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39/305)

#39

언덕을 올라올 때부터 감미로운 연주 소리가 들렸다. 히페리온에게 선물한 치자꽃이 야외 연회장을 장식했고, 각 테이블마다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 마련되었다. 관계자 외에도 수많은 인사들이 연회에 자리해 막 도착한 아스레인을 반겨 주었다. 그의 뒤에 보좌관처럼 서서 가끔 눈이 마주치면 정중히 예의를 차릴 뿐이었다.

이제 좀 쉬려나 싶었건만, 곧바로 아스레인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아스레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편히 즐기도록 하게.”

“네. 다녀오세요.”

연회장 중심에서 주요 인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아스레인이 단상 위로 올라가니 베르크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들었다. 적당히 구색을 맞추기 위해 주스가 담긴 동그란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 모이자 베르크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마물을 배척하던 암흑기는 이제 갔습니다. 위대하신 선황께서 베풀어 주신 쿠네 숲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자연에서의 삶을 되찾을 겁니다.”

이윽고 베르크는 테이블에 놓인 그릇에서 금빛 향료를 적당히 찍어 유리잔 위에 발랐다. 두 손가락을 따라 길게 난 흔적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러자 단상 아래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베르크의 행동을 따라 했다. 눈치만 살피다가 검지에 염료를 묻혀 매끈한 표면에 살짝 묻혔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베르크는 우아하게 잔을 하늘로 향해 들며 말했다.

“마물을 굽어살피는 그분의 가호가 이 금빛 염료에 깃들기를 바라며.”

그분의 가호라니. …에브게니아 황제를 말하는 건가? 충성심 가득한 건배사를 들으며 새콤한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베르크의 짧은 연설을 끝으로 아드 쿠네 연회가 시작되었다. 인사들은 염료가 발린 잔을 든 채로 이리저리 안부를 물으며 다녔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 용기도, 이유도 없는 나는 제자리에 앉아서 얌전히 다과를 집어 먹었다. 모두가 나라에 대해 얘기할 때, 홀로 라즈베리 쿠키의 바삭한 식감과 버터 향기에 대해 고찰했다.

만족스럽게 쿠키를 야금야금 해치우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쿠키를 입에 물고 고개를 돌리자 벽돌색 머리카락에 서글서글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어라, 진!”

“수고했어요. 태오. 히페리온을 이동하는 ‘길잡이’가 되었다면서요?”

“헤헤, 다행히도 성공했죠.”

“대단해요. 다들 누구냐고 수군거리기에 신나서 아스레인 교수님의 새로운 제자라고 떠들었지 뭐예요.”

“아하하….”

왠지 쿠키 먹는데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진도 수고 많았어요. 지도 교수님과 함께 온 거예요?”

“네. 저기 계시네요.”

진의 시선을 따라가니 퍽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는 진을 달달 볶겠지. 예전 내 지도 교수가 떠올라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술이 당기는지,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칵테일이 반쯤 담긴 길쭉한 잔을 대뜸 가져왔다. 그러곤 꽤 익숙한 손길로 금빛 염료를 찍어 잔에 대충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왜 하는 거예요?”

아. 짧게 탄식한 진은 염료를 보이며 말했다.

“더러는 부를 뜻하는 황금을 특별히 발라 준다고 생각하지만, 마물에게 인간이 부여한 상징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럼 달리 뜻하는 게 있나요?”

“쿠네 숲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그의 색을 발라 온갖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길 기도하는 거예요.”

“…그가 누구죠? 역시 황제 폐하인가요?”

뜸을 들이며 물으니 진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금빛은 ‘그 마물’을 나타내는 상징이에요.”

그 마물…? 대명사만 듣곤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진이 테이블로 몸을 기울이며 은근히 물어보았다.

“혹시 카르사 제국의 건국 신화에 대해 알아요?”

“아, 네! 전에 시장에 가서 연극을 본 적이 있어요. 전설 속 마물이 어느 날 대륙을 침략하고… 그걸 카르사 유피테르께서 막으셨다고요.”

“맞아요. 그 말 그대로예요.”

진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불쑥 의문이 일었다.

“…설마 죽은 마물에게 가호를 바라는 거예요?”

“하하, 아니요. 실은 꽤 오래전, 황실 역사학자들이 반론을 내놓았어요. 사실 전설의 마물은 쌍생이었다고요.”

“싸, 쌍둥이라고요?”

“네. 한쪽은 인간에게 적대적이었으나, 또 다른 한쪽은 우호적이었다는 거죠. 건국 왕께서는 적대적인 형을 죽여 대륙의 평화를 가져왔고…. 홀로 남은 아우이자 마지막 전설이 된 마물에게 가호를 바라는 거예요.”

“으음….”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전설이 실제는 아니지만, 일단 역사를 바꾸는 짓을 하는 저의는 뻔했다. 합리화와 여론 생성. 에브게니아 황실은 이전 시오와 달리 마물에게 우호적이다. 따라서 마물을 죽인 신화를 그대로 쓸 수는 없고, 그렇다고 위대한 건국 왕을 지울 수도 없으니 입맛대로 바꾼 게 분명하다.

건국 왕께서 죽인 마물이 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었다고 프레임을 씌우면, 건국 왕에 대한 정당화는 물론이고 위상까지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의문점을 입 밖으로 내었다간 다음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으니 얌전히 속으로 삼켰다.

“그 마물의 이름이 뭔데요?”

“알려진 바는 없어요. 단지 이야기를 전승하는 자들이 편의를 위해 이름을 만들어 냈죠. 하지만 마물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존경하는 의미에서 감히 이름을 정하지 않고 ‘그분’ 혹은 ‘그 마물’이라고 지칭해요.”

단순히 전설이니 가볍게 넘겨들으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소설을 읽은 내가 ‘전설의 마물’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턱을 어루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잠시 말하길 망설이던 그의 입이 열렸다.

“사실… 허무맹랑한 전설이라 말하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옛적부터 그를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은 몇몇 있었어요. 바로 시오 때까지만 해도 목격담은 꾸준히 나왔죠. 하지만 소식을 들은 학자가 찾아가기도 전에 제보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사라졌어요.”

전설을 마주한 자가 있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그들이 하나같이 사라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진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벌어진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그럼 연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나요?”

“아뇨. 왕조가 바뀌면서 들어서면서 전면 중단됐어요. 후환이 두려워서 안 하는 것도, 자료가 부족해 못하는 것도 있겠죠. 아무도 하지 않은 연구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칵테일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으로선 그 마물에 대한 논문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은 돌아보지도 않고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모양이다.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축 처진 어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께서 부르시네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네! 학교로 돌아가서 봐요.”

“하아, 태오도 남은 연회 편하게 즐겨요.”

진이 자리에서 떠난 후, 그릇에 가득 담긴 염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름 없는 마물. 소설을 읽은 나조차 모르는 걸 보면, 아마 마지막 권에나 등장하는 것 같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허튼 호기심이 나를 갉아먹을 걸 알면서도 쉬이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미지에 대한 연구는 학자의 숙명이니까.

여러 추측에 사로잡힌 사이, 테이블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번뜩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아스레인이 곁에 왔다.

“어? 언제 오셨어요?”

“방금. …그보다 매번 오는 연회다만, 허례허식은 바뀌질 않는군.”

부쩍 지쳐 보이는 아스레인에게 달콤한 라즈베리 쿠키를 권했다.

“원래 피곤할 땐 디저트라잖아요. 어떠세요?”

아스레인이 웬일로 흔쾌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쿠키를 잡는 줄 알았던 손은 난데없이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커다란 손으로 단숨에 소매를 걷은 그는 손목을 두른 필리스 넝쿨을 빤히 쳐다보았다.

“못 보던 물건이네만.”

“아, 히페리온…의 씨앗에게 보답이라 받았어요.”

“왠지 어제부터 마력의 흐름이 바뀌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히페리온의 덕이었구나.”

“감사하게도요.”

마치 검색대에서 위험한 물건을 확인하는 보안관처럼 아스레인은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본 후에 손목을 놓아주었다. 어렵게 권한 쿠키는 불쌍하게도 찬밥 신세가 되어 버렸다. 대신 그는 와인을 가져와 티타임을 갖는 것처럼 고상하게 홀짝였다.

“이번 ‘아드 쿠네’를 마치면서 베르크 교수가 자네에게 특별히 보답을 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했네.”

“예? 어우, 아니에요. 전 차려진 만찬에 포크만 얹었을 뿐인걸요.”

“그럴 줄 알고 내 선에서 거절했지.”

“하아, 감사합니다. 저런 자리는 조금… 아니. 많이 부담스러워요.”

아스레인에게 주려던 쿠키 끝을 살짝 깨물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절대 아니니까요.”

오직 히페리온이 무사히 숲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다. 사이누르를 구했을 때도, 지금도, 마물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왠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으로 추켜세워지는 것이 민망해서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저… 아까 진에게 들었어요.”

“음?”

“금빛 염료를 바르는 이유 말이에요. ‘그 마물’에게 가호를 바라는 의식이라면서요.”

아스레인이라면 그 마물과 엮인 전설에 대해 남들보다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전설을 언급하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단지 전설일 뿐이다.”

“그래도요. 솔직히 마물에게도 신적인 존재가 있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여느 과학자들이 미신을 싫어하는 것처럼 그 마물의 전설을 증거 없는 낭설이라 여기는 건가. 가지런한 미간에 진 그림자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조금 미안해지더라고요.”

“뭐가 미안하지?”

“모두가 그 마물에게 보살펴 달라고 기도하지만…, 정작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겠구나.”

히페리온을 인도할 때도 그랬다. 많은 이의 소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히페리온에게도 분명 소원이 있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소망하지 않는 생명은 없으니까. 그럼 그의 소원은 누가 들어줄까… 하는 당연한 걱정이 이어졌다.

“불공평하잖아요? 대가도 없이 일방적으로 가호를 바라는 건.”

“이토록 쓸데없는 고민은 처음 듣는군.”

“하하, 역시 그렇죠?”

감미로운 연주와 복작거리는 소음이 어지럽게 뒤섞인 사이,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한 아스레인은 홀로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살짝 찡그린 눈가엔 미약하게나마 불쾌함이 서렸다.

“아무도 그런 멍청한 걱정은 하지 않아. 이용하면 그만인 족속이니까.”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치듯 짧은 인생을 사는 나이기에 감히 이런 걱정을 할 수 있는 듯했다.

절대자들은 외롭다고 들었다.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조차도 그의 주변에 열둘의 제자를 두지 않았나.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자에게 불필요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오지랖을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마물들의 행복을 빌 때마다 틈틈이 그를 위해서도 기도하려고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에도 비웃음을 사리란 예상과 달리 아스레인은 사뭇 충격을 먹은 듯 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움찔거리던 입술을 꾹 깨문 그는 이윽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태오.”

“어, 음… 네?”

“자넨 이따금씩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군.”

아스레인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려 활짝 웃었다. 시원하게 웃는 그는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함께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아.”

이상하게 그의 미소는 다 타 버리고 남은 잿더미처럼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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