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짧은 연회가 막을 내렸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히페리온과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오니 나를 반겨 주는 것은 정든 연구실이 아닌 수북이 쌓인 서류였다. 아스레인이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이 잔뜩 밀려 있었다. 결국 쉴 틈 없이 연구실로 출근해 서류에 파묻힌 그를 보좌하기 바빴다.
“후우, 이제야 끝났네.”
녹은 치즈처럼 의자에 기대어 앉으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살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바짝 마른 낙엽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가슴을 곧게 펴고 숨을 깊이 들이쉬니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니 소매가 살짝 내려가면서 손목이 드러났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필리스 줄기로 만든 팔찌가 한껏 눈에 띄었다. 아쉽게 헤어지기 전, 히페리온이 내게 건네준 선물이었다. 오랜 시간 그의 몸에 달라붙어 마력을 머금었다고 했던가. 듬성듬성 줄기에서 나온 여린 나뭇잎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이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아스레인은 내 마력이 심각하게 희박해서 마법을 쓸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 말은 즉 마력만 채워진다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 또한 세잔이나 아스레인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단 생각에 철없는 심장이 뛰었다.
당장 뭐라도 휘두르고 싶다만, 기본기도 모르는 채로 마법을 썼다가 어떤 꼴을 볼지 모른다. 기초 서적이라도 찾아 읽으려 얼른 도서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늘어선 수십만 권의 책을 지나쳐 곧바로 마법학 코너로 들어갔다.
설레는 마음을 끌어안고 사다리를 가져와 위에서부터 제목을 훑었다. ‘공격 마법의 득과 실’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법’ ‘쉽게 외우는 기도문 100선’ 다양한 책 사이에서 초심자가 읽으면 좋을 법한 책을 골라 품에 안았다.
그 후 조심스럽게 사다리에서 내려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태오 형?”
이 세계에서 나를 저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세잔!”
반갑게 맞이하니 세잔이 미소를 지으며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내 품에 끌어안은 책 제목을 확인한 그가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마법 공부를 시작하신 겁니까?”
“하하… 민망하지만 맞아요. 그래 봤자 기초 중에 기초인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조차 모르지만요.”
“원리만 이해하면 쉽습니다.”
꼭 낯선 분야를 교양 수업으로 들을 때 비슷한 전공을 가진 애들이 저렇게 말했었다. 수학으로 치면 덧셈 뺄셈조차 모르는 건데, 벌써 원리를 논하니 멋쩍은 웃음만 나왔다. 조용히 책을 뒤적이자 세잔이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였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부족하지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모르는 부분은 굳이 책을 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끝까지 난생처음 보는 단어들만 가득할 것이다. 선뜻 대답은 않고 하드커버 위를 쓰다듬다가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바빠요?”
“예? 아뇨. 수업 전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럼 혹시 궁금한 것부터 물어봐도 될까요?”
짙푸른 눈동자가 일순 당황한 듯 빠르게 흔들렸다.
“어떤 걸… 말입니까?”
“전혀 어려운 건 아니에요.”
그럴 실력도 안 되고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예전에 세잔이 설명해 준 덕분에 마법을 쓰는 방법은 이해했어요. 마력이 충분한 사람은 짧은 명령만으로 가능하지만, 부족한 경우에는 기도문을 외워야 한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축적한 마력과 소비해야 하는 마력 사이의 간극을 기도로 채우는 겁니다.”
“정말… 그 방법뿐인가요?”
팔찌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려 에둘러 물으니 세잔이 한 박자 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 후 말이 길어질 것 같다며 도서관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서둘러 책을 제자리에 꽂고 그를 따라 도서관 옆에 마련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말을 고르던 세잔이 한 손가락씩 펼치며 말했다.
“알고 계신 대로 마법을 쓰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만의 마력을 쓰는 것과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 그 외에도 조금 다른 부류이긴 합니다만… 신력으로 마법과 비슷한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신력이라면… 전능한 신을 말하는 건가요?”
“예. 저 같은 마법사들도 기도의 힘을 빌리긴 하지만 신력을 이어받은 신관은 다릅니다. 모든 원리를 무시하고, 오직 신의 뜻을 따라 기적을 행하니 진정한 마법이라 볼 수도 있겠군요.”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요.”
“그만큼 신의 선택을 받기란 쉽지 않으니 지금만큼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세잔이 설명을 이었다.
“만약 기도문을 외우고 싶지 않다면, 달리 마력이 응집된 물건을 쓸 수도 있습니다.”
“마력이… 응집된 물건이요?”
이거다. 호기심을 내비치자 세잔은 조심스럽게 셔츠 안쪽에서 얇은 금속 줄을 끄집어 냈다. 옷으로 가려져서 몰랐지만, 그는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 끝에는 작은 유리 조각이 달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각도에 따라 여러 빛깔을 내는 것이 꼭 석영 같았다.
“기본적인 예는 마석이 있습니다. 바다 밑이나 동굴같이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광석은 공기 중에 흩어진 마력을 흡수하곤 하죠.”
“그럼 지금 여기에도 마력이 들어 있나요?”
“아쉽게도 이건 축적된 마력을 전부 소모했기에 단순한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잔이 목걸이를 빼서 준 덕분에 자세하게 마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들어 햇빛에 비쳐 보니 마치 프리즘을 투과한 것처럼 흐릿한 무지개가 생겼다. 보석처럼 반짝거린다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리 돌려 봐도 평범한 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보였다.
“그럼 세잔도 가끔 마석을 쓰나요?”
“아뇨. 전 한 번도 쓴 적 없습니다.”
“…어째서요?”
마석을 돌려주면서 묻자 세잔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위험 부담이 큽니다. 마석에 축적된 마력과 시전자 본인이 가진 마력의 성질이 크게 다를 경우 체내에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이어진 설명을 듣다 보니 다른 혈액형의 피를 받으면 몸이 위험해지는 수혈의 원리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마력이 흘러 들어오면 코어가 마력을 밀어내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단다.
“최악의 경우에는 마력을 축적하는 코어는 물론이고, 장기가 모두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네요. 그래서 기도문을 외우는 방법을 택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성질이 유사한 마석을 찾을 경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하진 않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정보를 들어 표정이 굳었다. 넝쿨로 된 팔찌를 어루만지다가 나도 모르게 팔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연 히페리온의 마력이 내게는 어떻게 작용할까. 방대한 힘이 들어와 유리병처럼 허약한 몸뚱어리에 금이 가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이렇게 되면, 기껏 히페리온이 선물한 마력을 쓰지도 못하고 썩혀야만 할지도 모른다.
“마석을 쓰시려는 겁니까?”
“고려는 하겠지만, 부작용을 생각하니 조금 무서워지네요.”
혹 걱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날까 봐 한숨을 삼키며 웃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세잔.”
“아닙니다. 저야말로 아직 부족하지만 마법에 대해 알려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때마침 저 멀리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댕댕, 하고 울렸다. 잠깐 질문만 하고 보내 준다는 게, 세잔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 버렸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본관을 가리켰다.
“저거 수업 시작 종 아니에요?”
“예. 시간이 정확히 맞았네요.”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누가 봐도 나 때문에 지각한 것 같아서 전혀 안 괜찮은데?! 이상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건 나뿐이었고, 세잔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 마음이 급해져 너른 등을 쭈욱 밀자 그가 못 이기는 척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 떠오른 듯 우뚝 멈춰 서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혹시 학교 밖으로 자주 외출하십니까?”
“어… 기숙사에서 지내니 일이 없는 이상 잘 안 나가요. 왜요?”
방금 전과 달리 사뭇 진지해진 세잔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여기서 멀리 떨어진 마을이긴 하지만…, 제 하인 중 하나가 심부름을 나갔다가 마물의 그림자를 봤다고 합니다.”
“마, 마물의 그림자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마물의 그림자가 다른 곳도 아닌 마을에 나타났다니. 황성이었다면 방방곡곡에 회보가 날아다녔을 만큼 심각한 소식이었다. 세잔의 가문이 관리하는 영지가 다소 떨어져 있어 아직 소문이 나지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즉시 기사단에게 명하여 인근을 조사했습니다만, 야생 동물이나 여타 그림자를 마물로 착각한 것 같다고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요?”
“하지만 제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잠시 턱을 어루만지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하인은 진심으로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어머니께서 사냥을 나가시는데, 그때마다 피를 보고도 안색 하나 변치 않고 박수를 쳐 주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으음….”
“게다가 시답잖은 장난을 칠 사람이 더더욱 아닙니다.”
정황 증거뿐이지만, 그의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다. 하인 생활을 거친 나이니 더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알량한 관심을 받기 위해서 감히 주인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후작의 결론처럼 단순히 착각이거나, 세잔의 생각처럼… 진짜 마물이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조심하세요. 저도 계속 조사를 해 보려고 합니다.”
서서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