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41/305)

#41

그림자뿐인 마물 목격담 때문에 간밤을 꼬박 지새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알기로 마물이 버젓이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시오 왕조 시절이 마지막이었다. 소설에서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왔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머리를 열심히 쥐어 짜냈지만, 불행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주인공 아이리스는 사람보다 마물을 가까이했기에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사회에 떠도는 소문을 한발 늦게 접하곤 했다. 그러니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소설에 자주 묘사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어중간하게 미래를 알고 있으니 불안만 커져 갔다.

결국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아스레인에게 마물 목격담을 전해 주려 연구실로 달려갔다. 어렵게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지만 아스레인은 자리에 없었다. 평소엔 그가 나보다 훨씬 일찍 연구실에 도착해서 인사를 받아 주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정이라도 생겼나 싶어 일단 책상에 앉아 못 다 한 보고서를 정리했다.

그렇게 약속한 출근 시간 9시가 훌쩍 지나 10시가 되었다. 걱정이 앞서 계속 같은 부분만 밑줄 치던 그때였다. 덜그럭 문고리가 돌아가며 다소 급하게 문이 열렸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들어온 남자는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아스레인이었다.

“교수님! 아침에 무슨 일 있었….”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하겠네.”

“예?”

“옷을 챙겨 입고 따라 나갈 준비를 해라. 급히 갈 곳이 있으니.”

오늘따라 아스레인이 왠지 여유 없어 보였다. 넓은 보폭으로 척척 연구실을 가로지른 그는 내 책상 위에 자그마한 병을 내려놓았다. 흘끔 내려다보니 항상 마차에 탈 때마다 마시는 멀미약이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병을 들고 멀뚱히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신경이 날카롭게 선 금색 눈동자가 나를 흘겨보았다.

“바쁘대도.”

“아, 네넵!”

반응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멀미약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다급히 챙겼다. 그 후 아스레인을 따라 연구실 밖으로 나가 마차가 들어선 정문까지 단숨에 주파했다. 키 차이 때문에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 나는 두 걸음을 가야 했지만, 거의 달리다시피 걸어간 덕분에 겨우 따라잡았다.

곧바로 마차에 올라타니 마부가 목적지를 듣지도 않고 출발했다. 턱밑까지 올라온 숨을 가다듬으며 맞은편에 앉은 아스레인을 바라보았다. 거의 죽어 가다시피 창백해진 나와 달리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허억, 헉…. 이제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는 거죠?”

쿵쿵 뛰는 가슴을 도닥이며 물으니 아스레인은 창밖에 머물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황성과 접한 작은 마을에서 서신을 보내왔네. 그는 자신을 ‘레톤을 모시는 신관’이라 밝혔지.”

신관이란 생소한 직업에 눈이 번뜩 떠졌다. 아멜리 백작이 가끔씩 신전에 헌금을 보내는 경우는 본 적 있어도 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지금껏 마주친 적 없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날도 평소처럼 제단 앞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지. 유독 새들도 지저귀지 않고 무거운 고요가 드리운 저녁, 창밖으로 어떤 그림자를 보았다더군.”

“…그림자요?”

“뱀처럼 긴 몸으로 숲속을 누비는데, 풀이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고 했네.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도 매끈한 머리를 들어 올리며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신기루처럼 한순간 자취를 감췄다는군.”

마물의 그림자. 어제 세잔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두 마리의 마물은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초조하게 손가락을 깨물다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신전이라도 마을과 꽤 가깝지 않나요?”

“음. 게다가 신력으로 보호받는 신전은 마물들이 유독 꺼리는 장소다.”

“그럼 특별한 이유가 있어 나타난 게 분명하네요.”

“신관도 그걸 이상하게 느꼈기에 내게 서신을 보낸 것 같네. …직접 와 달라고 말이지.”

타닥. 타닥. 딱딱한 바닥에 부딪치는 말발굽 소리가 마차 안에 드리운 침묵을 밀어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본능적으로 인간을 기피하는 마물이 마을까지 내려온 것인지 고민해 보았다.

굶주림 때문이라면 보통 식량이 많고 인적이 드문 곡물 창고로 향했을 터이다. 만약 육식을 한다면 마구간, 혹은 풍족한 농장이 되겠지. 하지만 이 마물은 다른 곳도 아닌 신전을 택했다.

“실은 어제 세잔 경에게 들었습니다. 그의 하인이 마을에서 마물의 그림자를 봤다더군요.”

“…사실인가?”

“예. 하지만 후작께서 기사단을 대령하여 조사한 결과 마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세잔 경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요.”

미간에 진 주름이 한껏 깊어졌다. 아스레인은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나 또한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마땅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끝내 마부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그렇다 할 단서를 집어내지 못했다.

마차에서 내리니 숲속 산장처럼 나무로 둘러싸인 대리석 건물이 보였다. 화려한 석상이 곳곳에 놓여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듯 갈라진 틈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나마 관리해 주는 이가 있어 이끼가 끼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졌다. 갑옷을 입은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병사의 석상 앞에 서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전이 꽤나… 분위기 있네요.”

애써 돌려 말했으나 아스레인은 주변을 휘 둘러보며 말했다.

“낡고 허름하군.”

“아, 음…. 네. 그렇네요.”

신전은 이 세상에 현신하지 못하는 신의 귀라 들었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신을 믿지 않는지, 면전에 대고 꽤나 솔직한 평을 날렸다. 물론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천장을 받친 두 개의 기둥은 위태롭게 금이 갔고 창문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도 빛바랜 유리에 불과했다. 심지어 벽에는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다소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핍박이라도 받는 건가요? 카르사 제국 안에서 모든 신은 평등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카르사 제국은 건국왕 유피테르의 선언으로 국교를 정할 수 없다. 물론 현 황제가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당대 신탁을 받는 신전이 달라지지만, 제국 안에서 모든 신은 평등하다. 따라서 어떤 신을 섬기든 그의 신관들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자네의 말이 맞네. 표면상으로는 말이지.”

“그 말은….”

“과거 시오 황제는 전쟁의 신 레톤을 대대로 따랐지.”

아스레인은 유유히 걸음을 옮겨 신전 앞뜰에 놓인 사자상으로 다가갔다. 포효하는 사자는 길쭉한 송곳니를 갖고 있었으나 그 끝이 비바람에 둥그스름하게 마모되었다. 아스레인은 새하얀 장갑을 벗고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사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은 돌가루가 떨어져 서 있는 게 고작인 사자상이지만, 한때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미 숨결을 빼앗긴 사자의 석상은 웅장한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신전을 위해 봉사하거나 헌납할 신도가 줄어드니 점점 허름해지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아스레인은 손끝에 묻은 먼지를 우아하게 털어 내며 다시 장갑을 꼈다.

“같은 이유로 에브게니아 황실이 모시는 메티스의 신전은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네.”

지혜를 관장하는 신, 메티스. 어디서 많이 들어 봤나 했더니 에브게니아 7세가 망조로 의심되는 신탁을 받은 장소가 바로 메티스의 신전이었다. 언젠가 황성 근처에 있는 메티스 신전을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저 앞에서 녹슨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오셨군요.”

쪽문을 열고 온통 새하얀 로브를 입은 사내가 나왔다. 어깨에 두른 푸른 천은 그가 걸을 때마다 파도처럼 너울너울 흔들렸다. 방문객에게 축복을 빌어 주려는 것일까. 정갈한 신관은 내 앞에 다가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세 손가락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짚고, 다른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레톤 신의 창이 그대를 향하지 않기를.”

신의 가호를 빌어 주는 것치고는 꽤나 두려운 문장이었다. 이윽고 벚꽃처럼 옅은 분홍색 눈동자가 아스레인을 향했다. 하지만 신관은 내게 했던 행동을 그에겐 하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서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교수께선 신을 믿지 않으셨죠. 하지만 레톤 님께선 당신을 부정하는 교수도 품어 주실 겁니다.”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분홍색 홍채가 묘하게 소름 끼쳤다. 이내 엷은 미소를 머금은 신관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제가 편지를 보낸 카르입니다. 미천한 몸으로 위대한 신 레톤 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태오입니다. 아스레인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죠.”

“반갑습니다. 태오.”

전에 보호소 플로라에서 만난 베르크 교수보다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지만, 선명한 안광이 이상하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신관들은 원래 이런 건가. 의례적인 인사를 끝내자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본론으로 들어갔다.

“편지는 읽었네. 그래서 마물의 그림자를 본 곳이 어디인가.”

“저쪽입니다.”

신관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신전 옆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니 곧 천막을 칠 수 있을 만큼 넓은 뒤뜰이 펼쳐졌다. 신관은 소매로 반쯤 가려진 손을 들어 뒤뜰과 이어진 숲을 가리켰다.

“처음엔 신께서 제게 계시를 내려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은 다른 때보다 훨씬 조용했고, 산들바람조차 불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횃불이… 그대로였습니다.”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신이 강림하거나 신탁이 내려올 때는 매번 신전 기둥에 꽂은 횃불이 푸른 불꽃으로 타오른다. 하지만 그 당시 사방에 놓인 횃불은 모두 잠잠했다고 한다. 아스레인은 뒤뜰을 둘러싼 나무 중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든 은행나무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자네 말고 누가 또 여기 있나.”

“이 신전엔 저를 제외하고 누구도 상주하지 않습니다.”

“신도는?”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입니다.”

기억을 더듬으려 입가에 손을 대고 있던 신관이 아, 하고 짧은 탄성과 함께 말했다.

“한 청년이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나무뿌리 근처를 어루만지던 아스레인이 손을 우뚝 멈추고 돌아보았다.

“자주 오던 신도인가?”

“종종 신전에 와 주시던 클라우스 자작께서 데리고 다니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이 혼자서 왔었죠.”

“그래서 아이는 뭘 했지?”

“당연히 기도를 하고 갔습니다. 신도가 기도실에 들어가면 저는 기도가 끝날 때까지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신관은 버릇처럼 입가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신전을 돌아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 솨아- 파도가 치는 듯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다가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아스레인은 앞쪽에 있었기에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홀로 수상한 낌새를 느끼던 차에 신관은 완전무결한 미소를 자아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차마 그 자비로운 얼굴을 향해 의심을 던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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