그런 성역이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정사각형인 고해소 구석에 신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신관의 눈을 피해 충분히 마법을 쓸 수 있다.

가설의 반증이 하나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만 풀면 된다.

신관에게 성공적으로 마법을 걸었다 하더라도 원하는 시점에 환각을 보게 하려면, 상식적으로 시전자가 신전 근처에 남아 있어야 한다. 가장 의심되는 이는 당시 신전에 들른 청년이다. 하지만 카르 신관은 청년이 기도를 마치고 곧장 신전 밖으로 떠나갔다고 증언했다. 시전자가 그 자리를 뜨고도 마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만약-

“코어를 남겨 두었다면….”

신전 근처에 충분한 마력을 머금은 코어를 두고 떠났다면, 원하는 시점에 마법을 쓰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선 당시 상황을 아는 신관의 증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입을 열어 줄지는 미지수였다.

아직도 성유물 앞에 서 있는 신관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카르 신관님. 고해소는 어떤 곳이죠?”

“레톤 님께 기도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신관은 당황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았다. 평온해 보이기도 하는 그에게도 약점은 존재할 것이다. 내게 교수님의 말이 절대적이듯, 그에겐 신이 절대적이겠지.

“그럼 문 위에 쓰인 글귀처럼 이 자리에 선 모든 인간은 진실을 불어야 하는 거겠죠.”

신을 들먹이니 줄곧 차분하던 분홍색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말씀해주세요.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카르 신관이 등진 성유물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감시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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