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38/305)

#38

난데없는 부탁에도 아스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관계자에게 치자나무 묘목을 가져가는 걸 허락받고 자그마한 화분을 품에 안았다. 서둘러 히페리온에게 가는 길목에 치자 꽃향기가 진하게 남았다.

“여기면 되겠지…?”

히페리온 곁에 마침 삽으로 미리 만들어 둔 구덩이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화분에서 치자나무 묘목을 꺼내어 심고 손으로 흙을 덮었다. 더러워진 손을 보이면 아스레인에게 또 혼나겠지. 그럼에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오직 히페리온을 위해 더러워진 손으로 꽃을 가져온 아이의 심정이 십분 이해됐다. 부드러운 흙을 전부 덮고 나니 산들바람을 따라 꽃송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막 눈을 떴을 때 더는 외롭지 않을 거야.”

전해지지 않을 말을 건네며 손끝으로 치자꽃을 톡, 건드렸다. 그 순간 예고 없이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은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허공에서 미성이 울렸다.

[그대였구나.]

어둠 속에서 맹랑한 씨앗들을 돌보던 그 목소리였다. 두 팔을 내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히…페리온?”

이름을 부르니 나뭇잎이 한데 모여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을 만들었다. 상반신밖에 없는 형상은 공기의 흐름을 따라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믿기 힘든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완전히 회복한 건가요?”

[아직은 더 자야 하지만, 이리도 좋은 향기가 나는데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지.]

나뭇잎 나비 한 쌍이 만개한 꽃 위에 앉아 날개를 팔랑거렸다.

[어르신께는 턱없이 부족한 꽃이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씨앗들은 꽃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이젠 저 아이들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기에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자그마한 무례도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를 놀리는 씨앗들을 향해 퍽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고 해야지.]

[…고맙습니다.]

철없는 아이를 혼내는 부모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조심스레 몸을 숙여 치자꽃에 앉은 까슬까슬한 나뭇잎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러자 씨앗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끄트머리부터 물든 단풍이 왠지 부끄러워 불그스레한 뺨을 보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도망가 버린 씨앗을 향해 손을 흔들곤 인자한 웃음을 짓는 히페리온을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동안 당신이 깨어날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전부 그대 덕분이야. 내 보답을 하고 싶거늘… 혹 원하는 것이 있느냐.]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다운 말이었다.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 작은 소원은 이미 히페리온이 깨어난 걸로 이루어졌으니까 달리 없어요.”

[그래도 말해 보거라. 소망하지 않는 생물은 없으니.]

“…하려다가 포기한 일은 있죠.”

비브린트 숲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고 싶지만, 사실을 마주함으로써 얻는 부담감을 이겨 낼 자신이 없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그러니 당장은 누르가 무사히 깨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으로도 만족해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나무껍질을 쓸어내리니 히페리온의 형상이 일렁거렸다.

[원하는 것을 전부 얻을 수는 없지. 그대는 현명하구나.]

“그런 건 아니지만요….”

과분한 칭찬에 쑥스러워져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엇이든.]

인자한 목소리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대답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히페리온은… 어째서 인간을 미워하지 않나요?”

이동 마법에서 ‘길잡이’가 되어 히페리온의 기억을 엿본 후로 줄곧 궁금했다. 아무리 아이로부터 꽃을 선물받았다지만, 어찌 몸의 일부인 가지를 억지로 잘라 간 인간마저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자애로움이라 이해하려 해도 쉽게 납득이 되진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물었으나 돌아온 것은 허물없는 웃음이었다.

[어째서 미워해야 하나.]

“하지만 이 상처를 만들어 낸 건 인간이에요.”

밑동에 찍힌 커다란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지금도 깊게 파인 흉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제멋대로 찾아와 소원을 빌어 놓고 마음처럼 되지 않자 도끼를 들었다. 배은망덕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있을지라도 마땅히 악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설명하니 히페리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옛날얘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엔 단지 햇빛이 잘 드는 것이 마음에 들어 뿌리를 내렸네. 그러던 어느 날… 한 인간이 찾아왔지. 숲에서 잃어버린 장신구를 찾아 달라고 했던가. 그래서 새들의 도움을 받아 그 인간이 다시 찾아온 날에 빛나는 것을 주었지. 그게 시작이었어. 그 후로 어떤 인간은 내게 영생을 바랐고, 또 다른 인간은 가족의 평안을 바랐네. 그땐 무턱대고 찾아와 무릎을 꿇는 것이 우스웠지. 소원을 들어준 것은 내가 아니라 숲의 주민인데 말이야.]

히페리온이 말을 멈추자, 쏴아아-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하나둘씩 오고 가는 인간이 늘어날수록… 신기하더구나.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는 인생을 살면서 왜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깨달았네.]

스산한 바람에 묻힌 목소리는 퍽 쓸쓸했다.

[저게 살아 있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저들이 살아 있는 거라면, 나는 뭘까.]

말문이 턱 막혔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 부족한 것이 없는 줄 알았던 그의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느끼는 순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숨만 붙어 있다고 불멸자라 할 수 있겠느냐.]

“…히페리온.”

[그러니 저 흉터는 살아 있는 인간의 발악이자,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삶의 증거이네.]

나뭇잎 새로 햇빛이 흘러 들어와 금색 향료를 바른 자국이 찬연히 빛났다.

[비록 비틀린 형태로 나타났으나 나는 그 인간을 원망하지 않네. 이런 나를 어리석다고 욕해도 어쩌겠나.]

“…아니에요. 어리석은 건 저였어요.”

깊은 속내도 모르고 무례한 질문을 해 버렸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후후. 부드럽게 웃은 히페리온은 형태가 없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기도, 분노도, 사랑도… 전부 자연스러운 것이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그대를 결정할 뿐. 결코 감정을 부끄러워 말게.]

머리카락에 닿은 다정한 무게감에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씨앗마저 나타나 마치 위로해 주듯 내 주변을 배회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들어 올리니 히페리온이 숨을 짧게 들이쉬며 말했다.

[그럼 내 멋대로 선물을 하나 하겠네. 이미 그대에겐 좋은 것이 붙어 있지만, 작은 성의라 생각해 주게.]

그가 손을 뻗자 꽃에 앉아 있던 씨앗이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씨앗은 이내 한 뼘만 한 넝쿨 줄기를 가지고 내려왔다. 조심스레 씨앗을 향해 손을 뻗으니 기다렸다는 듯 손목에 넝쿨을 휘감아 주었다. 마치 실을 꼬아 만든 팔찌처럼 살결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이 몸에 가장 오래도록 붙어 있던 필리스 줄기네. 비록 뿌리가 끊겨 더는 자라지 않겠지만, 충분한 마력이 깃들어 있지.]

“마력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히 여길게요. …진심으로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버렸다. 기묘한 힘을 뿜어내는 넝쿨을 구경하는데, 히페리온이 느릿하게 말했다.

[나는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몸. 하나, 그대가 부른다면 나의 아이들이 기쁘게 달려갈 터이니 걱정 말게나.]

“하하, 씨앗들이 와 준다면 든든하긴 하겠네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니 그의 웃음소리가 공명하듯 울렸다. 기분 좋은 여유도 잠시. 평화를 깨트릴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으로 만들어 낸 형상이 크게 휘청거렸다. 상태가 걱정되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힘을 쓴 탓일까. 생기를 잃은 나뭇잎이 하나둘씩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다시 잠이 오기 시작하는구나.]

“아, 이런…. 저는 이만 자리를 피할 테니 편히 쉬세요.”

팔찌를 소중하게 감싸며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대로 걸음을 돌리려 하자 나직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그대, 잠시만.]

“…예?”

뒤를 돌아보니 반만 남은 형상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들판에 하얀 꽃이 가득해질 봄날이 되면, 나를 다시 찾아와 주겠느냐.]

“물론이죠. 반드시 히페리온을 보러 쿠네 숲으로 돌아올게요.”

[다음이 기다려지긴 처음이구나.]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금 거센 바람이 불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가리고 어렵게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뭇잎 사이로 여름날 녹음을 끌어안은 녹색 눈동자가 얼핏 스쳤다. 가늘게 휘어진 눈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이 히페리온의 진실한 형상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엉망이 된 옷자락을 정리하는 때 마침 시스템의 음성이 들렸다.

- NO. 57 ‘히페리온’과 교감을 확인했습니다.

씨앗이라 불리는 사념체를 부려 1급 위험에 분류되었으나, 자신을 해치는 인간에게도 기꺼이 그늘을 내어 주는 인자한 마물.

- 마물 도감 가동. ‘히페리온’을 관계 평가 ‘수호’로 등록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단계가 해금되었다.

6